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진짜 중과 가짜 중
요즈음 가깝게 지내는 도반(道伴, 길을 같이 가는 사람)으로서 명진(明盡)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진짜 중’ 이지요. 스님에 대해 진짜다. 가짜다 이런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고, 또 그런 분별심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진짜다’ ‘가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식적 기준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하도 가짜 중, 가짜 목사, 가짜 무당, 가짜 교주들이 많기 때문에 내가 어렵게 얘기를 하지 않아도 ‘가짜’가 무엇인지는 일반대중이 더 먼저 정확히 알아요.
나는 결코 스님의 정신적 경지의 고하(高下)를 가지고 가짜다 진짜다라는 말을 쓰지는 않아요. 그것은 스님의 내면에 관한 것이고 결코 타인이 함부로 평점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명진을 ‘진짜 중’이라고 말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한국불교, 특히 조선왕조시대의 불교는 너무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고려제국시대의 막강한 불교의 모습에 비해, 매우 빈약했고 빈곤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순수했고 순결했습니다. 수도자들의 생활자세(계율관)나 깨달음의 경지가 매우 깊이가 있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스님이 가사(袈裟)를 입고 마음대로 사대문 안을 활보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죠. 도첩제도(度牒制度,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서 백성이 출가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려는 사람에게 일정한 보상을 받고 허가증인 도첩을 발급하던 제도)로 인해 승려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국난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구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독자 여러분은 물론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물론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상은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눈부신 기적적 대첩으로 기록될 만한 위대한 것입니다. 비슷한 시대의 엘리자베스여왕 때 영국의 제독들이 스페인의 막강한 무적함대를 무너뜨린 것보다도 더 극적이고 통쾌한 전승이었습니다(‘무적함대Grande y Felicisima Armada’라 해봤자 130개의 배로 구성된 것이었고, 스페인측의 총 전사자는 2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 의 활약상은 어디까지나 바다 위에서 펼쳐진 것이죠. 물론 이순신의 제해권(制海權)은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의 보급을 차단시키는 효과가 컸기 때문에 해전의 승리는 육지의 싸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실 이순신 장군과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 명장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서산대사라는 분이지요.
이순신의 승전기록은 이순신 본인의 일기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에 의하여 보존되어 있지만, 서산대사와 승군(僧軍)의 활약상은 우리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를 않습니다. 육지에서 우리 군대가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승군의 활약으로 왜군이 여지없이 제압된 이야기들은 충분히 밝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자들은 다 유생들이었습니다. 유생들은 실제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파의 파벌의식에만 얽매여 국가의 대의를 돌보지 않고 자파의 정치적 이익의 옹호에 골몰했습니다. 자파의 우월을 과시할 수 있는 의병조차 조직할 능력이 전무했습니다. 의병은 당파와 무관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기실 선조 시대의 조선왕국에는 정규적 ‘군대’라 할 만한 프로페셔널한 조직이 없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소위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라는 막연한 논리에 의해 군역이 충당되었습니다. 그러니 농사짓는 장정들을 속성으로 훈련시켜 군복을 입혀놓은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할 만한 대오를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프로페셔널한 전투 경험을 지닌, 센코쿠지다이(戰國時代)를 거친 일본의 사무라이 집단과는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단기간 내에 막강한 전투 조직을 쌩으로 창조해낸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명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외롭게 그의 지도력과 민중의 지원에 의하여 함대와 해군의 놀라운 위용을 갖추어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산한 분위기에도 예외적인 사례가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를 통하여 내내 핍박과 멸시를 받아오던 스님들의 조직이 엄존하고 있었던 것이죠.
임진왜란: 멸사봉공의 자비
스님들은 출가자이기 때문에 우선 가족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산사에서 살면서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무술과 날랜 체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좌선과 무술은 같은 정신수양방법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조직력이 있었고, 상하명령계통이 매우 질서있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禪)의 수행은 영활(靈闊)한 정신력을 길러줍니다.
스님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이겠으나, 기실 대규모 살생을 목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왜군을 죽이는 것은 살생이라는 개념에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선종의 교리로 본다면 죽이는 자나 죽임을 당하는 자나 모두 공(空)일 뿐, 오직 더 큰 살생을 막는 헌신이 있을 뿐이죠. 스님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시주(施主)에 의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민중이 살해당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민중을 보호하고 구해야 하는 업무입니다. 시주(施主)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스님들의 자비행(慈悲行)인 것입니다. 왜군을 쳐부수는 것이야말로 스님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비였습니다.
영규대사: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
최초의 승군은 무술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충남 공주사람 영규(靈圭) 대사였습니다.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했고, 휴정(休靜, 서산대사) 문하에서 법을 깨우친 큰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3일을 통곡하고 승병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승병장이 됩니다. 승군 8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로 진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1592. 음8.1)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을 기록합니다.
조선에서 가장 강한 장군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 대장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끝까지 사력을 다해 분투하다가 자살하고만(1592. 음4.28)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민중들에게, 영규대사의 청주탈환이야기는 환호작약할 수밖에 없는 희소식이었습니다.
이 청주대첩을 보고하는 실록의 기사를 보면, 승군의 디시플린(discipline, 기강)이 당대의 군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지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규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광풍이 이는 듯하며 그의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고, 질타ㆍ격려하는 소리에 1천여 명의 중들이 돌진, 여타 군대 또한 이들을 믿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호령이 엄하였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다. 청주의 왜적은 승병이 아니었으면 물리칠 수 없었다” 운운.
비겁한 유생들의 작태
이토록 찬란한 전과를 기록한 승군과 영규대사의 활약상을 보고하면서도 유생들은 이들에게 상이나 주고 빨리 환속(還俗)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시 말해서 승군의 조직력이 두려운 것이죠. 그러한 조직을 격려하고 합심하여 국난을 국복해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기에 승군이 어떤 정치세력을 형성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죠.
청주성의 회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체 전세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결정적 호운의 기세였습니다. 왜군들은 청주에서 서남으로 곧바로 내려가 호남곡창지대를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승군이 청주를 탈환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순신(李舜臣)의 해군도 호남의 지지기반을 상실함으로써 무기력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후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과 합세하여 충청도 지역방위의 핵심적 길목인 금산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조헌이 영규 스님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손실을 초래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조헌은 율곡의 제자로서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만 전체적 형세파악보다는 명분을 앞세우는 맹목적 돌진형의 전투를 했습니다.
영규 스님은 그러한 무리한 공격보다는 현명한 전략에 따라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순차적인 공격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 있어서조차 리더십은 스님에게 있지 않고 유생들에게 있었습니다. 조헌이 무리한 돌진을 감행하자 영규 스님은 그것이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돌진하여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장렬하게 산화하고 맙니다(1592. 음8.18).
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
영규 스님이 거느린 승병 800여 명이 금산전투에서 거의 전원 용감하게 전사함으로써 끝내 금산을 탈환하고야 만 처절한 상황을 보고받은 선조는 승군이야말로 국가수호의 효율적인 방편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선조(宣祖)는 평양성까지 내버리고 북쪽 국경지대인 의주로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국 스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묘향산의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묘향산의 별명이 서산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에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휴정이 그의 법명이다.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완산 최씨)를 의주로 부릅니다. 휴정은 이미 그때 나이가 73세였습니다.
선조와 서산대사는 그 전에 안면이 있었습니다. 서산대사는 3년 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혀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전주 사람인데, 선조 2년(1570) 식년 문과 을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이율곡, 성혼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은 매우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정여립은 서인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무슨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서인들에게 등을 돌리고 동인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서인들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그래서 낙향하여 살게 되는데 그 주변으로 많은 지사들이 운집(雲集)하게 됩니다. 하여튼 진안 죽도라는 곳에서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면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예를 연마하곤 했습니다. 정여립은 직설적이고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선조에게 깊은 미움을 산 것 같습니다.
선조의 애ㆍ증 콤플렉스
정여립(鄭汝立)이 과연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혁명의 모의를 했을까? 그 진정한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그 왕조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1천여 명의 쟁쟁한 인물들이 도륙 당했습니다. 진실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비극이 없었습니다. 동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날벼락이었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시인 정철(鄭澈)이 이 기축옥사를 주도했는데 너무도 가혹하게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난리통에 어느 스님이 서산대사 또한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대사가 쓴 구절 하나를 증거로 제출하면서 무고를 합니다. 요즈음과 비슷하지요. 어디엔가 쓴 글귀 하나를 트집잡아 ‘빨갱이’라고 때려잡는 식이죠. 그런데 기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선조(宣祖)가 대사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서산대사를 즉시 석방하고 어전으로 모셔다가 극진한 예우를 합니다. 하여튼 선조는 오묘한 인물이죠. 이순신(李舜臣)도 이름 없던 인물인데 선조가 발탁하여 급승진하게 하여 임란 직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이르게 했죠. 선조가 아니었으면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세워놓은 인물이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위대한 공을 세우자, 그를 미워하고 의심하고 모함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선조의 애증 콤플렉스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병리적 수준이라 아니 말할 수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이순신을 국민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하기 때문이죠. 국민의 마음이 왕인 자기에게보다 이순신에게 쏠리는 것을 못 참아 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죠. 가슴이 좁은 거예요. 왕이라는 절대권력자의 입장에서 자기가 발탁한 인물이 너무도 잘하고 있는데 그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이거 참 이상하죠? 자기는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이순신은 적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모조리 패퇴시키고 있다! 국민들이 자기에게는 돌팔매질을 해대는데, 이순신에게는 한없는 경복(敬服)의 심사를 지닌다! 못 참을 일이었죠.
▲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이다.
적서지별이 망국지본이 되다
혹자는 선조(宣祖)의 옹졸한 마음이, 조선왕조 왕위계승역사에 있어서 그가 최초의 서자(전대의 왕인 명종은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전 왕 중종의 서손庶孫인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랐다. 하성군이 바로 선조이다)라는 특이성, 그 불안감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하죠. 동학운동의 리더인 해월 선생은 적서지별(嫡庶之別,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망가지본(亡家之本)이요, 반상지별(班常之別,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망국지본(亡國之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적서의 차별은 왕가 내의 분위기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나봐요. 하여튼 선조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고, 학식도 뛰어났고, 또 글씨도 잘 썼어요. 서산대사의 품격을 알아보고 그를 선대(善待)한 것이 국난을 당해 큰 도움을 얻게 된 것이죠.
