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성장통③
다행히 여왕을 옹립한 모험은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최초의 여왕답지 않게(?) 선덕여왕은 처음 맡은 나랏일을 능숙히 처리했던 것이다. 일단 여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백성들에게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도 거뜬히 받아냈다. 게다가 백제와 고구려가 침략해 왔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해서 군사적 능력도 뒤지지 않음을 과시했다. 말년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라는 자가 여성 군주를 탓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옥에 티를 남겼으나 그 정도쯤은 탓할 일이 못 된다.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기였던 15년간 그녀가 무사히 나라를 다스리고 나서 또 다시 후계 논란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인 데다 출가했던 몸이었으니 여왕에겐 당연히 후사가 없었다. 덕만을 왕으로 추대할 때 신라의 귀족들이 이런 사태가 올 줄 예상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무왕(武王)이나 김용춘처럼 왕위를 주장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무왕은 641년에 죽었고 김용춘은 기록은 없으나 아들의 나이로 미루어 아마 그 무렵이면 사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그래서 귀족들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의 딸 승만을 다시 여왕으로 모시는데, 그녀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다.
진덕여왕 역시 사촌언니처럼 7년간 나라를 무리없이 잘 이끈다. 그녀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아마 있었다고 해도 왕위계승과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두 명의 여왕이 다스린 20여 년 동안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누가 보기에도 격변기의 신라를 맡길 만한 최적임자가 등장했다. 두 여왕의 시대를 평온히 넘길 수 있게 만든 인물, 아니 그보다 두 여왕의 시대에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주도한 인물, 그는 바로 김춘추였다.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들은 일단 형식적으로 김알천金閼川)이라는 원로에게 왕위를 맡기려 했으나 분위기를 파악한 김알천은 김춘추를 ‘세상을 구한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왕위를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 ~ 661)으로 즉위했다.
어찌 보면 두 여왕의 치세는 김춘추가 마음껏 활약하도록 해주기 위한 무대와 같았다. 사실 당시 신라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며 고육지책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도기가 없었더라면 국제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아 신라의 왕권 다툼이 대단히 치열해졌을 것이며, 김춘추라는 인물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크게 좁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신라의 성장통이 짧게 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두 여왕이 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한 덕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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