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사시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2018년에 새로워진 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이색적인 책자들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공부할 때 같았으면 당연히 사서(四書)에 관련된 책자이거나 한문학사 관련된 책자이거나 학원가에서 나눠준 자료집 같은 것들을 주로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한문학사 관련된 책자들이 빠진 대신에 하나가 더 첨가됐다. 그게 바로 『이조시대 서사시』라는 책이다.
늘 끼고 다니던 그 책의 이유
아이들이 처음 보는 뭔가 두꺼운 책자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서 ‘뭔 책이 이렇게 두껍냐?’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막 임용공부를 시작하는 만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줄 알지 못했으며 아이들이 공부자료로 가지고 다니는 것들에 무관심했다는 말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정작 기출문제를 풀게 되면서 그 책을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임용시험의 체계가 바뀐 것은 2013년부터이지만 2014년 시험부터 매년 사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서사시들이 출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사시는 일반적인 율시(律詩)나 절구(絶句) 시와는 달리 길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 아무래도 산문으로 표현해야 할 얘기들을 시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압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장편으로 표현하게 되어 그런 걸 거다.
새로운 영역이 시험에 첨가되게 된 셈인데,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에겐 이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다. 기출문제를 공부하는 이유가 어떤 방식으로 출제되는 줄을 알아 대비하기 위함인데, 이처럼 예상에서 빗나간 영역들이 등장하면 낯설기에 정답에 근접조차 못한 채 시간만 빼앗길 소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연히 이런 영역을 소상히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서라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서사시 분야에 있어서는 임형택 교수가 연구를 진행했고 두 권의 책자로 그 결과물이 나와 있었다. 바로 이 책이 아이들이 스터디를 하며 두껍더라도 꼭 끼고 다니며 공부했던 그 책이다.
하지만 굳이 그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임용시험이란 게 모든 걸 공부해야만 하는 시험은 아니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관련된 문제가 한 문제씩 나온다고 해서 『설문해자(說文解字)』란 책을 제대로 읽어볼 필요는 없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설문해자(說文解字)』란 책을 제대로 읽는다고 해도 막상 응용되어 나오는 문제는 틀릴 수도 있을뿐더러, 그 시간에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아무 생각없이 이 책을 무작정 붙잡고 읽느라 정력 낭비를 할 거라는 걸 알았기에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 두껍고도 내용도 많은 이 책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다시 만나다
그런 생각으로 시간이 흘렀고 두 번이나 임용시험에서 떨어지는 아픔도 겪었다. 2020년엔 사상 초유의 코로나 19가 발생하며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이 부대끼며 한껏 어우러지던 일상의 순간들이 깨지고 말았다. 이 여파로 사람들이 한 강의실에 모여 앉아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부했던 스터디도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예년 같았으면 1월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을 스터디는 3월이 됐는데도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냥 이렇게 스터디가 멈춘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김형술 교수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지 ‘학교 강의실에 모일 수 없다면 카페에라도 모여서 스터디를 해야 한다’고 강행하기에 이르렀고 그 덕에 5월부터 스터디는 시작되었다. 나야 좀이 쑤시는 상황이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었고 언제나 이런 식의 공부모임에는 환영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뜻밖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건 바로 이번 스터디는 『이조시대 서사시』라는 책의 목차표에 나오는 작품들을 앞에서부터 보자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2018년에 잠깐 만났다가 영영 서연(書緣)이 없을 것만 같던 책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당연히 임용시험에 합격했다면 이 책은, 영영 보지 않을 것이지만 기구한 운명 탓에, 불운한 인생 탓에 2년이나 흐른 지금 만나게 된 것이다. 이래서 책과의 인연도 참 신비하단 생각이 든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변했다. 공부방법도 몰랐지만 이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줄 알게 되었으며 2년이란 시간 동안 공부 자료들을 시나브로 쌓아가며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공부 자료는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노하우가 생겼다. 바로 이런 노하우들을 그대로 접목하여 이 책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리할 때 책상의 모습. 밑에 XBOX패드와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스팀 화면 인상적이다^^;;