선조(宣祖)는 의주에서 서산(휴정)을 만난 후, 서산에게 곧바로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하사합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면서 폐지되었던 승통(僧統)제도를 부활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승군의 조직이 정식적인 국가조직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죠.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이 되어 의승(義僧)의 총궐기를 호소하니 순식간에 전국에서 5,000여 명의 승군이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서산대사는 의승군을 거느리고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서울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말 탄 서산을 끌어내리는 유생들
지금 조선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고난의 길을 걸었는가, 그리고 그 고난 때문에 얼마나 순결한 선가(禪家)의 맥을 이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려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고 말았는데,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의 치안을 돌보기 위하여 궁궐 밖에서 승군들과 함께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서산은 당연히 이미 74세의 노구에 병까지 얻은 상태였기 때문에 말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신(朝臣)들이 그 앞을 걸어가면서 비위가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말도 못 타고 걸어가면서 서산대사를 치켜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은 터무니 없는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휴정은 오직 방자한 마음만을 품어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앞뒤에서 호위하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타고 궁문 밖에 이르러서는 걸어가는 조신(朝臣)들을 만나도 거만스레 벼슬아치나 재상의 체통을 보입니다. 조금도 중다운 태도가 없으니 추고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명하시어 후일을 징계하소서. 『선조실록』 26년 5월 15일 무진(戊辰) 기사
惟懷縱恣之心, 多率騶從, 前後擁喝, 至於騎到行宮門外, 親徒步之朝士, 偃然作衣冠宰相之體. 略無緇髡之態, 請命推考重治, 以懲他日.
말을 타고 궁궐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국가를 위기에서 탈출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왕이 안전하게 환궁하도록 준비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도총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렇게 당대의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벼슬아치들은 모함만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도운 승군의 활약상, 유정의 위대한 마무리
이순신(李舜臣) 이 그 처절한 명량해전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조직력과 희생을 불사하는 탁월한 정신력을 갖춘 승군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년 동안의 참혹한 전화 후에도 그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능력이 국가에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전후에 복구대책이나 방비사업도 서산대사의 수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주도하였고, 일본에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까지 만나고 조선인 3천여 명을 귀환시키는 대사업을 마무리 지은 것도 유정이었습니다.
실제로 3,500명 정도의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킨다는 문제가 얼마나 방대한 국가 대 국가 규모의 사업인가, 그것은 일본측의 극진한 성의와 외교적 예우가 없이는 근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례적 사건이었습니다(일본측 자료에 의거하면 3차에 걸쳐 7,500명 정도가 돌아갔다고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을 계기로 정식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주기적으로 에도막부를 방문하여 많은 문화적 교류의 성과를 냅니다(조선통신사의 행렬은 1회에 500명 정도의 조선의 다양한 인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가행사였다. 1회 행렬의 전 여정이 8~10개월이 걸렸다. 에도막부시대를 통해 12번의 조선통신사가 왕래하였다).
유정의 눈부신 활약상도 제대로 기록 안 됨
사명대사 유정의 이러한 엄청난 외교적 성과도 유신(儒臣)들의 시기 때문인지 『선조실록』에 언급조차도 없습니다. 참 치사한 놈들이지요. 『수정선조실록」에나 간단히 실렸을 뿐이지요.
하여튼 서산대사는 선조(宣祖)가 무사히 서울로 환궁한 후(선조 26년 10월), 곧바로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갑니다. 의승군(義僧軍)의 지속적인 관리는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에게 맡기고 세속에서 떠납니다. 건방지게 관복 입고 말 타고 다닌다고 씹어대는 벼슬아치놈들의 꼬락서니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겠지요. 떠나는 서산을 선조는 붙들지 않습니다. 떠나는 서산에게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尊號)를 내리고, 정2품 당상경(堂上卿)의 직위를 주지만, 서산에게는 하찮은 일일 뿐이었습니다. 서산은 그 후로도 11년을 더 살고 묘향산에서 좌탈(坐脫,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로 영면)합니다. 그때 남긴 시가 유명하지요.
서산과 해남 대둔사
서산은 살아있을 때, 해남 대둔사(대흥사)를 여러 번 간 것 같습니다. 말년에도 노구를 이끌고 갔던 것 같습니다(세부적인 일정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 지역을 많이 다닌 것은 확실하다. 나는 대둔사도 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입적하는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내 의발(衣鉢, 법통의 상징)과 주상이 내린 교지를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게 하고, 제사를 주관케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ㆍ정조 시기에 대둔사에 휴정, 유정, 처영 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건립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목숨을 바친 무명의 승려들, 이순신(李舜臣)이나 유생들은 후손이 있어 제사라도 모시지만 후손이 없는 이 무명의 승려들의 고혼(孤魂)은 지금까지도 흠향을 받지 못하고 중천을 떠도는데, 그럴 수 있냐 해서 해남 대흥사에 국내사찰로서는 최대규모의 목조건물인 “호국대전”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내가 이 글을 쓰는 2019년 시점). 국민들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반드시 서산대제는 국가제향으로 봉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승과
사실은 ‘진짜 중’ ‘가짜 중’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고 말았는데, 하여튼 조선불교의 대맥(大脈)은 서산이 승통을 일으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사실 의승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 스님들의 열렬한 소망은 단 하나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국난을 계기로 해서라도 승과가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생들에게 교육과 출세의 길로서 주어지는 과거시험과도 같은 승려들의 과거시험(승과僧科,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국사가 될 수 있는 존엄한 국가제도로서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폐지되었다가 명종 6년에 부활됨.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다시 폐지된다)이 부활되기를 갈망했던 것이죠. 선조(宣祖)야말로 이 승과를 부활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의리가 없는 인물’로서 유명합니다. 선조가 승과를 부활시켜 다시 종교세력으로 인한 골머리를 썩일 리 만무하지요. 그래도 선조가 살아있을 때까지 스님들은 승과의 부활을 갈망했지요. 그러나 끝내 선조는 자기 치세기간 동안 그토록 많은 덕을 봤던 불교에 대해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불교를 순화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권력화되고 세속화되는 것은 결국 타락을 의미하지요.
서산의 입적시
서산은 하나의 승려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매우 심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 쓴 시만 보아도 그 인격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선조 37년[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는 엄청나게 많은 제자들이 시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글을 따로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했습니다. 그리고 설법을 마치자 자기의 영정(초상화)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걸개 뒷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입적의 순간에도 이러한 적멸송(寂滅頌)을 쓸 수 있는 정신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도 죽는 순간에 이런 시 한 수 쓰고 깨끗하게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불가에서는 이런 시를 정확히 해석하려고 하지 않아요. 애매하게 번역하거나 그럴듯하게 흐려 버리고 말거든요. 그 경지만 적당히 맛보라는 얘기겠지요. 하긴 한국불교의 대맥을 운운한다면 ‘원효 – 지눌 – 서산’의 세 봉우리를 논할 수밖에 없는데, 최후의 찬란한 노을의 광채가 담긴, 이 서산의 생애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는 시를 해석한다는 것이 여간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문의(文義)는 매우 간단합니다.
여기 ‘팔십 년’이라는 것은 물론 서산 본인의 인생살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가 죽었을 때 85세였으니까요. 그가 오도송을 쓴 것은 18세 때였구요. 여기 ‘거(渠)’라는 말은 한문에 있어서 당ㆍ송대의 구어체에서 쓰던 말로서 현대 백화의 ‘타(它), 타(他)’에 해당되는 의미입니다. ‘그것’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하면 ‘거시기’ 정도라는 뜻이 가장 근접하게 그 복합적 의미를 잘 나타낼 것입니다. 그럼 한번 번역을 시도해볼까요?
八十年前渠是我 | 팔십 년 전에는 거시기가 난 줄 알았는데, |
八十年後我是渠 | 팔십 년을 지나고 보니 내가 거시기로구나! |
아주 간단하고 간결한 명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화상(畫像)을 놓고 하는 말이니 거시기는 객체화된 ‘자기(Ego)’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의 모습이 나의 밖에 객체(客體)로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인식이 자기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가 되어 철들고 보니 여기 살아있는 나가 곧 거시기, 즉 거시기는 주체적인 나의 투영일 뿐, 영원히 살아있는 실상은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이 ‘거시기’를 부처님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죠! 어렸을 때 불문에 들어와 구도자로서 행각을 시작할 때에는 부처님은 항상 저기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거시기(그 무엇)였습니다. 나 밖에 있는 초상화 같은 것이었죠. 이제 열반에 들려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 생각해보니, 이 죽어가는 내가 곧 부처요, 80년을 살아온 이 나가 곧 싯달타였다[八十年後我是渠]라는 것이죠.
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와 철학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구세, 救世)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서산이 말한 거시기를 ‘철학’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봐도 동일하죠. 제가 철학과를 들어갔을 때는 물론 ‘철학(philosophy)’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철학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저 거시기 초상화가 걸려있듯이, 도상화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상체계, 그림화 될 수 있는 언어의 건물을 완성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인생을 이제 팔십 고개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철학은 나의 언어의 걸개그림(=거시기)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쉬는 나의 삶, 이 삶이 곧 나의 철학이다. 한마디로 거시기 철학은 없는 것이죠.
