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저력과 대담함
▲ 셋째 날 경로: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세석에 도착하기 전에 어떤 봉우리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봤다. 이렇게 자세하게 그러면서도 자세히 본 적은 처음이다. 서서히 해가 산 사이로 사라진다. 산 주변엔 노을이 짙게 어리기 시작하여 무척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우린 넋을 놓고 바라보며 산에 오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 선명하게 보이던 해넘이의 광경. 장엄함의 극치다.
현세의 포기하지 않는 저력
현세는 그제 노고단에 오를 땐 아예 땅바닥에 누울 정도로 힘겨워했고, 어제 연하천에 도착할 땐 그나마 뒤처지진 않았지만 많이 힘들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함께 갔던 건호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도착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오늘 가는 길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현세가 뒤로 처져 현세와 함께 가게 되었다. 현세는 산을 거의 타본 적이 없는지 바위를 올라갈 땐 한 발 한 발 내딛기보다 무릎까지 사용하며 기어갔고, 내려갈 땐 미끄러질까 무서운지 미끄럼을 타듯 내려갔다. 그러니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힘들 수밖에 없어 금방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하지만 뒤로 처졌을 뿐, 걸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힘을 내어 앞으로 나가고, 갈 수 없노라 포기하진 않는다. 내가 자신이 오길 기다리며 조금이라도 보챈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알아서 갈 테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시라구요.”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좀 더 앞에서 걷지만 잘 오는지 지켜봐야 하는 것을. 아직도 현세는 등산화의 신발끈 묶는 법을 모르기에, 신발끈을 있는 힘껏 꽉 매어줬다. 신발이 발목을 잘 잡아줘야지만 걸을 때 힘이 덜 들어가기 때문이다. 현세와 함께 세석 대피소로 내려왔고 현세는 느릴지라도 자신의 발걸음으로, 자신의 배낭을 메고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다.
▲ 우린 '현세의 눈물'이라 이름 붙였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는 현세야말로 갑 중의 갑이다.
지민이의 대담함
지민이는 선비샘에서 본 이후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선비샘에서 자꾸 뒤처지는 주원이와 현세, 지민이를 먼저 보냈었다. 그러고 나서 민석, 승빈, 건호는 한참이나 있다가 출발한 것이다. 그렇게 여유롭게 출발했는데도 가다 보니, 어느 지점에선 현세와 주원이를 만나게 되더라. 그런데 아무리 가도 지민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늘은 힘이 부쩍 나나 보다. 얼마나 빨리 가면 이렇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가고 거의 대피소에 왔음에도 지민이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민이가 혼자 걸어가서 이미 도착했다고 하면 문제될 게 하나도 없지만, 만에 하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밤새도록 온 산을 뒤지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이 지민이는 길눈이 밝지 못하고 혼자 가는 것도 무서워하며 더욱이 이런 식의 산행이 처음이니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세와 대피소로 도착하면서 ‘제발, 제발 세석대피소에 있어라’란 말을 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그래서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건호에게 지민이의 상황을 물으니, “지민이는 제일 먼저 도착해서 계곡에 밥할 물을 뜨러 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일시에 온갖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지민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등산객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왔다고 이야기 하더라. 지민이가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서 대피소에 잘 찾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지민이가 강단 있게 행동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대처능력이 발휘된다는 것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번의 경험 한 번만으로 지민이가 부쩍 크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경험은 기억 속에 남아 지민이를 키우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 지민이는 남자들만 있는 종주팀에 홍일점이다. 대담하게 굳세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가고 있다.
세석에서의 저녁 만찬
저녁으론 카레를 먹었다. 해가 서서히 넘어가는 단계에선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는데, 어둠이 짙게 깔리니 그새 엄청 추워지더라. 그래서 조금이라도 벽으로 막혀진 곳에 있는 테이블로 이동해야 했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데 서서히 밥이 익어가기에 앞에서 잠시 얘기했던 건호 어머님이 해주신 울외장아찌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평소엔 거의 손을 대지 않는 반찬이다. 그런데 역시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나를 먹어봤더니, MSG와는 다른 자연의 맛에 흠뻑 반해서 밥도 없이 그것만 먹고 또 먹었다. 거기에 벽소령에서 샀던 알콜 없는 맥주까지 마시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더라.
근데 여기서 웃기는 광경은 이런 울외장아찌를 현세나 승빈이도 맛있게 떠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소엔 나처럼 거들떠도 보지 않을 텐데,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의 맥주는 탄산음료를 마시고 싶었던 어떤 한 학생의 테러로 반절 이상이 그 학생의 배 속으로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에피소드까지 더해지며 지리산 종주 3일째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8시에 소등하자마자 잠이 든 아이들. 오늘 하루도 애썼다. 푹 자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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