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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사육신의 허와 실②: 세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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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사육신의 허와 실②: 세조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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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허와 실

 

 

실권을 손에 쥔 수양대군의 다음 조치는 누가 봐도 편파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고 단호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현장에서 제거했으나 동생마저 그렇게 다루면 남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그는 안평대군에게 각종 죄목을 붙여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당시의 유배 조치란 곧 분위기를 봐서 죽이겠다는 뜻, 과연 안평은 얼마 못 가서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사약을 받은 안평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죄목까지는 각오했지만, 그가 숙모를 비롯하여 여염집 여자들과 간통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대목에서는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안평의 삼촌, 즉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은 열네 살 때 홍역으로 죽었는데, 수양의 고발에 따르면 안평은 과부가 된 성녕의 아내와 놀아났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안평의 분방한 기질과 아직 유교 도덕이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뿌리내리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 다음에 진행된 논공행상은 조정을 모조리 수양의 인맥으로 채우는 절차에 불과하다. 수양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43명이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고(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반란 진압 공신이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인지, 한명회, 권남, 신숙주, 정창손(鄭昌孫, 1402 ~ 87), 윤사로(尹師路, 1423 ~ 63) 등이 정부의 핵심 요직에 포진했다. 수양과 안평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이때부터다.

 

실권자의 지위에 만족했던 동생과는 달리 수양의 목표는 왕위에 있었다. 안평에게 왕위를 노렸다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과는 명백히 모순되는 의도였지만 원래 진리나 모순이라는 것은 힘있는 자가 규정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일단 수양은 최고 정승인 영의정이 되었으나(왕실 종친이 정승을 맡은 경우는 그가 유일무이하다) 그가 국왕을 보필하는 정승 본연의 위치에 만족하리라고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믿지 않았다. 기다리던 그에게 드디어 때가 왔다. 안평대군의 사후 안평의 역할을 대신하려 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수양 세력의 덫에 걸려 좌초하고 만 것이 수양에게는 좋은 계기가 된다앞서 말했듯이 세종의 아들은 무려 열여덟 명이었으니 그 중에 수양의 처사에 반대하는 형제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비록 수양은 살아남은 형제들 중 맏이였으나 평소에도 안평을 따르는 동생들이 많았으므로 동생들의 지지는 별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형제들 중 수양을 따르는 소수와 반대하는 다수 간에 알력이 빚어지고 각종 음모가 전개된다. 특히 금성대군과 세종의 넷째 아내인 혜빈 양씨가 반대파를 이끌었는데, 암암리에 군사력을 준비하던 그들이 14556월 발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 왕자의 난과는 달리 이 시기에는 친형제와 이복형제의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금성대군은 수양과 친형제였지만 오히려 반대파였고 당시 수양의 편에 선 계양군(桂陽君)은 수양의 배다른 형제였다. 아버지가 왕이면 어머니는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것, 이는 이미 조선 왕실의 혈통이 국왕 중심으로 확고히 안정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기에 들어 사대부(士大夫) 세력이 왕을 발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은 이런 변화 덕분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으로 있던 삼촌이 유배되자 어린 단종도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결국 14556월 국왕이 영의정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수양은 꿈에도 그리던 왕위를 차지하여 조선의 7대 왕인 세조(世祖, 1417 ~ 68, 재위 1455 ~ 68)가 된다(단종은 일단 상왕上王이 되었지만 사실상 폐위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 경복궁에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수정전(修政殿)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지은 건물인데, 과거에는 이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 세종 때 학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책을 짓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머리가 큰학자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왕권에 도전했는데, 그 지도부가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다.

 

 

인용

목차

연표

단종의 발자취

사육신 퀴즈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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