서산과 삼가귀감
서산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서산이 원효나 보조 지눌에 비해 좀 지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생각이 바뀌었어요. 서산은 수행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지만 매우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선(禪)ㆍ교(敎) 양면을 깊게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ㆍ『유가귀감(儒家龜鑑)』ㆍ『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는 책을 썼는데,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이 책들을 원문으로 다 통독을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당시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어요. 우선 책의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고 느꼈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여러 번 읽으면서 서산은 진정으로 유ㆍ불ㆍ도 삼가(三家)를 회통(會通)한 대사상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결한 언어 속에는 무궁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여튼 조선 중기에 서산과 같은 큰 인물이 스님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산은 태고보우(太古普愚)의 7대손이며, 또 서산 밑에서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의 4대 문파가 법통을 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모든 조선 스님들의 법맥은 서산을 떠나지 않습니다. 서산이야말로 일시적으로나마 승통을 부활시켰고, 살아 정2품의 직위를 받았으니 향후의 조선불교는 서산의 품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과는 달리 그 내면이 심오했다는 것이 조선불교의 축복입니다.
경허 송동욱
조선조 말기에 서산의 맥을 이은 자로서 참으로 존경스러운 한국불교의 거목이 한 분 태어납니다(편양언기鞭羊彦機 계열이다). 경허(鏡虛, 1849~1912)라는 문제인물로 인해 조선불교의 선풍이 크게 진작되게 되죠. 경허는 헌종 15년(1849년 기유己酉: 일지一指는 1846년 병오丙午설을 주장. 나는 방한암의 「선호경허화상행장先呼鏡虛和尙行狀을 따른다)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여산 송씨 두옥(斗玉)을 아버지로, 밀양 박씨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는데 분만 후 사흘 후에나 울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다음 해는 헌종이 죽고, 강화도에서 나무꾼 노릇을 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죠.
이 강화도령 철종의 시대야말로 우리민족이 근대를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이 방치되어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하였습니다. 안동 김씨 시파계(時派系) 일문의 독재로 세도정치의 온갖 병폐가 극심해지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경허의 아버지 송두옥은 너무도 가혹하고 너무도 억울한 탐관오리 세금 착취에 홧병을 참지 못하고 경허(동욱東旭) 나이 8세 때 세상을 뜨고 맙니다. 평소 깊은 불심을 지닌 어머니 밀양 박씨는 두 아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자신도 불문에 들어가 공양주보살로 살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경허는 아홉 살 때(1857년) 경기도 시흥 청계산(서울구치소가 있는 그 산골로 깊게 들어간다) 청계사 계허(桂虛) 스님 문하에 들어가 행자생활을 시작합니다.
동욱이는 몹시 영리했고, 기골이 강해 건강했고, 무한한 지적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계허 스님은 인품이 좋은, 덕의로운 사람이었으나 학식이나 선경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동욱이의 향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스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계허는 동욱의 지적 성장에 중요한 계기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우선 행자 동욱에게 예기치 못했던 행운이 닥칩니다. 우연히 ‘박 처사’라고만 알려진 백면서생 한 명이 휴양차 청계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문학(問學, 학문의 본 뜻)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 바로 지적 꽃망을이 탁 터지려고 할 때, 바른 선생, 큰 스승을 만난다는 것처럼 큰 행운은 없습니다.
독경하고 싶거들랑 천자문부터
밥 짓고 나무하고 청소하고, 행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절깐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동욱은 나는 언제나 중이 되려나, 언제나 큰 스님처럼 저렇게 염불을 근사하게 할 수 있으려나 하고, 틈이 나는 대로 대웅전 옆문에 귀를 바짝 대고 서서 스님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귀담아듣곤 했습니다. 그 선망의 발돋움은 참으로 순결한 것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이 와서 말을 겁니다.
“아니 동자 스님, 법당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뭘 하시는 거예요?”
“아~ 우리 스님 독경하시는 걸 잘 들어두었다가 나도 하려구요.”
“원 참 동자 스님두, 아 ~ 독경이야 글로 배우셔야지, 귀동냥 가지고 배워지나요?”
“글로 배우다니요?”
“거 왜 있잖아요. 하늘 천 따 지 하는 천자문만 떼도 독경은 식은 죽 먹기예요.”
“천자문은 어떻게 배우나요?”
“거 왜 있잖아요. 저 객실에 글공부하시는 박 처사님 모르세요?……”
천자문 돈오와 불교와 한학, 그리고 해석학적 방법론
사실 경허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 순간이야말로 스님의 거창한 오도송(悟道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성철당이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 더 돈(頓)한 개안의 순간이었죠. 어린 경허는 박 처사라는 사람 밑에서 체계적으로 문자수업을 받게 됩니다. 박 처사는 당대 조선유학의 정통을 잇는 대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경허라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이 유학자와의 만남이었을 겁니다. 경허는 이 박 처사 밑에서 사서삼경은 물론 『사기』ㆍ『한서』ㆍ『후한서』, 그리고 『노자』ㆍ『장자』 등의 도가경전까지 다 배우게 됩니다. 경허가 짧은 시간에 이것을 다 통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그가 청계사에 머문 것은 5년 가량이다) 어린 시절에 이러한 유경(儒經)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배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자산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 스님들의 대체적인 특징이 체계적 지식을 무시한다는 겁니다. 학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기초적 방법론에 접할 기회가 너무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스님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등의 막연한 소리로 가려버립니다.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는 물론 공부를 많이 한 스님도 적지 않아요. 외국 가서 박사를 땄다 하고 국내에서도 유수한 대학을 나온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내가 말하는 지식의 무시는 이런 학식과 관련이 없어요. 학식을 가져도 학식을 얻게 되는 과정, 그 엄밀한 방법론에 관한 것이죠.
한자로 쓰여졌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한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학식이 높다는 스님들도 그들의 불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기초적인 어휘나 문법, 다시 말해서 신택스(syntax, 문자)나 세멘틱스(semantics, 의미)적인 분석능력을 근원적으로 결(缺)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다시 말해서 사전 하나, 출전 하나를 제대로 찾을 줄을 모르는 것이죠.
불경이 아무리 한자로 쓰여졌다고 해도, 그것이 한문인 이상, 그것은 엄연한 한학의 소양 위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의미체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학의 에이비씨를 모르고서는 결코 불경의 에이비씨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죠. 한학의 에이비씨를 안다는 것은 한문, 즉 고전중국어(Classical Chinese)의 기초어휘를 형성하고 있는 경전들을 달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서삼경, 더 본격적으로는 십삼경 전체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없이는, 불가적 내용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한문의 능력을 구사할 길이 없습니다. 정통한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눈에는 스님들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참 딱한 일이죠. 다시 말해서 기초가 빈곤해서 생겨나는 현상들이죠.
경허의 죽음
이 점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를 산 경허의 삶은 돋보이는 것이 있지요. 바로 경허처럼 단단한 학식, 그것도 한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경허는 세칭 이단비도(異端非道)의 스님, 막행막식의 선승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경허처럼 무서운 학승이 없고, 그의 싯구에 담긴 한학의 소양은 그저 흉내만 내는 스님들의 화려함이 미칠 수 없지요. 경허가 64세(1912년) 함경도 삼수갑산 도하동 어느 글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어갔을 때, 그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만공이 이렇게 읊었어요.
遷化向甚麽處去 천화향심마처거 |
아~ 우리 선생님이 가셨다니 어디로 가셨을꼬 |
酒醉花面臥 주취화면와 |
아~ 술에 취해 꽃밭에 반드시 누워계시겠지 |
물론 경허는 술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여기 술에 취했다 하는 것은, 경허 실존의 무서운 고독을 나타내는 말이지요.
중생의 미망으로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신 방편의 술이며, 꽃밭 또한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길을 가리키고 있어요. 운명한 시신의 저고리 속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해요.
三水甲山長谷裡 삼수갑산장곡리 |
삼수갑산의 깊은 계곡 속에 |
非僧非俗宋鏡虛 비승비속송경허 |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송경허라는 놈이 누워있을 것이다. |
故鄕千里無人便 고향천리무인편 |
그리운 고향은 천리길이나 되고 소식 전할 인편 또한 없도다 |
別世悲報付白雲 별세비보부백운 |
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슬픈 소식일랑 저기 떠 있는 저 흰 구름에 띄우노라 |
너무도 소박한, 스님의 내음새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자기 일생의 느낌을 다 담은, 참으로 맑은, 우리나라 우전차(火前茶)와도 같이 향기로운 임종시입니다.
계허와 만화
계허 스님은 동욱이가 박 처사 밑에서 글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 모르는 체한 것이죠. 계허 스님은 동욱의 향학열을 막고싶지는 않으셨을 거에요. 보통 스님들 같으면 “아~ 이놈! 속가의 알음알이를 익혀서 사람 버리겠다”하고 몽둥이를 들 것입니다. 그러나 동욱이의 한학 경지가 높아지는 것을 감지한 스님은 동욱이가 스님이 안되고 한학자가 될까봐 두려워, 자기의 도반으로(어릴 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던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으며 서쪽 자락에 있는 갑사甲寺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한다)의 만화(萬化) 스님에게 동욱이를 보냅니다. 동욱이는 청계산에서 동학사까지 도대체 얼마나 걸리는 거리인 줄도 모르고 계허 스님의 서찰과 여비, 주먹밥, 보살이 챙겨 준 시루떡ㆍ누룽지를 창호지에 말아 걸망에 넣고 무작정 나섭니다.
계허는 허술하게 보이지만 진실로 위대한 스님이었어요. 동욱이를 청계산에서 내보내면서 자신도 퇴속할 결심을 하지요. 동욱에게 말합니다.
“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불도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할 그런 그릇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결심하기를 부처님께 더 이상 죄를 짓기 전에 환속하여 늙으신 부모님께 그동안 못한 효라도 할까 한다. 박 처사가 수차 이르기를 천리마가 제자리를 못 찾아 똥구루마나 끌고 있는 형국이라 하니, 너는 부디 만화 스님 밑에서 제대로 배워 대강백(大講伯)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큰 인물이 되어라.”
경허 동학사에 오다, 구척 장신의 강백
경허가 천리길을 걸어 동학사에 당도한 것은 1862년 바람결이 쌀쌀한 늦가을이었습니다. 만화 스님은 몇 마디 건네보고 동욱이가 진실로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지요. 만화 스님은 아낌없이 동욱에게 불교경전의 묘리를 다 가르칩니다. 동욱이는 『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화엄경』, 『묘법연화경』,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이며 대승의 교리를 집대성한 『원각경」, 선문의 공안을 집대성한 『선문염송』 등을 다 깨우치고, 강원의 대교과(大敎科)에 이르는 4단계의 교육과정을 예리한 기억력과 한학의 소양에 힘입어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모두 마칩니다.
