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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6. ‘신앙’ 혹은 과잉열정 본문

연재/시네필

[이 영화를 보라] 밀양 - 6. ‘신앙’ 혹은 과잉열정

건방진방랑자 2020. 2. 27.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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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앙혹은 과잉열정

 

 

조폭조직과 교회, 가족

 

조직과 교회, 그리고 가족의 공통점은? 안팎의 경계가 선명하다는 것. , 이질적인 타자들의 어울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설령 이질적인 존재가 결합한다손 쳐도 즉각 그 세계에 동화되어야만 한다. , 이 집합체들은 아주 강력한 동일성의 장이라는 것이다. 조직에선 큰 형님, 교회에선 하느님 아버지, 집에선 아버지(혹은 어머니)라는 제일의적 중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 속에선 끊임없이 사랑 혹은 충성을 확인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가족이 지옥이고, 충성심 없는 조직이 허깨비인 것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인할 수 없는 교회 역시 생명력이 희박하다. 부흥회나 사경회를 통해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은혜를 받는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열정의 과잉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옷가게에서 이웃집 여자들과 떡볶이를 먹는 장면. 옷가게 주인이 신애한테 대체 뭐가 그렇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그건요, 그냥 느끼는 거예요. 꼭 연애하는 거 같애요. , 연애하면 누가 날 사랑해주고 생각해준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하잖아요. 하느님이 날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는 느낌, 그걸 매순간순간 느끼고 너무 분명하게 느낄 때마다 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하느님의 사랑은 크고 넓다. 하늘만큼, 태양만큼. 햇볕이 없는 곳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모든 곳에 숨어 계신다. 헌데,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주보다 넓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신이라는 것. , 매우 뚜렷한 주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신애의 이 대사는 맞는 말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연애의 구조와 꼭 닮았다. 누군가가 날 아껴주고 사랑해준다는 느낌, 그럴 때 차오르는 황홀감,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심리적 구조다.

 

 

 

 

 

감춰둔 울분과 억누른 상처

 

하지만, 그 같은 과잉열정은 영속적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외부의 권능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그녀의 내적 동력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녀의 고통과 상처는 치유된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ㆍ봉쇄되었을 뿐이다. 밤에 홀로 밥을 꾹꾹 눌러 먹으며 복받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신애는 필사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하옵시며”, 그리고 길거리에서 유괴범의 딸이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다가 큰 사고를 낼 뻔한다. 그때 치일 뻔했던 사람이 말한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답니까?”

순간, 신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장면들이 환기하는 바, 그녀가 지금 누리는 평화는 또 다른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

정말로 상처가 치유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인과의 그물망을 넓게 칠 수 있어야 한다. , 사건을 일으킨 욕망과 인연의 엇갈림, 그 심연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신애는 이 과정을 생략한 채, 하나님이라는 초월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삶은 우발적이다. 도처에서 느닷없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들을 만들어낸다. 그때마다 그녀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상처가 자꾸 비집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건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 자꾸 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 저의 크나큰 용서를 보아주옵소서

 

그녀는 이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무리수를 감행한다.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그 죄인을 용서해주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용서해주려고요. 저한테 너무 큰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주라고 하셨잖아요.”

 

엄청난 도박, 아니, 함정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다. 아니, 자신한테 속고 있다. 용서는 윤리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능력과 힘의 문제이다. 피해자 처지에 있는 한 진정한 용서란 불가능하다. 폭력의 상처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건강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 폭력의 인과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용서라는 행위가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열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느냐로 표현된다. 하지만 신애는 지금 말할 나위 없이 연약하다. 그런 연약한 몸으론 절대! 죄인을 용서할 수가 없다. 만약 진정 용서할 수 있다면, 굳이 교도소엘 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종찬은 마음으로 용서하면 된다 아임니꺼. 근데 교도소 면회까지 가가 용서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럴 필요까지 있나, 이거지예. , 신애씨가 성자도 아이고.....”라고 말했던 것이다.

맞다. 이게 핵심이다. 하지만 신애는 늘 핵심을 놓친다. 그녀가 교회 목사한테 털어놓는 생각은 이렇다.

 

제가 주님을 받아들이고부터 제가 너무 고마우신 주님께 난 무얼 해야 되나 늘 생각했었거든요.”

 

여기가 바로 함정이다. 그녀는 그를 진정 용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용서를 하나님께 보여 주고싶은 것이다. , 하나님께 뭔가 걸로 보답하기 위해서다. ? 그러면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내려주실 테니까.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랑, 신앙! 사랑하거나 불안하거나! 실로 연애의 이상열기와 닮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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