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감시했을 뿐인데 마음에 동요가 생기다
게슈타포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인간을 파괴했습니다. 게슈타포의 선발 기준은 누가 가장 먼저 노년 여성의 얼굴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주먹으로 칠 수 있는가 였는지요. 하지만 동독의 국가보안부는 달랐어요. 심리학적으로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을 선별해서 뽑았죠. 사람들의 내면을 부서뜨릴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요. 국가보안부는 내면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슈타포는 몸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죠. 국가보안부에게 감시를 당한 사람들은 사실 희생양으로 인정받기도 힘듭니다. 화려한 상처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이 내적인 상처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어요. 겉으로 안 보이는 상처들이 얼마나 정교한 계략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었는지 말이죠.
-플로리아 헨켈 폰 도너스 마르크(영화 『타인의 삶』 감독)
드라이만 부부를 향한 국가보안부의 감시체계는 물샐틈없다.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국가보안부의 만행을 본의 아니게 지켜본 이웃, 마이네케 부인이 있었다. 비즐러는 마이네케 부인이 드라이만 부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효과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차단한다. “마이네케 부인, 입이라도 벙긋하면 평생 가족을 못 보게 될 겁니다.”
겁에 질린 마이네케 부인은 의대에 다니고 있는 딸이 혹여 위험에 처할까봐 어떤 양심의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된다. 마이네케 부인은 변함없이 자신에게 친절과 우정을 베푸는 드라이만의 따스한 태도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공식 파파라치가 되어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안의 가장 소중한 본능, 예를 들어 이웃의 친절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도륙당한다. 마이네케 부인은 드라이만에게 차마 비즐러의 도청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녀의 표정은 스스로를 향한 치욕으로 일그러진다.
결국 국가보안부의 정교한 감시망은 드라이만 부부의 치명적인 사생활의 영역까지 기어이 침투하고 만다. 남편 드라이만도 전혀 모르는 아내 크리스타의 비밀. 크리스타는 이 모든 작전의 배후 조종자라고 할 수 있는 문화부장관 브루노 헴프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헴프 장관의 말 한 마디면 ‘배우’로서의 삶을 순식간에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잉꼬커플이었던 드라이만 부부에게는 이렇게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왔고, 이 우울한 비밀을 가장 먼저 탐지해낸 것은 바로 비즐러였다.
비즐러는 자신이 동경해마지않는 아름다운 여배우 크리스타가 결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내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감시자 비즐러’에게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의 충격은 그의 ‘임무’ 리스트에 속해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충실히 감시하고, 분석하고, 보고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자율적인 감성의 회로를 작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고통이 마치 자신의 굴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래된 양철로봇처럼 무표정하기만 하던 비즐러의 얼굴에 짙은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지금껏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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