경허가 동학사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9년째, 스물세 살의 경허는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되었고, 학승으로서, 그리고 경지가 깊은 선승으로서 두루 모자람이 없었지요(보통 경허를 ‘구척九尺’이라 표현하는데, 정확한 치수를 알 수는 없다. 키가 1미터 90 이상인 것 같다. 공자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사나이였다). 만화 스님은 위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경허를 자기 대를 잇는 수좌강백(首座講伯)으로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1871년부터 경허는 동학사의 강백이 되어 이름을 떨칩니다. 그의 『금강경』 강론은 너무도 유명하여 사방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몰려들었고, 동학사 강원에는 70명이 넘는 학인들이 늘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의 강론은 명료했고 심오했으며 구세의 열정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1879년, 서른한 살이 된 경허는 불현듯 환속한 스승 계허 스님을 찾아뵙고 싶은 생각이 일었습니다. 만화 스님께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만화 스님은, 비록 환속했지만 경허를 알아보고 키운 최초의 인물이 계허요, 또 다 성장한 경허가 스승을 잊지 못하고 찾아뵙겠다는 삶의 자세가 기특하여 기꺼이 허락하지요. 더구나 계허는 그의 친구였습니다. 경허는 동학사를 가뿐한 걸음으로 나섭니다. 처음 동학사 문깐에서 부들부들 떨고 서있던 것이 14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 17년 만에 동학사를 나서는 것이죠. 당대 조선 최고의 강백이 되어!
천안에서 만난 귀신
혼자 터덜터덜 발걸음을 재촉하여 천안 풍세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한문표기로는 ‘豊歲’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릴 적부터 ‘풍새’로 발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고 억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광풍을 피하기 위해 어느 집 대문 앞 추녀 밑에 서있다가 아무래도 그칠 비가 아니라서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그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가 한참 후에나 빼꼼 집 대문이 열렸어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문 좀 열어주오.”
“아니, 도대체 누구간데 이 빗속에 대문을 두드리시오?”
“예, 저 지나가는 객승이온데 ……”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빗장을 지르면서 빨리 가버리라고만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황당했지만 뭔가 속사정이 있겠지 하고, 다음 집 대문을 두드렸으나 쌀쌀한 반응이 다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10여 가호를 방문했으나 도무지 하룻밤 신세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보였습니다. 세상인심이 이토록 각박할 수 있나하고 한탄해봤자, 도무지 비바람은 계속 휘몰아쳤고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집 대문을 부숴져라 세차게 두드렸는데 나이가 지긋한 분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 대체 뉘시오?”
“저어 지나는 객승이온데 하룻밤 비를 피해 유했으면 합니다.”
“허어~ 이 스님이 큰일 날 소리하시는구려. 살고 싶으면 냉큼 도망치시오.”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런 야박한 소리를 하시오?”
“이보시요 스님, 나는 지금 스님에게 야박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오. 이곳은 도무지 스님이 머물 곳이 아니란 말이요. 이 동네 전체가 호열자 귀신에게 씌워서 집집마다 시체가 즐비하고 시체를 거둘 사람도 없어요. 산 사람의 동네가 아니고 죽음의 동네란 말이오, 송장이 되고 싶지 않거들랑 빨리 이 동네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치시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호열자? 죽음의 귀신?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쭈뼛, 동욱의 의식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가 엇갈렸지요. 이 동네를 내리 깔고 있는 죽음의 적막, 그 실체를 알고 나자 엄습하는 것은 공포였습니다. 그 순간, 살고 싶으면 멀리 도망치라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든 말든 맨살이 터져 피가 배어나는 것도 모르고, 오직 죽음의 영역을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먼 언덕바지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 기대어 한숨을 돌렸을 때, 공포와 피곤의 극에 달한 동욱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그냥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호열자(虎列刺)’라는 말은 본시 콜레라(Cholera)의 음역에서 생겨난 말이에요. 끝 글자가 원래는 ‘호열랄(虎列剌)’인데 ‘어그러질 랄[剌]’과 ‘찌를 자[刺]’가 너무도 비슷하게 생겨서 그만 ‘호열랄’이 ‘호열자’
로 와전되고 말았지요. 중국에서는 보통 ‘虎列拉(hu-lieh-la)’로 쓰죠. 19세기 세계 최대의 전염병이었던 콜레라(호열자)가 우리나라에 대규모로 상륙한 것은 순조 21년 신사(辛巳, 1821) 때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콜레라라는 이름은 없었고, 『실록』 기사를 보면 ‘괴질(怪疾), 윤질(輪疾), 윤행괴질(輪行怪疾), 려질(沴疾), 괴려(乖沴), 습온(濕瘟)’ 등의 표현이 쓰였습니다. 의가들도 헌종 때는 ‘마각온(麻脚瘟)’, 고종 때는 ‘서습곽란(暑濕霍亂), 윤증곽란(輪症霍亂)’이라는 병명을 썼지 콜레라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콜레라균의 19세기 역사와 소독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불행
기실 ‘호열자(虎列刺)’라는 이름을 썼다면, 그것은 이미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내가 경허의 대화내용에서 “호열자” 라는 말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실상 1879년 당시에는 조선에 호열자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의학계에는 ‘사기(邪氣)’라는 막연한 개념만 있었지 ‘미생물(microorganism)’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콜레라균은 현미경을 통해보면 그냥 육안으로 쳐다볼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생물체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곽란(霍亂)을 일으킬 정도로 감염되려면 최소한 1억 개, 많으면 100억 개의 콜레라균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콜레라균의 이동은 노르망디상륙을 시도하는 연합군의 규모와 비교가 되질 않아요. 그런 것은 조족지혈이지요.
콜레라는 인도의 힌두스탄(Hindustan) 지역에서 발생되어 중국대륙을 거쳐 평안도, 황해도 루트를 따라 1821년 8월 중순에는 서울에 도착합니다. 이때 평양부에 사람이 수만 명 죽었으며, 한성부의 희생자가 이미 13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천안 동네에 집집마다 시체가 쌓였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1859년(철종 10년) 제2차 대유행이 있었고, 1862년 제3차 대유행이 있었으며, 그 뒤로도 1910년까지 크고 작은 유행이 계속됩니다. 수십만의 인민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넘어갔지요. 우리는 역사를 너무 정치사적으로만 봐요. 이러한 민중의 생활사는 전혀 모르고 넘어가는 겁니다.
콜레라는 주로 먹는 것으로 전염됩니다. 분변, 구토물로 오염된 음식이나 식수를 통해 감염됩니다. 오염된 손으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식사를 하면 감염되고요, 특히 날 것이나 덜 익은 해산물이 감염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생물의 발견은 인류에게 ‘위생(hygiene)’이라는 관념을 형성시켰습니다. 위생이란 소독을 말하는 것이고, 소독의 핵심은 박테리아라는 미생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실 콜레라균에게 당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끓인 음식을 먹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처방은 반드시 물을 끓여 먹는 것이죠. 모든 물은 끓여 먹어라! 이 한마디의 수칙만 알았더라도 19세기의 조선민중이 그렇게 대규모로 죽음에 처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아무도 이러한 간단한 수칙 하나를 제시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광무 10년(1899) 9월, 일본으로부터 콜레라균의 개념이 들어오고(‘호열랄’은 일본식으로 읽으면 ‘콜레라’가 된다), ‘호열자예방규칙(虎列刺豫防規則)’이라는 것이 반포됩니다. 그 전에는 우리 조선민중은 괴질을 역귀(疫鬼)로만 알았습니다.
해월과 경허, 그리고 윤질 콜레라
지금 동욱이가 자기 옛 스승을 찾아나선 이 시기는 바로 동학의 제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포접제도를 활용해가면서 가열차게 동학사상을 민중의 삶 속으로 침투시키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1880년에는 강원도 인제 갑둔리에서 우리민족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초의 목판본이 간행됩니다. 탄압 속에서 간행된 이 경전이야말로 우리민족 근대정신의 정화라 할 수 있습니다.
해월(海月, 1827년생)과 경허(鏡虛, 1849년생)! 나이는 해월이 한 세대 위이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같은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허는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적 수양을 통해 새로운 정신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고, 해월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사회조직적 운동을 통해 정치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 다 조선역사의 개벽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콜레라 대전쟁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 또한 매우 대조적이지요. 해월은 경허처럼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통찰력과 사물을 바라보는 아주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통고(痛苦)인 괴질귀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철저히 위생론적이었습니다. 민중의 물리적 고통은 우선 물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고기종류를 먹기를 즐겨하지 말며, 해어(海魚) 먹기를 삼가며, 논에 우렁이나 지렁이, 가재를 먹지 말라. 가신 물을 아무 데나 뿌리지 말며, 침을 함부로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마라. 코나 침이 땅에 떨어졌거든 닦아 없애라.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 새 국에 섞지 말라. 먹던 김치 새 김치에 섞지 말고, 먹던 반찬 새 반찬에 섞지 말라. 조석 할 때에 반드시 새 물을 길어다가 쌀 다섯 번 씻어 앉히고, 밥해서 풀 때에 국이나 장이나 김치나 정갈하게 한 그릇 놓고 깨끗하게 먹어라. 살생하지 말며 삼시 음식을 부모님 제사 받들듯 받들라. 이리하면 연병윤감(延病輪感)을 아니 하리라.”
