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③
그러나 고구려의 진출 방향은 남쪽의 낙랑이 아니라 북쪽의 랴오둥이다. 낙랑은 이미 한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므로 고구려에게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랴오둥은 신생국 고구려의 생존을 위해 일단 제압해 놓아야만 했다. 한편 랴오둥 태수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가 부여를 마음대로 정복한 행위는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그래서 28년에 태수는 고구려를 선공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미 고구려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는 중이었다. 결국 그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고, 고구려는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마저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그래도 그 경험은 북으로 향하는대무신왕의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차 고구려가 제국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세 불리기’다. 그렇다면 적절한 타깃은 남쪽에 있는 낙랑이 될 수밖에 없다. 북수남진(北守南進), 즉 북쪽을 수비하고 남쪽을 공략한다는 방침은 나중에 전성기 고구려의 기본적인 대외 노선이 되지만 원조는 바로 대무신왕 때 생겨난 것이다. 그에 따라 32년부터 대무신왕은 방향을 급선회하여 낙랑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 그 과정은 유명한 호동왕자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명고만 멀쩡했더라면! 아니, 낙랑공주가 호동의 꾐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명패는 유지했으나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 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 기병의 기동력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갑기병이 없었다면 남으로 낙랑을 압박하고 북으로 랴오둥을 공략하는 대무신왕의 뛰어난 기동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낙랑공주를 배신한 호동도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림에 보이는 무사 같은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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