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프롤로그
인연
나는 충남 천안시 대흥동 23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상경하여 보성중ㆍ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병이 깊어져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을 했습니다.
낙향한 후로도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그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천안의 고교생들을 상대로 영어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나는 그때 신약성경(RSV영어성경판) 전체를 류형기 주석서와 함께 다 읽었고, 예수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목회자로 이끌고 계시다, 그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길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자신의 신앙과 판단에 따라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정말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우리 교계의 전설적인 학자들과 인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1년 후에 나는 신학대학을 떠났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독자적 결단에 따라 신학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과, 또 신학대학을 떠났다는 것, 이 두 결단이 오늘 사상가인 나를 만든 가장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다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다시 편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미 삶의 깊은 고뇌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적으로 선택한 철학의 길이었기 때문에,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 철학과 학생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나의 주체적 삶의 체험 속에서 철학적 진리를 용해(鎔解)시키려고 맹렬하게 노력했습니다. 신학에서 철학으로 제가 문학(問學, 묻고 배우다)의 길을 바꾼 이유는 실로 매우 단순했습니다. 신학은 전제가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무전제의 학문이었습니다.
철학과 3학년 때의 일이었죠. 불교학개론은 이미 저학년 때 들었고, 3학년 때 노장철학과 대승불학을 들었습니다. 점점 불교학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져감에 따라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실제로 스님이 되어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한 학기를 휴학하고서라도 절깐에 가서 스님체험을 하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해인사로 출가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고풍스러운 절들이 엉성하게 방치되어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나는 고향 광덕면에 있는 광덕사라는 아름다운 절을 생각해냈습니다. 마곡사의 말사인 광덕사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고찰(진덕여왕 6년)인데, 조선왕조에 들어서서 세조가 이곳에 거동하여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 아담한 규모의 강천사. 심플 이즈 원더풀(Simple is wonderful)
광덕사로 가는 길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주지 스님도 안 계셨고 거의 폐찰에 가까울 정도로 쇠락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광덕사 주변이야말로 천안호도과자가 유명하게 된 그 호도의 원산지입니다. 호두나무가 꽉 들어차있는데, 호두나무잎에서는 매우 싱그러운 향내가 납니다. 그 냄새는 정말 좋아요.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냄새를 모기가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두나무숲에는 모기가 없는 편입니다. 정말로 광덕사에는 모기가 적었습니다.
풍세면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부터는 풍세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천변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풍요로운 농촌의 광경이 있고 그 사이로 풍성한 수량의 풍세냇갈이 흐르고 있습니다. 천안 부근에는 물이 박합니다. 오직 광덕면에만 수량이 풍부한 깨끗한 냇갈이 흐르죠.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보산원국민학교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아주 낭만적인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 유일하게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방앗간이 있었죠. 수량이 많아 힘차게 큰 바퀴가 돌아가고 있었고, 방앗간에는 끊임없이 공이가 오르내리며 곡식을 찧고 있었죠. 자연의 힘을 이용한, 그러면서 자연과 융화된 이런 문명의 예지는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죠.
나는 광덕사에서 내 멋대로 머리를 깎고, 스님옷을 입고, 스님생활을 시작했어요. 낭만적인 시절이었죠. 철학서적을 독파하며 틈틈이 좌선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오가는 스님들과 재미있는 대화도 많이 나누었지요. 모든 것이 개방적이고 호의적인 시절이었죠.
최초의 해후: 『반야심경』 밑씻개
어느 날 똥을 누느라고 변소깐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였죠. 그때는 변소깐도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것이고 퇴비 만든다고 아래가 다 터져 있었죠. 변을 보느라고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이상한 문자들이 내 눈에 띄었어요. 밑씻개로 신문쪽지나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반야심경』이 쓰여진 종이쪽지였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반야심경』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것을 스님들이 염불로서 암송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것이 진언(眞言, Mantra)이나 주구(呪句)와 같은 기호의 나열이지 그 자체로 의미를 전달하는 평범한 문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자아~ 이게 웬일일까요? 한 글자 두 글자, 센텐스 바이 센텐스, 주어, 동사, 부사, 형용사 따위를 맞추어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보는 순간, 아니! 막연하지만 그 의미가 통달케 되면서 펼쳐지는 광막한 사유의 세계, 전 우주가 나의 의식권 내에서 기발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나는 정말 무지막지한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불교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지만, 한학의 소양이 있었던 나는 억지로라도 그 의미를 조합하고 추측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그 의미가 짚어지는 순간, 나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나의 정신세계에 던져진 미증유(未曾有)의 파문이었습니다.