동학 전도의 비결: 콜레라
여기에 핵심적인 ‘물이나 음식을 반드시 끓여 먹으라’라는 명제가 빠져있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미생물학의 성과가 전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연병윤감’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괴질은 전염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전염루트를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통찰력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음식물이나 물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놀라운 형안이 있었던 것이죠.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1864년 대구 남문밖 관덕당 뜰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죠. 그 당시 동학교도는 전체 3천 명 정도였고 교조의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세력은 쇠미했습니다.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동학을 홀로 걸머지고, 30년 동안에 동학을 갑오농민혁명의 전국조직으로 일궈낸 사람이 해월 최시형입니다. 이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탁월한 정신적 설법은 이지적 소수에게는 멕히지만 대중운동으로 확산되기는 어렵습니다. 30년 동학의 민중조직건설의 비결은 다름 아닌 콜레라와의 전투였습니다. 희한하게도 괴질귀신은 동학도들을 피해간다는 소문이 전국에 유포된 것이죠. ‘호열자 괴질귀신한테 당하지 않으려면 동학에 입도해라’라는 명제가 들판에 버려진 민중의 소망이 된 것이죠.
자아! 동학 얘기는 이쯤 할까요? 하여튼 19세기 조선에 상륙한 콜레라는 한편으로 동학혁명의 기초를 구축시켰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선불교의 정신혁명을 촉발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항상 동일한 국면을 놓고도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테마를 전개해나가는 것이죠.
말로 설파한 생사일여, 정말 생사일여냐?
공포와 오한에 떨며 느티나무 등걸에 기대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찬란한 아침 햇살이 동욱의 적삼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동욱 은 갑자기 산다는 게 무엇이냐, 죽는다는 게 무엇이냐, 내가 『금강경』을 운운하며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자신있게 강론했건만 지금 죽음의 귀신이 그토록 무서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니, 도대체 내가 20년 넘도록 쌓아온 지식의 공덕이 뭔 소용이냐, 온갖 상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강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고 뜬구름처럼 보였습니다. 『법화경』의 오묘한 비유들을 그토록 재미있게 설파하고,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모험을 그토록 환상적으로 그려나갔건만 지금 이 내 꼬라지가 무엇이냐? 정말 내가 무주(無住, 집착함이 없음)하는 마음을 냈단 말인가? 내가 과연 그 죽음의 마을에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었던가? 그는 자신이 살아온 전 생애가 다 위선으로 느껴졌고, 그 위선적인 자아상을 바라보고 신뢰한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심리학에서 흔히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라는 말을 쓰는데 성취를 누적해온 위대한 인간에게는 중년의 나이쯤에 그것을 부정하는 계기가 찾아온다는 뜻이지요. 경허는 그 길로 옛 은사를 찾아볼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동학사로 직행합니다.
경허의 용맹정진과 이 진사의 문안
그리고 강원의 강백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스님에게 경전을 배우겠다고 몰려든 학인들에게 강원의 폐쇄를 선포합니다. 만화 스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강원을 폐쇄하고 학인들을 다 흩어지게 하였으니, 만화 스님으로서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더니 내가 왔는데도 나오지 않겠는가?”
“죄송하옵니다. 스님.”
“강원을 폐쇄하고 학인들을 다 흩어지라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죄송한 일이오나 그렇게 했습니다. 스님.”
“네 이놈! 감히 누구 맘대로 강을 폐하고 학인들을 내보낸단 말이냐?”
“죽은 문자에만 매달리고 경구에만 눈이 멀어 더 이상 허튼소리를 지껄일 수 없습니다. 스님!”
확철하게 깨닫기 전에는 일체 세간에 나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허벅지에 송곳을 들이대고 턱 밑에 칼을 대고 졸음을 쫓으며 용맹정진, 석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긴 머리와 수염으로 몰골이 휘덮이고 닦지 않은 몸에서는 냄새가 펄펄 났으나 두 눈에서는 광채가 불을 뿜었지요.
경허에게 공양을 가져다주던 원규(元主)라는 사미승이 있었습니다. 원규의 속성(俗性)은 이씨였는데, 그의 부친이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으로 왕실과도 친분이 있었고, 학식이 풍부하였고, 불교의 가르침을 깊게 터득한 바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진사’ 또는 ‘이 처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진사는 동학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원규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이 진사와 이야기하는 중에 이 진사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가?”
“예, 그럭저럭 지내시고 계십니다.”
“아 이놈아 그럭저럭이라니, 강주 스님은 뭘 하시고 계시냐 말
이다.”
“방안에서 소처럼 앉아계시기만 합니다.”
“허허 중노릇 잘못하면 다음 생애에는 소가 된다는 것도 모르시는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공양만 받아처먹으면, 다음 생에서는 소가 되어 죽도록 일을 해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그 말씀이신가요?”
“허어! 절깐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문이 겨우 그렇게 밖에 풀이를 못해?”
“그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소가 되더라도 천비공처가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 정도는 풀이를 해야하지 않겠느냐[何不道, 爲牛, 則爲無穿鼻孔處]?”
“천비공처가 없는 소라니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 이놈아 훌륭한 강주 스님에게 배우라고 절깐에 보냈거늘, 아직도 이것 하나 해석 못하느냐? 응당 강주 스님께 여쭈어서 제대로 풀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하지 아니한고?”
천비공처(穿鼻孔處)가 없는 소
절깐에 돌아온 사미는 이 진사의 설화(說話)를 스님들께 여쭈어 보았
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주 화상께서 아무리 선공부에 열심, 망식(忘食)중이라 해도, 발분(發憤)하여 진리를 고구(考究)하고 계신 중이니 스님께 가서 직접 여쭈어보는 것이 가(可)하다.”
사미 원규는 경허가 폐침망찬(廢寢忘餐) 용맹정진 하고 있는 방 앞에 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용감하게 묻습니다(원규는 훗날 동은화상東隱和尙이라는 큰 스님이 된다).
“천비공처(穿鼻孔處)가 없는 소가 된다, 도대체 이 말이 뭔 뜻이오니이까?”
이 말을 방안에서 듣고 있던 경허! 그 순간이 경허의 진정한 득도의 찰나였습니다. 가장 정통적인 경허행장을 쓴 한암은 이와 같이 이 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부처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이 활연히 눈앞에 드러난다. 대지가 무너지고 물(物)과 아(我)가 다 사라졌다. 옛 부처들이 크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 경지에 곧바로 다다르니 천 가지 만 가지 법문의 무량묘의(無量妙義)가 당장에 얼음 녹듯이 녹아 버리고 모든 의혹이 풀려버렸다.
경허는 꼭꼭 걸어 잠갔던 문짝을 발로 차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천지가 요동치는 듯 웃고 또 웃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스님이 드디어
미쳤나보다 하고 둘러싸도, 웃고 또 웃었지요.
“네 이놈, 지금 분명히 제정신이 아니다!”
만화 스님은 걱정이 되어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경허에게 주장자라도 내려칠 기세로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하하하하 노여워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스님!”
“무엇이라고?”
대지에 큰 대자로 누워 껄껄거리는 경허는 말합니다.
“저는 지금 제정신입니다. 아니 제정신이 아니라 아주 맑은 정신입니다. 명경지수처럼, 아니 깨끗한 빈 거울처럼 아주아주 맑은 정신입니다.”
성우(惺牛)로 다시 태어나다
경허의 웃음은 이제 범부의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순간 경허는 자신의 새로운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맑디맑은 빈 거울’이라는 뜻으로 법호를 ‘경허(鏡虛)’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법명, 법호가 모두 스스로 새로 지은 것이죠. 이것은 실로 조선불교의 새출발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자~ 여기 명료하게 풀어야만 할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의 병폐가 한문을 명료하게 따져 읽고 해석치 못하고 두리뭉실 적당히 자기류의 해석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보통 경허의 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콧구멍이 없는 소’ 운운해버리는데 ‘콧구멍이 없는 소’라는 것은 SF영화에나 가능한 가상일 뿐, 실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콧구멍이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고,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죠. 생명의 상징, 기준이 곧 ‘숨’이요, 숨이 곧 ‘기회’ 입니다. 기는 곧 엘랑 비탈(élan vital, 생명의 飛躍)이죠.
문제는 이 진사가 ‘콧구멍 없는 소’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암 스님의 경허행장에 있는 원어를 그대로 풀지 않고 썼습니다.
“어찌하여 말하지 아니하느뇨? 소가 될진대 비공을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되면 그만 아니냐라고[何不道, 爲牛, 則爲無穿鼻孔處].”
고삐와 고삐 없는 소
‘무비공(無鼻孔)’이 아니라 ‘무천비공(無穿鼻孔)’이라는 말이죠(경허의 오도송에 ‘무비공’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무천비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콧구멍을 뚫는 ‘코뚜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죠. 소는 원래 힘이 세고, 거대한 동물이라서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소가 맹수라면 호랑이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소라는 거대한 동물이 그토록 유순하게 인간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동물이 된 것은 바로 고삐(코뚜레와 당기는 줄을 합한 개념)의 발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비공을 뚫는다’는 것은 두 콧구멍 사이의 ‘비중격(鼻中隔)’을 뚫는 것인데 그곳은 너무 깊어도 아니 되고 너무 얕아도 아니 됩니다. 비중격막은 얇아서 뚫기에 적합한 곳이지만, 그곳은 예민한 신경이 잔뜩 분포되어 소로 하여금 통증을 느끼게 하며, 고삐를 잡으면 사람말을 잘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삐는 거대한 소를 말 잘 듣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해낸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고삐는 춘추전국시대 문헌에 이미 나오고 있으며, 비중격을 뚫는 시기는 소가 태어나서 10~12달 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속박, 구속을 나타내는 말로써 ‘기미(羈縻)’라는 말을 쓰는데, 이 중에 ‘미(縻)’가 고삐를 의미하는 것이고, ‘기(羈)’는 고삐와 연결되어 얼굴 전체에 씌우는 굴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는 기미로써 인간에게 제압되는 것이죠. 경허는 1미터 90이 넘는 거구의 사나이요, 소와 같은 힘을 가진 사나이였습니다. 그를 교육시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고삐를 씌우기를 원하겠죠. 이러한 문제상황을 눈치챈 이 처사는 그에게 새로운 대각의 암시를 보낸 것이죠. 이 처사야말로 대보살이었습니다. 소가 되어도 고삐 없는 소가 되어라! 이것은 자유자재의 해탈인의 경지를 나타내는 아주 비근한 표현입니다. 경허의 삶 그 자체가 고삐 없는 삶이요, 기미의 속박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대각을 통하여 창조한 삶이었습니다.