2. 무모한 용기 덕에
그런 생각으로 이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 처음에 시작할 땐 감조차 잡히지 않기 때문에 무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상 조금 정리하다 보니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무모한 용기
첫째, 실려 있는 서사시의 양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다종다양한 내용의 서사시들을 골랐고 그것을 원문과 해석, 그리고 주까지도 충실하게 붙였다. 그뿐인가, 그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 있으니 한 편의 서사시를 제대로 이해하기에 이만한 책은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책값 이상의 값어치를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정리하려니 처음엔 의욕적으로 달려 들었지만 곧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해설이 짧은 글들도 있지만 아예 논문 같은 양을 자랑하는 글도 있다는 사실이다. 일일이 타이핑을 쳐야 하는데 한 쪽 정도에 있는 해설이라면 타이핑을 치며 정리할 만했지만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글들은 타이핑을 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셋째, 고전번역원에 조차 원문이 실려 있지 않은 글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한문공부 할 때 원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 어마무시한 차이가 있다. 원문이 있으면 그만큼 나의 식대로 편집하며 공부를 정리하기도 쉽지만 아예 없는 경우엔 정리할 만한 꺼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원문을 타이핑하고 있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진도 빠지고 그닥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2020년 당시엔 스터디 계획에 잡힌 글 위주로 공부하며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 무더위가 내린 전주. 저 멀리 보이는 모악산도 더워 보인다.
찝찝함을 없애려
그런 실패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올핸 서사한시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올핸 시간이 꽤 남는 만큼 그간 정리하고 싶었던 책들을 정리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덕에 상반기엔 역사서와 전공서, 인문학서를 넘나들며 다양한 책을 정리하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책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처음이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며 어느 정도 품이 들어가는지 몰라 초반엔 헤매긴 했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며 감을 잡았고 노하우도 생겨 생각보다 훨씬 빨리 책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번 해보고 싶던 책 정리를 마치고 나니 나름 성취감도 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더라. 그때쯤 『이조시대 서사시』라는 책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지금쯤이면 한 번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마치 큰 일을 보고 닦지 않은 찝찝함이 내심 있었기 때문에 시원하게 털고 가자고 용기를 냈다. 그래서 8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올해 여름은 비도 오지 않고 연일 습도도 높고 열대야까지 기승을 부르는 통에 작업을 하다 보면 땀이 한가득 났지만 오히려 ‘이게 진정한 여름이지’라는 생각으로 선풍기 바람 쐬가며 작업을 계속 해나갔다. 5일 만에 1권을 마무리지었고, 8일 만에 2권을 마무리지었다. 13일 만에 1, 2권의 책을 나만의 방식으로 한 번 정리할 수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 7~8월이면 덕진공원엔 연꽃이 핀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이조시대 서사시』는 2021년 8월의 무더위를 함께 보낸 책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더웠던 만큼 치열했던 책이고, 「방주가」를 마지막으로 이 책을 끝냈을 때 홀가분한 기분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다. 이로써 하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뭐든 시작하고 조금씩 하다 보면 끝나는 순간도 분명히 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막막할지라도, 될까 걱정될지라도 어쨌든 시작은 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실패할지라도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데 반해 막상 시작해보면 새로운 인연의 장으로 내 자신이 휩쓸리기 때문이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무모하게 해나갔던 사람들, 그들 덕에 우린 오늘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이로써 상반기엔 정리하고 싶었던 책들도 맘껏 정리하고,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이 책도 마무리지었다. 어느 시간보다도 알차게 보낸 2021년 상반기였다고 감히 자평하겠다. 이 흐름을 이어 올해 남은 시간도 맘껏 누벼보길 기대해본다.

▲ 8월 중순까지도 내리지 않는 비가 하순엔 계속 내리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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