첫 만남의 충격적 인상: 이것은 반불교다!
여러분들께 나의 모호한 감성에서 부각되는 전혀 새로운 논리를 이 프롤로그에서 전달한다는 것에 관해 뭔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 드는군요.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쉽게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많은 내용을 전달하지 말고 간결하게 나의 견해를 밝히자! 이런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반야심경』 260자를 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간결한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반야심경』을 만나게 된 최초의 계기를 말씀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저의 『반야심경』에 대한 최초의 느낌은 50년간 저를 지배한 학문적 탐구보다 더 원초적이고 강렬한 것이었어요. 나는 당시 무식하고 막연했지만, 그러기에 더 신선하고 충격적인 메시지를 절박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반불교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논리를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전혀 새로운 논리다! 불교를 불교다웁게 만드는 모든 그룬트(Grund, 땅바닥, 근거, 기초)를 파멸시키는 다이나마이트다! 아니! 불교라는 종교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교냐? 종교가 반종교의 논리를 자기의 최상의 언설로서 모시고 있다니!
나는 그날로 그 밑씻개 『심경』쪽지를 밥풀을 가져다가 변소깐 앞쪽에다 붙여놓고 매일 궁둥이를 까고 앉아 그 『심경』을 연구하는 데 골몰했습니다. 나는 거의 3개월을 이렇게 『심경』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것이 갓 스물 어린 나에게 던져진 최초의 공안이었고 화두였고 고칙(古則)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변소깐 용맹정진’이었죠.
별당 용맹정진
대웅전 뒤로 산허리에 높게 자리잡은, 웅장한 세 부처님을 모셔놓은 별당이 있었는데(그 전각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실상 당시에 별당은 대웅전보다도 더 고취가 풍기고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별당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별당이야말로 나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죠. 매일 청소를 하고, 하루종일 시간이 나는 대로 앉아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쌍가부좌를 틀다가, 반가부좌를 번갈아 틀다가, 일어나서 걷다가 하면서 하루종일 좌선을 했지요. 스님들에게 좌선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좌선의 당면한 목적은 일단 사유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콧구멍에 장미꽃잎을 대어도 그것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셔라! 그리고 숨쉬는 것을 카운트해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게 숨 쉬는데 모든 정신을 집중하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군요. 정말 사유가 안 돼요. 느리게 숨 쉬는 것에 의식을 집중하면 생각이 안 돌아가요. 아니 정말 생각이 사라져요. 그리고 모든 신체적 기능이 다운되는 것 같아요. 하여튼 초보자에게 제일 좋은 것은 숨을 느리게 카운트하는 것이었습니다.
‘변소깐 용맹정진’은 완벽한 혜(慧)의 세계였고, ‘별당 용맹정진’은 완벽한 정(定)의 세계였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았는데 나의 광덕사 스님생활은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적막한 대자연 호두나무향기 속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소쩍새 울음의 신비
이렇게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나는 잊지 못할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별당에 촛불을 켜놓고 앉아(당시 물론 전기가 그곳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좌선을 했습니다. 한밤중에 홀로 거대한 세 부처님 좌상 앞에서 좌선을 하는 영광이랄까 유아독존이랄까요? 일종의 포만감, 고독감, 정결한 느낌, 뭐 그런 것들이 어린 나를 휘감았습니다. 정말 열락(悅樂)이 따로 없었어요.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제가 쌍가부좌를 틀고 오지게 정진을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쌍가부좌를 튼 몸이 쌍가부좌를 튼 채로 부응 뜨는 것이었습니다. 서서히 공중으로 부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올라가더니 가운데 부처님 얼굴 앞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살아 움직이더라구요. 그리고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 대화의 내용을 지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UFO 비행접시가 내려앉듯 서서히 땅바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하체가 완전히 마비되는 데서 오는 환각이라고도 생각했지만 본인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임이 분명했습니다. 부처님과 댓거리를 했으니까요.