나의 이러한 해석은 경허가 취한 삶의 태도에서 곧 드러남으로써 그 정당성을 얻습니다. 그가 대각의 대소(大笑)를 허공에 날린 것은 눈발이 휘날리는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이었습니다. 그가 쓴 오도송을 보면 그 시작과 끝이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四顧無人 衣鉢誰傳 사고무인 의발수전 |
아~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
衣鉢誰傳 四顧無人 의발수전 사고무인 |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
(중략) | |
嗚呼! 已矣. 오호! 이의. |
슬프도다!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
夫衣鉢誰傳? 부의발수전? |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
四顧無人 四顧無人 사고무인, 사고무인 |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
衣鉢誰傳 의발수전 |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허의 오도송의 중략된 부분 속의 언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를 즐기지만, 나는 경허의 오도송의 핵심을 ‘춘산화소조가(春山花笑鳥歌), 추야월백풍청(秋夜月白風淸)’ 운운하는 데 있지 않고 처음과 끝의 탄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있을 때 그 깨달음의 경지가 스스로 이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의 깨달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감의 전입이 가능한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경허의 깨달음은 지존한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이것은 진정 성우 경허의 대오의 경지를 나타내는 확철한 고독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경허를 오늘의 경허로 만들어준, 그에게 무궁무진한 교학의 도리를 깨우쳐준 만화 스님이 경허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경허는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도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준엄한 스승에게 기본적 예의도 차리지 않는단 말인가? 만화 스님은 정말 기분이 나빴습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의 괘씸한 놈이죠. 그래서 한마디 건넸습니다.
“웬일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는가[何故長臥不起]?”
경허는 대답합니다.
“무사지인은 본래 이렇습니다[無事之人, 本來如是].”
만화는 묵묵히 물러났습니다.
여기 ‘무사지인(無事之人)’이라는 말은 ‘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임제가 말하는 ‘무사인(無事人)’입니다. 즉 세속적 일에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인,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지요.
“무사지인은 본래 이렇습니다.”
그 방을 묵묵히 걸어 나오는 만화 스님은 되게 기분나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화 스님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과는 다른 경계에 서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그것을 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의 상황은 경허에게도 동일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키워준 은사에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인지상정상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례를 통해서라도 경허는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존재의 모든 연속성을 절단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 심정을 표현한 말이 곧 ‘사고무인(四顧無人)’이라는 말이지요. 이제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습니다. 경허는 다음해 봄에 서산(瑞山) 연암산(鷰巖山) 천장사(天藏寺)로 거처를 옮깁니다.
천장사와 개울을 건넌 이야기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장사(天藏寺)라는 곳은 경허보다 먼저 출가한 친형 태하(여러 문헌에 ‘太虛’로도 ‘泰虛’로도 기술되고 있다) 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친어머니가 바로 그곳에서 공양주보살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이제 경허 스님 이야길랑 끊어야 할 것 같네요. 사실 경허의 삶의 모든 굽이굽이가 더할 나위없는 위대한 공안이며 우리에게는 『벽암록(碧巖錄)』보다 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나의 도반 명진이 ‘진짜 중’이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파서 얘기가 여기까지 만연케 되었는데, 경허의 삶의 이야기를 마감 짓기 전에 몇 가지 일화만 소개할까 합니다.
경허가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해 무덥던 여름, 하루는 어린 사미승을 데리고 탁발을 나갔습니다. 어느 산고을에서 개울을 건너야겠는데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 그냥 옷 입고 건너기에는 난감한 정황이었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웬 젊은 여인이 급히 경허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스님, 저 좀 보세요.”
사미승이 못마땅한 듯 퉁명스레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웬일이슈.”
“그러잖아두 개울물이 불어 건너기 어려울 거라기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만났지 뭐예요.”
“아니 우릴 잘 만났다니 그게 뭔 소립니까?”
이 여인은 사미승에게 대꾸도 아니 하고 경허에게 은근히 말을 건넸
습니다.
“스님 저를 등에 업어 건네주시지 않겠습니까?”
“날더러 말씀인가?”
“설마 하니 이 어린 애기중에게 업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린 사미승이 화가 나서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이보시오. 젊은 여인! 당치도 않은 얘기는 하지도 마십시오.”
여인은 사미의 말을 무시하고 경허에게 들이밀었지요.
“아니 스님, 내가 뭐 못 드릴 부탁을 드렸습니까? 길 가던 아녀자가 물이 깊어 그냥 건널 방도가 없으니, 등 좀 빌리자는 데 그것도 잘못입니까?”
여인은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로 외칩니다.
“아~ 그리구 내가 등 좀 빌리자구 한다구 설마 거저야 빌리겠습니까? 품삯을 드리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경허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합니다.
“허허 그래, 품삯을 주겠다니 얼마를 주시겠소?”
“한 푼을 드리지요.”
“한 푼은 안되겠고 두 푼을 주신다면 ~”
“좋아요. 두 푼 드리지요.”
경하는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내려
놓았습니다.
“자아~ 무사히 개울을 건넜소이다.”
“수고하셨네요. 약조한 대로 품상 두 푼을 받으세요.”
“두 푼이건 한 푼이건 품삯은 필요없으니 도루 넣으시오.”
“기왕에 탁발을 다니면서 왜 품상은 안 받겠다는 겁니까?”
“품삯 대신에 다른 걸로 하지요.”
이때 경허는 번개처럼 그 거대한 손바닥으로 느닷없이 그 여인의 궁뎅이를 철썩 때렸습니다.
“아이구머니나! 아니 세상에, 저런저런 ……”
경허는 소리 지르는 여인을 뒤로 하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미는 놀라 묻습니다.
“스님, 아니 그게 무슨 짓이오니까?”
“재물이면 뭐든지 된다고 믿는 것들은 그렇게 버릇을 고쳐줘야 하느니라. 허허 거 요망한 것, 궁뎅이 하나는 제법이던 걸.”
탁발을 마치고 천장사로 돌아온 그날 밤, 사미승은 몇 번이나 뒤척인 끝에 다시 일어나 앉았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죠.
“허허 이 녀석 왜 벌떡 일어나 앉느냐?”
“오늘 꼭 여쭤봐야 할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스님께서는 늘 저에게 이르시기를 출가사문은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님께서는 젊은 여자를 ……”
“젊은 여자를?”
“예, 젊은 여자를 덥석 등에 업어다가 개울을 건네주셨을 뿐 아니라 그 젊은 여자의 엉덩이까지 철썩 치셨습니다.”
“허허 이 고얀 놈 봤나?”
“스님이 오늘 낮에 하신 일은 출가사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계율을 어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듣거라! 나는 분명 그 여자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네주었고, 네 말대로 엉덩이까지 쳤느니라.”
“스님, 그러니 분명 계율에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여인을 개울가에 내려놓았다. 어찌하여 너는 아직까지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단 말이냐?”
“예에?”
“내가 만약 환갑 넘은 할머니를 등에 업어 건넸다면 네가 아직도 그 할머니를 가슴에 품고 잠을 못 이루겠느냐?”
“그~야.”
“겉모양, 겉소리에 눈이 흐리거나 귀가 어두워지면 아니 된다. 집착치 말라! 애오(愛惡)를 떠나라! 이제 내려놓아라! 그 젊은 여자를 마음속에 그만 품고, 낮에 건넜던 그 개울가에 버려야 할 것이니라.”
“스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미승은 크게 깨닫고 훗날 고승이 되었습니다.
방하착의 의미와 조주의 방하저
이 고사는 제가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때 중국철학사를 듣다가 ‘방하착(放下着)’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고승의 실례로서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나의 평생을 지배하게 된 위대한 일화였죠.
여기 이 설화의 핵심은 ‘내려놓았다’라는 한마디입니다. 경허는 여인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여인을 ‘내려놓았다[放下].’ 경허에게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미는 이 여인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계속 낑낑대면서 등에 업고 가는 것이죠.
선종에서 잘 쓰는 말로서 이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실상 ‘방하저’로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착(着)’은 본동사가 아니고 조사이며, 진행을 나타내거나 명령, 권고를 나타내는 조사(助詞)이지요. 그리고 경성(輕聲)으로 발음합니다. ‘황시아저(fang-xia-zhe)’라고 발음하지요. ‘방(放)’은 풀 방이요, 놓을 방입니다. ‘하(下)’는 내려놓을 하입니다. ‘내려놓은 상태로 있어라’라는 명령이지요. 이 ‘방하(放下)’의 고사는 『벽암록』과 쌍벽을 이루는 조동종의 공안집, 『종용록(從容錄)』에 나오는 것이 제일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 제57칙에 엄양존자(嚴陽尊者, 보신普信, 조주의 제자)가 조주(趙州, 종심從論, 778~897?) 스님에게 묻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一物不將來時如何]?”
조주가 말합니다. “내려놓아라[放下着].”
“아니 스님,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는데 뭘 내려놓으라는 겁니까[一物不將來, 放下箇甚麽]?”
“그럼 도로 가지고 가거라[恁麽則擔取去].”
아주 짤막한, 밑도 끝도 없는 이 투박한 공안은 조주의 선풍이 잘 드러나는 천하의 일품이지요. 엄양은 조주가 말하는 ‘내려놓으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조주는 다시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천장사의 사미는 깨달았습니다. ‘방하저(放下着, 내려놓음)’의 대상이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죠. 이 경허의 고사는 아주 한국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건방진 젊은 여인의 인간성, 스님을 노비처럼 취급하는 멸시의 눈초리, 그러한 상황에 여유롭게 대처하는 경허, 그리고 여인의 궁둥이에 한방 멕이는 호쾌한 가르침, 그의 제자 만공은 이러한 경허의 행태를 “가풍(家風)을 드러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날 밤 사미와의 대화였지요. 사미를 괴롭혔던 것은 여인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여인에 대한 사미의 의식이었고, 그 의식의 집중을 일으킨 집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려놓아도 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짐이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가면 될 텐데 계속 짐을 지고 가는 것이지요.
