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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밀양 - 5. 교회와 신: 가족의 초월적 기표 본문

연재/시네필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5. 교회와 신: 가족의 초월적 기표

건방진방랑자 2020. 2. 27.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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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와 신: 가족의 초월적 기표

 

 

불행과 하나님

 

밀양에 터를 잡을 즈음, 신애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에 들어간다. 약사는 신애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거라고 진단한다. 혼자 사는 여자는 분명,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사실은 생리통이었다. !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약사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신애한테 하느님 말씀이 담긴 책자를 선물한다.

 

 

약사: 원장님처럼 불행한 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꼭 필요해요.

신애: 저 불행하지 않아요, 약사님. 잘 살고 있어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는 불행하다. 그래서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 이 말은 거꾸로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하느님이 필요하려면 불행해져야 한다? , 기독교 신앙은 불행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신애는 불행하지 않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밀양에서 새로 시작할 참이었으니까. 남편과의 끈을 이어주는 아들 준도 있었으니까.

 

 

약사: 그라니까네, 우리 원장님은 눈에 보이는 거는 믿고 눈에 안 보이는 거는 안 믿는다 그지예?

신애: 전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안 믿어요.

 

 

그러나 준이를 잃고 나자 그녀는 명명백백하게(!) 불행해졌다.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이제 마음을 의탁할 거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탓이다. 약국집 여자는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너의 고통과 불행을 치유할 수 있는 건 하느님 사랑밖에 없다,고 신애를 설득한다. 하지만 신애는 반문한다.

 

 

신애: 만약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시다면요……

약사: 하나님 계시지예. 하나님 사랑이 크시지예. 한도 끝도 없이 크시지예.

신애: 그렇다면 우리 준이가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셨어요?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자 약사는 말한다. 세상 모든 것, 저 햇볕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 그 말에 신애는 여기, 뭐가 있어요? 그냥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여기.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태양은 태양일뿐이다. 거기에 뭔가 깊은 뜻이 숨어 있을 리 없다. 밀양을 비밀의 태양이라고 풀이했던 그녀가 태양은 그저 태양일뿐이라고, 비밀 같은 것은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그녀는 온힘을 다해 자신에게 덮친 운명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해서, 준이의 사망신고를 하러 갈 때도 종찬의 손길을 물리친다. 하지만 결국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던 도중, 정신을 놓쳐 버린다. 주민등록번호를 잊어먹고,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다 쏟아버리고,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막무가내의 히스테리를 부리고, 거리로 뛰쳐나와 꺽꺽거리며 가슴을 쥐어뜯는다. 몸이 마음의 짐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그때 그녀의 시선이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는 부흥회 현수막에 가 꽂힌다. 이제 살기 위해선 저걸 붙들어야 한다!

늘 그렇듯이 교회 부흥회는 열광의 도가니다. 신애는 그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처절한 울음을 토해낸다. 주님의 치유의 권능이 행사되는 순간!

 

그렇게 이 가슴이 누가 손으로 막 짓누르는 것처럼 많이 아팠는데요, 이젠 안 아파요. 평화를 얻었어요. 이젠 정말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었어요.”

 

성령의 부름을 받고 그녀는 주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청준의 원작 벌레이야기에는 이 부분이 주를 이룬다. 신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거기에서 오는 실존적 고뇌가 벌레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래서 신의 섭리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질문을 던지지만 이런 구도 자체가 기독교적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영화에선 초점이 좀 다르다. 교회는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 선 신애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코스다. , 남편이 죽고 나서 밀양이라는 미지의 고향을 찾아왔듯이, 불행의 극한에서 그녀는 다시 더 크고 강력한 존재인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 고향이 가족의 다른 이름이었듯이, 교회와 신 역시 그녀가 꿈꾸는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성모독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은 <초록물고기>의 막동이가 카바레 가수 미애를 통해 배태곤의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조직의 넘버 원 배태곤이 막동이에게 말한다.

 

너 무슨 일하고 싶어? 앞으로 커서 머 되고 싶어?”

젊은 놈이 왜 그래 임마! 잘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거 어떻게 살려고 그래, 젊은 놈이! 꿈이 있어야지, 젊은 놈이 말이야.”

이제부터 형이라고 불러라. 넌 내 막동이 동생이다.”

 

교회에서도 그렇다. 신자가 되는 순간,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 아래 모든 신자들과 형제자매가 된다. 교회 또한 일종의 커다란 패밀리인 것이다. 교회건 조폭이건 호칭이나 어법이 가족적 담화방식과 동일한 건 그 때문이다. 막동이가 조직에서 새로운 고향과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것처럼, 신애 역시 교회 안에서 밀양과 아이를 통해 이루려 했던 가족적 판타지를 다시 한 번 구축하고자 한다. ‘, 고향, 가족의 트리아드Triad!

 

 

 

 

 

기독교를 통해 무너진 가족 판타지를 재구축하려 하다

 

사실 이런 식의 인식론적 표상은 처음 이 땅에 기독교가 도래할 때부터 비롯되었다. 20세기 초에 나온 신문매체들을 보면,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대변동기에 대중들이 새로운 의지처를 찾아 기독교에 입문하는 모습, 그리고 그에 힘입어 세를 확장해 가는 예배당들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종교에 대한 광신을 낳고, 기르고, 강화시키는 것은 바로 공포라고 하는 스피노자의 말이 환기되는 장면들이다. 그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100년간 한국인의 국가적 공포는 한층 더 격심해졌고, 그에 비례해 지금 이 순간까지 기독교는 변함없는 항진을 계속해 왔다.

기독교는 그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이름으로, 근대의 이름으로, 아니 제국의 표상으로 이 땅에 왔고, 한국인의 영혼에 뿌리를 내렸으며, 지금 우리가 온몸으로 확인하듯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다. 도심 곳곳을 수놓는 십자가의 행렬을 보라! 마치 원초적 본능이기라도 하듯 한국인은 온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도대체 교회 없는 삶, 기독교 없는 한국 근대사를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일본 근대의 중심에 천황제가 있다면, 한국 근대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 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인회 등 각종 서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솔직히 신자들한테는 기독교 자체보다, ‘우리 교회에 대한 의식이 훨씬 더 크다. 그 결과, 전국 방방곡곡 어디건 근대화가 추진되는 곳에는 학교, 병원과 더불어 반드시 교회가 터를 잡곤 한다. 부연하면, 한국인에게 있어 근대화란 학교에서 근대지식을 주입받고, 병원에 몸을 맡기고, 교회에서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면 신애가 밟고 있는 이 코스가 충분히 납득 가능할 것이다. 그녀의 불행은 단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 유괴범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허황된 욕망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 여기에는 실로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적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전혀 없다. 오직 남편과 아들을 대체할 만한, 혹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렬한 대상과 접속함으로써 다시 한 번 망상을 구축해보는 수밖에는. 밀양으로 내려오면서 남편의 배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듯, 그녀는 또 다시 그 참담한 비극을 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더 큰 패밀리’, 신이라는 더 강력한 초월자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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