그리고 법당을 나섰습니다. 그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바람소리 하나, 호두 이파리 하나, 구름에 가린 달의 모습, 검푸른 계곡에 서린 곡신(谷神),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도 정갈했습니다. 그때 저편 산 속에서 소쩍새가 울더군요. 그런데 그 소쩍새의 울음이 완전히 내 가슴속에서 울려퍼지는 거예요. 내 마음과 경(境)이 하나가 된 그런 신비로운 느낌을 느껴 보았습니다. 소쩍새가 내 가슴속에서 운다! 아주 진부한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절대적인 다스 하일리게(das Heilige, 성聖),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매우 깊은 잠을 잤습니다.
새색시의 인가
그 다음날 아침, 나는 바지는 중옷을 입고, 윗도리는 흰 난닝구 하나 걸친 채로 별당과의 반대편으로 나있는 계곡(안산으로 올라가는 계곡)을 올라갔습니다. 그 계곡에는 당시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계곡 아래쪽에 서너 채가 있었고 꼭대기에 또 서너 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한 채의 매우 정감이 서린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집이었죠. 남서향에 툇마루가 반듯하고 불 때는 부엌이 옆으로 있는 전형적인 초가집이었어요. 저는 그곳 툇마루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부엌에서 아주 인상이 밝고 젊은 새색시 같은 여인이 나오는 거였어요. 아마도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집 며느리 같았어요. 그런데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원 세상에, 어떻게 스님이 이렇게도 잘도 생기셨을까? 전 스님처럼 잘생긴 사람 처음 봐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상적인 관념 속에서 젊은 여인이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예지요. 여기 ‘잘생겼다’하는 것은 나의 골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어요. 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많은 느낌에 압도적인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죠.
그 여인은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방금 찐 감자 서너 개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 보고 드셔보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것을 손수건에 싸고 툇마루에서 일어섰습니다.
“가봐야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큰 스님 되실 거예요.”
나는 그 순간 더 이상 ‘성철 스님의 인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아낙에게 지고의 오도경지를 인가 받았노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생각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엄마의 공안
나는 그 길로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스님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나는 승복을 입고 옛 스님들이 쓰던 큰 삿갓을 눌러 쓰고 광덕사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풍세천을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에게 다 공손하게 절을 하는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들까지! 이때 나는 우리나라에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선문명의 여파를 절실하게 느껴보았습니다. 풍세에서 천안까지 시외뻐스를 탔고, 천안에서 서울까지 그때 갓 개통이 된 한진고속뻐스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신촌, 어머니가 계신 집까지 승복을 입은 채 달려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을 기독교에 헌신한,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아니 심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이 태산 같기도 했습니다. 신촌집 철대문 앞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철컥 문이 열렸습니다. 나는 들어섰습니다. 그곳에는 화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화단에서 손질을 하시던 엄마가 그 계단 위에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불시에 나타난, 승려가 다 된 듯이 보이는 아들의 모습! 얼마나 놀라셨을까?
엄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용옥아! 왔구나!” 그 말씀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눈에는 아들 용옥이만 보였지, 승복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 종교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의 대오(大悟)였지요. 제도화된 종교의 규범은 인간에게 덮어씌워진 겉껍데기라는 것! 껍데기는 가라! 나는 그 체험을 통하여 목사의 옷도 벗었고 승려의 옷도 벗었습니다. 그리고 무전제의 철학의 길만을 고집하며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2019년 봉은사 법왕루 '반야심경의 시각에서 본 우리민족의 미래전략' 강연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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