예수는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그러나 경허는 말합니다. ‘내려놓으라!’ 짐을 내려놓는데 전혀 예수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 부인과 남편과 사소한 일로 싸우고 그것이 짐이 됩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될 일을 계속 가지고 다니면서 이를 갈지요. 점점 그 짐은 커지고, 가정의 불행이 되고, 자손에게까지 그 짐이 유전되고 증폭됩니다. ‘방하저(放下着)!’이 한마디만 제대로 이해해도 한평생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경허의 보임과 1880년대 조선민중의 처참한 생활
자아! 다음의 보다 사회적인 맥락이 있는 고사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경허가 천장사에 간 것은 일차적으로 보임(保任, 보림이라고도 말함)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임 혹은 보림이라는 것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인데, 대오를 한 후에 그 경지를 보호하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당분간(보통 1년 동안) 특별한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하는 연암산 지장암이라는 토굴로 들어가 손수 솜을 놓아 두툼한 누더기옷 한 벌을 지어 입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꼬박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1년을 지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오줌, 똥, 밥 먹는 것, 자는 것, 세부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원칙이 있었을 것이지만 경허 스님이 신체를 컨트롤 하는 능력은 현재 우리나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북조시대 때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을 면벽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전설적인 얘기일 뿐이고, 실제로 경허의 1년 보임은 달마의 9년 면벽보다도 더 극심한 것이었다라고 그의 제자 만공은 말합니다. 보임 1년 동안 씻지도 않고 갈아입지도 않아 땀에 찌든 누더기옷에서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으니 이때가 몸을 덮은 것이 두부 짠 비지를 온몸에 문질러놓은 것 같았다고 합니다. 온몸이 부스럼으로 덮였어도 손대어 한 번도 긁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보임을 끝낸 후에 천장사를 근거지로 해서 다양하게 주변 사찰, 즉 덕숭산(德崇山) 수덕사, 정혜사(定慧寺), 상왕산(象王山) 개심사(開心寺), 문수사, 도비산(都飛山) 부석사(浮石寺),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천비산(天庇山) 중암(中庵) 묘각사(妙覺寺), 칠갑산(七甲山) 장곡사(長谷寺), 예산 대련사(大蓮寺), 아산(牙山) 봉곡사(鳳谷寺), 금산(錦山) 보석사(寶石寺), 태고사(太古寺), 백마강변 영은사(靈隱寺), 면천(沔川) 영탑사(靈塔寺), 계룡산 갑사(甲寺), 동학사, 신원사(新元寺),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등 호서 일대에 새로운 선풍을 진작하고 승려들의 고식적인 수행방편을 개혁시키고 민중들의 불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가 기거한 천장사는 매우 초라하고 빈한한 사찰이었으나 대각자인 경허가 살게 되면서 자연히 소음도 많았지만 또 그만큼 사찰운영이 조금은 넉넉해졌습니다. 주지로 있는 형님과 공양주보살인 엄마는 결코 경허의 혁신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조금씩은 경허의 도력에 감화를 입어간 것 같습니다. 그가 천장사에 기거하던 1880년대의 조선은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천진으로 납치되어 가고, 제물포조약이 맺어지는 등 조선왕조의 국권이 무너져가는 시기였으며, 그만큼 민중의 삶은 여러 가지 시련에 노출되어 빈궁함을 극하였고, 관원들의 탐학은 날로 거세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정황 속에서도 경허는 거침없는 언변과 기행으로 관헌들을 제압하고 경복시켜 민중의 삶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49재 고사
1883년 5월경이었습니다. 5월은 ‘보릿고개’라 하여 일년중 밥을 먹기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의 부인의 친할머니가 의주사람이었는데 당시 실제로 보릿고개를 초근목피를 삶아먹고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 정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초근목피 먹고 대변보는 것이 애기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는 소리를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당시 민중들은 산나물로 죽을 쑤어 연명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는 것이었습니다. 경허는 사미승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지요.
“뭔 일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꼬여드는고?”
“모르고 계셨습니까? 오늘 법당에서 큰 제사가 있습니다. 읍내에서 제일가는 갑부 강 부자댁 아버지 49재가 있는 날이지요.”
“49재를 올리는데 사람들이 왜 몰린단 말이냐?”
“아이 스님두, 큰 제사가 벌어진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졌으니, 제사 지낸 후 혹 제사떡이나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하는 그 길로 바로 법당으로 올라갔습니다. 부잣집 제사상답게 떡과 과일이 엄청 푸짐하게 잘 차려져 있었고 그 법당 문앞에는 굶주림에 지쳐 누렇게 뜬 얼굴들이 마른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지스님 태허는 경허를 들어오라 하여 같이 재를 올리자고 했습니다. 이때 경허는 바구니를 들고 들어가 제사상에 있는 떡과 과일을 몽땅 남김없이 바구니에 쏟아 부었습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경허는 바구니에 쓸어담은 과일과 떡을 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을사람들과 아이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습니다.
“세상에 이 무슨 미친 짓인고! 아버지 제사상을 망치다니!”
강 부자는 노발대발 경허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경허는 준엄하게 외칩니다.
“제주는 들으시오. 도대체 49재는 누구를 위해 올리려 했던 것입니까?”
“허허, 그것도 모르고 훼방을 놨는가? 우리 아버님 49재란 말이오. 우리 선친!”
경허는 차분하고 권위 있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바로 그렇소이다. 돌아가신 아버님 망자께서는 49일 동안 중유(中有)를 떠돌다가 오늘 바로 이 순간 시왕님 앞에서 심사를 받습니다. 귀한 생명을 죽이지는 않았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지는 않았는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나눠주었는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어르신께서 생전에 그런 공덕을 많이 쌓으셨는지는 모르겠으되 삼악도(三惡道, 지옥도ㆍ아귀도ㆍ축생도)에 떨어지지 아니 하고 극락왕생케 해달라고 자손이 비는 제사를, 굶주린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키고 있는 그 앞에서 올릴 수는 없는 일, 살아서 못다한 보시공덕, 이제라도 베풀고 제사를 올리는 것이 아버님을 위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49재: 윤회사상과 적선지가, 향아설위
경허의 말에 강 부자는 감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허의 말은 진정성이 배어있어 타인을 설득하고 굴복시키는 힘이 있었지요. 빈 제사 상에 울려퍼지는 독경소리는 더욱 그윽하고 성스러웠습니다. 49재를 기쁜 마음으로 올리고 난 강 부자는 경허에게 시주를 위해 돈보따리를 내어놓았습니다.
“대사님 법문 덕분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극락왕생하시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 보답으로 시주를 더 내놓고 가겠습니다.”
“절간에 재물이 쌓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외다. 이 돈으로 인근 30리 굶주린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시는 것이, 훗날 강 선생님께서 극락왕생하시는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사님, 저도 이 천장사 부처님께 시주를 해서 복을 좀 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은 이 천장사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머슴살이 하는 김 서방, 이 서방, 농사짓고 사는 박 첨지, 서 첨지, 이들이 다 부처님이오이다. 못 먹고 못 입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과 똑같은 것, 머슴이나 하인이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시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불공입니다.”
49재란 원래 인도에 있던 습속이 아닙니다.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불교의 윤회사상과 유교의 조상숭배(ancestor worship)사상이 절충된 것입니다. 인도 본래의 사상에서는 윤회의 업보는 오직 그 개인 본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죠. 따라서 자손의 효행에 영향을 받을 수도 없고 또 그 업보가 후손에게 전가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런 개인주의는 너무 차가워서 별 재미가 없어요. 공동의 업보와 공동의 윤회가 게마인샤프트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적인 동양문화권에서는 더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죠. 『주역』 곤괘 「문언」에 있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는 집안에는 그 집안 전체에 좋은 일이 넘친다)이라는 말이 그러한 관념을 대표하지요.
여기 경허의 말은 기실 동시대의 사상가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와도 상통하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경허의 형님이나 모친의 입장에서는 강 부자의 시주금이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마는 경허의 태도는 근원적으로 반체제적, 반제도권적(anti-institutionalistic)이라고 말할 수 있죠.
법문과 곡차
그의 제자 만공이 전하는 얘기가 이런 맥락에서 참 재미있습니다. 천장사에 어떤 사람이든 스님을 찾아와서 간곡히 불법(佛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그대로 앉아 있고 일체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곡차를 가져와서 올리면 곡차를 자시고 난 후에는 종일이라도 법문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만공이 손님들이 간 후에 스님께 항의했습니다.
“스님은 항상 만인평등을 가르치시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경허 스님의 대답은 천하의 명언이었습니다. 만공의 생애를 지배하는 일언이었지요.
“아이 이 사람아! 법문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짓이지, 맨 정신으로는 할 게 못 돼!”
만공은 이 말씀에서 불법의 깊이를 득파하였다고 합니다.
묘령의 여인과 경허
이제 마지막으로 한 소식만 더 하고, 나도 이 버거운 깨달음의 이야기들을 벗어날까 합니다.
동학혁명의 열기도 가라앉고, 해월이 교수형을 당한 무술년(1898) 겨울 어느 날, 찬바람이 무섭게 불어제치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저녁 무렵 천장사를 찾아든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자기로 감싼 이 묘령의 여인은 두 눈만 보일 듯 말 듯 내놓은 채, 그 초라한 행색이 걸인에 다름없었습니다. 경내를 몇 번 살피다가 두리번거리더니 경허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 밖에 누가 왔느냐?”
“여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경허가 방문을 여니 여자는 온몸을 떨며 서있었습니다.
“스님 제발 저를 방안으로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아요. 스님.”
경허는 선뜻 방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합니다. 그런데 시봉을 들던 사미승이 그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눈이 솔방울만 해져서 만공에게 달려갔습니다.
“스님 스님 저 좀 보십시오.”
