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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기 - 16. 새벽 천왕봉 등반기(13.11.15.금) 본문

연재/산에 오르다

지리산 종주기 - 16. 새벽 천왕봉 등반기(13.11.15.금)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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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새벽 천왕봉 등반기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2층 다락방에서 자니, 시끄럽거나 부스럭거리지 않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맘 놓고 푹 잘 수는 없었다. 새벽산행을 해야 하는데, ‘과연 눈이 얼마나 왔을지? 그럼에도 올라가도 되는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650분 정도에 일출이 시작된다고 하기에, 우린 430분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건호와 승빈이는 일어났는데, 민석이는 어제와는 달리 가기 싫다고 하더라.

모두 다 챙기고 밖에 나온 시각은 510분이었다. 눈은 그쳤지만,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건호는 아이젠이 없었고 승빈이는 장갑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물품을 챙겨올 수 있도록 들여보냈다. 몇 분 후에 건호가 나오더니, 민석이가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승빈이는 장갑을 구하러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고 하더라. 시간은 이미 530분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건호와 함께 먼저 올라가기로 했다.

 

 

건호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 사위는 어둡고 오로지 랜턴의 불빛과 서로를 믿는 마음으로만 가야 한다.  

 

 

 

새벽 산행의 운치

 

난 현세에게 빌린 헤드랜턴을 켜고, 건호는 손전등을 켜고 간다. 전등이 비추는 곳 외엔 암흑천지였고 눈까지 쌓여 길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배낭을 메고 오르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그냥 올라가면 1시간 정도 걸린다곤 하지만 눈이 온 후라 더 많이 걸릴 것을 감안해서 부리나케 올라갔다.

보통 땐 일출을 보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눈 때문인지 5명밖에 마주치지 못했다. 어제 오를 땐 선명하게 보이던 길이 지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번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길을 찾아가곤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에 가장 가까운 상황이겠지.

더욱이 건호는 아이젠도 없는데다 손으로 랜턴까지 들고 가야 하니 힘이 배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힘든 티를 내거나,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식으로 징징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 이야기 나누고 힘을 북돋우며 함께 올라가니 그 길이 외롭거나 무섭지 않았다.

 

 

천왕봉에 아무도 없다. 눈에 덮힌 천왕봉이란 글씨가 써져 있는 표지석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쉬지 않고 올랐나 보다. 여럿이 걸을 땐 뒤처진 사람을 신경 쓰며 걸어야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나 자신의 체력에 맞춰 걸어가기만 하면 되니 편하긴 했다. 하지만 앞서 가는 건호를 따라가야 했기에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일출 전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시간의 압박과 새벽 공기의 싸늘함과 눈길의 미끄러움까지 더해지니 지금껏 걸어온 코스 중 가장 힘들더라.

하지만 육체적인 힘듦은 있었다 해도, 그 산행이 최악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촉박하다 해도, 눈길이 미끄럽다 해도, 한치 앞도 안 보여 등산을 힘들게 한다 해도, 그건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시간에 쫓기고 미끄럽고 어두워 힘들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더욱 각별했다고 말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

 

530분에 출발하여 620분쯤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얼마만큼 빠르게 올라왔는지 알 수 있다.

역시나 천왕봉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보통 땐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천왕봉에 있으니, 칼바람이 우릴 향해 정면으로 불어온다. 여긴 바람을 막아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보니, 그 칼바람을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20분 정도 기다리니,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승빈이와 민석이였던 것이다. 사람이 그립던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가슴 벅차도록 반가움이 밀려왔다. 이럴 때 보면 두 녀석 다 참으로 기특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기에 안 해도 되는데, 힘든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올라왔기 때문이다.

 

 

민석이가 올라오자, 건호는 반가운 마음에 힘껏 안아줬고 승빈이까지 함께 사진 찍었다. 훈훈한 광경이다.

 

 

 

햇볕의 따사로움은 없었으나, 사람의 따뜻함이 있던 순간

 

7시부터 일출이 시작된다기에, 서로 부둥켜안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과연 해가 뜨면 안개가 일시에 걷히며 지리산 능선이 드러나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같은 게 일어날까?’라는 생각을 하며, 내심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주위가 환해졌지만,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변화무쌍한 천왕봉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쉬운 마음에 기다렸다. 그랬더니 서서히 안개가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안개가 해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여 붉은 안개로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는 볼 수 없었다.

 

 

▲  붉은 안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사람의 따스함은 보았다.

 

 

기다려 봐야 해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내려가기로 했다. 일출을 볼 수 없었다고 아이들은 볼멘소리를 시작했다. 자신들을 속였다면서, 올라오지 않은 아이들이 부럽다면서 투덜댄다. 그렇지만 그 소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건 원망조의 말이라기보다는 그냥 자기들끼리의 장난 같은 투덜거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우린 평상시와는 다른 마음의 크기를 키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순간을 함께 헤쳐 나가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우린 한 뼘 더 자랐다. 해는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새벽 산행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내려가는 길은 함께여서 더 행복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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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사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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