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②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중서가 필연성의 철학을 주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충(王充, 27~100)【왕충은 중국 후한 시대에 활동했던 탁월한 자연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나 귀신설 같은 일체의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사유를 공격했다. 그가 모든 종교적인 사유를 공격할 때 취한 이론적 무기가 바로 우발성이란 관념이었다. 우발성이란 관념의 파괴력을 은폐하기 위해 주류 중국철학 전통은 아직도 그를 숙명론자라고 비난하면서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사상은 『논형』이란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이라는 자연주의자가 또다시 중국에 태어납니다. 헤겔이 등장하자 맑스가 등장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말이죠.
어떤 사람의 품성은 어질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화와 복을 만나는 것은 우발적인 문제일 뿐이다. 일을 시행할 때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과 벌을 만나는 것은 우발적인 문제일 뿐이다. 같은 시간에 적병을 만났을 때 숨어 있던 자는 칼에 맞지 않을 수 있고, 같은 날 서리를 맞았을 때 몸을 가린 자는 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칼에 맞거나 상해를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고, 숨어 있거나 몸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숨어 있거나 몸을 가리고 있던 경우나, 칼에 맞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도 모두 우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께 군주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함께 이득을 얻으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신용을 얻고 어떤 사람은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을 받고 신용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참되다고 할 수 없고, 벌을 받고 의심을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거짓되다고 할 수도 없다. 상을 받고 신용을 얻은 경우나, 벌을 받고 의심을 받은 경우 모두 우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논형(論衡)』 「행우(幸偶)」
어떤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해봅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은 남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평상시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결국 천벌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유족들마저도 벼락에 맞아 죽은 그 남자를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충은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과 그 사람에게 화나 복이 이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에게 복이 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선한 사람에게 화가 닥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왕충은 우발성을 인간 사회의 내부,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면, 신하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이 내려져야겠지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충성을 다한 사람이 항상 그런 대우를 받았었나요? 오히려 충성스런 신하가 어리석거나 잔인한 군주를 만나서 죽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신하가 군주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자신과 관련된 일, 즉 군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덕목과 용기를 키우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줄 군주를 만났느냐, 혹은 만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역량 밖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런 느낌은 바로 우발성의 진리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충성스런 신하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즉 세계에는 만남과 마주침이 편재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진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는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기우제를 지낼 수도 있고, 지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기우제를 지냈을 때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는 인간의 행동과 비를 내리는 자연의 작용이 서로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즉 그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왕충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우발성의 진리를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동양철학 전통에서 필연성의 허구를 폭로하고 우발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들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