“뭔 일이냐? 조실스님께서 날 찾으시든?”
“그게 아니옵고 ……”
“그럼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이 말씀을 드려야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출가한 수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여색이요 애욕이며, 수도의 가장 무서운 장애가 성욕이라는 것은 초기 승단의 계율로서 대대로 강조되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묘령의 여인이 경허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이는 결코 불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어서 말해보도록 하여라.”
“저어 ~ 조실스님 방에 손님이 한 분 들어가셨는데요. 실은 그 손님이 좀 이상한 손님이라서요.”
“이상한 손님이라니 그게 뭔 말이냐?”
“여자분이십니다.”
“뭣! 여자?”
“쉿, 조실스님 방에까지 들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냐? 틀림없이 보았단 말이냐?”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죠. 치마를 입고 얼굴은 보자기로 가린 젊은 여자였습니다.”
“네가 뭘 잘못 봤겠지. 설마 조실스님께서 여자를 방에 들이시기야 하겠느냐?”
“못 믿으시겠거든 직접 가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 것이다.”
만공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경허의 방으로 살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였습니다. 인기척에 민감한 경허가 먼저 소리칩니다.
“밖에 누가 와있으렷다!”
“소승이옵니다. 손님이 오신 것 같다기에.“
”내 그러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었다. 가까이 오너라.”
“예. 차라도 끓여 올릴까요?”
“차는 필요없다. 빨리 저녁상을 봐와야 할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스님.”
“그리구 내가 미리 일러둘 것이 있으니 명심해서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분부만 내리십시오.”
“내가 따로 허락하기 전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 것이며, 방문 앞에서 기웃거리지도 말 것이며, 방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엿듣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라.”
“스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공양상이 준비되었거든 방문 앞에 놓고 돌아갈 것이요, 매일 아침상은 겸상으로 차려서 가져와야 할 것이니라.”
“하오면 스님, 손님께서는 오늘밤 여기서 묵고 가시게 되옵니까?”
“그러기에 아침공양을 준비하라 이르지 않았느냐?”
“아, 죄송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엄히 분부하는지 짐작을 하겠는가?”
“그저 조실스님 분부대로 지키기만 하겠사옵니다.”
“내 방에는 지금 젊은 여자가 손님으로 와있느니라. 그리 알고 내가 이른 대로 어김 없이 시행해야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제자 만공은 경허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술을 드시지 않나, 아무 앞에서나 옷을 훨훨 벗어던지시질 않나, 이번에는 또 여색까지 범하실 모양이니 대체 이를 어찌 하면 좋단 말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계율을 파하는 경허의 파격은 너무 과격하여 만공의 탄식은 깊어만 갔습니다. 경허가 여자를 방에 들여놓고 여러 날이 지나자, 자연 절식구들이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였습니다.
“조실스님, 아침 공양상 갖다 놨습니다.”
“알았으니 거기 놓았거든 물러가 있어야 할 것이니라.”
“조실스님 ―”
“내 말이 들리지 않았느냐?”
“잘 듣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애당초 내가 이른 말을 벌써 다 잊었단 말인가?“
“하오나 스님, 주지스님의 저 독경소리가 들리지 않사옵니까?”
“독경소리가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
“조실스님 방에 여자가 있다는 것을 주지스님도 알고 계십니다. 주지스님만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중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잘하는 짓들이구나! 기왕이면 홍주는 물론 호서 일대에 소문을 쫘악 퍼뜨리지 그랬느냐, 천장사 경허가 망령이 들어 계율을 어기고 여색까지 탐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오나 스님.”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스님께서 노여워하실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조실스님께서 아무리 경계를 넘으셨고 무애의 만행을 하신다 해도 이번 일은 백번 지나치신 것 같사옵니다.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만공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경하는 여자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열흘이 지나자 제자들은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여 분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님 스님 큰일났습니다.”
사미승이 달려와 애원하듯 경허를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큰일났습니다. 대중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방안에 있는 여자를 내쫓지 않으면 조실스님까지 내쫓겠다고 합니다.”
“여자를 내치지 않으면 날 내쫓겠다고?”
경허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대중들이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만공이 경허에게 간곡하게 청합니다.
“스님 제발 부탁이오니 이제 그만 여자를 밖으로 내치시옵소서.”
“그래 내치지 않겠다면 날 이 절에서 내쫓겠다?”
“그러하옵니다. 스님.”
어느새 몰려든 제자들 중의 한 명이 경허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그
묻는 태도가 여간 당당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조실스님이시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술 마시는 것만 해도 파계행위이거늘 이젠 여색까지 범하시다니 세상에 이게 출가사문이 할 짓입니까?”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경허는 제자들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방안에 있던 묘령의 여자, 바로 그 여자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응~ 바로 이 여자였구만 그래! 응~”
대중들은 혀를 차며 웅성거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스님네들, 제가 바로 스님 방에서 열흘 넘게 신세를 진 바로 그 여자이옵니다.”
경하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습니다.
“내가 지은 복이 이것밖에 되질 않으니 면목이 없소이다.”
“아니옵니다. 스님! 제가 열흘 동안 스님께 입은 은혜는 제 생애에서 다 갚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경하는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툇마루에 서있던 여인은 머리에서부터 덮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보자기를 벗겨 내렸습니다. 그 순간, 앗차, 그 여자의 문드러진 코와 이지러진 눈썹이며 짓무른 살은 형체를 분간키 어려웠으며 손가락도 다 뭉그러져 있었습니다. 나병 말기환자였던 것입니다. 여자의 곁은 심한 악취로 인해 아무도
다가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스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니이까?”
여자를 내쫓고자 몰려온 제자들은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몹쓸 병에 걸려 얼굴도 짓물러 터지고 코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뭉개져버린 이런 여자입니다. 춥고 배가 고파 구걸을 나가도 모두 더럽고 징그럽다고 기피할 뿐 어느 누구도 찬밥 한 덩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스님 방까지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 언 몸을 녹여주시고 밥을 손수 먹여주셨으며 냄새나는 고름과 진물을 닦아주셨습니다. 평생 이런 호강은 처음입니다.”
말을 하던 여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스님, 저 세상에 가서라도 이 큰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며 천장사를 떠난 뒤 제자들은 경허의 방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자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방문이 열리고 경허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손에는 주장자(柱杖子), 등에는 걸망 하나 걸머진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이 어리석은 중생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인연 없는 중생은 백년을 함께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스님, 떠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스님 저희들이 미망에 사로잡혀 잘못했사오니 차라리 저희들을 죽여주시옵소서, 스님!”
애처롭게 땅바닥에 무릎 꿇고 비는 제자들의 회한도 스님의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이렇게 천장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상 경허에 관한 기술은 내가 많은 책을 참고하였지만 다음의 3권만은 언급해두어야겠다.
1. 윤청광 지음, 「BBS 고승열전 11. 경허큰스님』, 서울: 우리출판사, 2011.
2. 일지 글,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서울: 민족사, 2012.
3.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鏡虛法語』, 서울: 인물연구소, 1981.
경허의 대화구성에 관하여 나는 윤청광 선생의 책을 많이 활용하였다. 매우 명료하게 그 맥락을 잡아 설명한 그의 언어는 사계에 공헌한 바 크다 하겠다.
그러나 경허의 삶에 관해서는 어차피 정밀한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의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부기해둔다. 일지는 나의 애제자였는데, 그만 46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였다. 해맑은 그의 웃음과 얼굴이 항상 나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정밀한 학식의 소유자였고 선의 경지도 비범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한다.
만공과 동학사 야간법회
경허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설 속에서 시비ㆍ포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포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경허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경허라는 한 인간의 개별적 이야기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표하는 시대정신(Zeitgeist), 한국불교의 새로운 분위기, 그 심오한 선풍(禪風)의 클라이막스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공이 동학사에서 진암 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이때 경하는 동학사를 떠나 천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허는 진암 노스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어린 만공은 9척 거구의 경허 스님을 처음 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동학사에서 야간법회가 있었습니다. 본방 강주스님인 진암이 먼저 설법했습니다.
“나무도 삐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은 그릇이라야 쓸모가 있을 것이며, 사람도 마음이 불량치 말고 착하고 곧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는 다음에 경허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본방 강주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듯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치 못한 사람은 그대로 착하고 성실함이 있느니라.”
어려운 한문 문구를 현란하게 활용하지 않아도 아주 소박하게 그 명료한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경허의 법문은, 그가 조선왕조를 지배하고 있었던 주자학의 권위주의, 그리고 유교에 아주 깊게 배어 있는 윤리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불교의 경직된 계율주의를 얼마나 본질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잘 말해줍니다. 이것은 그가 선의 경지를 말하기 전에 이미 철저한 근대정신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구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경허의 정신세계는 차라리 유교 이전의, 불교 이전의, 우리민족 고유의 발랄한 정신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운 최치원이 말한 ‘풍류(風流)’라고나 할까요.
더욱이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법문을 들은 진암 스님이 오히려 자기의 행자 만공을 이 나라 불교계를 위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만한 재목이니 나보다는 당신 밑으로 가야한다고 하면서 경허에게 만공의 지도를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자기를 그 자리에서 묵사발 낸 스님을 존경하여 애제자의 미래를 부탁하는 그런 큰 아량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만공은 1884년 12월 8일, 천장사에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화상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고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경허의 선풍이 20세기 조선불교를 지켰다
경허라는 존재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조선왕조가 하나의 문명체로서 그 유기체적 수명을 다해가는 그 처참한 쇠락의 폐허에서 피어난 화엄(꽃)이라는 데 있습니다. 1910년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제령 7호(총독부령 83호)로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반포하였습니다. 경허는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시적(示寂)하였습니다. 그 뒤로 한국불교는 30개의 본ㆍ말사체계로 개편되면서 조선총독부의 행정체계 하에 소속되었고 대처가 장려되었습니다. 한국불교를 근원적으로 왜색화시키려는 다양한 조처가 취해졌지만 크게 생각해보면 겉모양상의 변화와는 달리 그 내면의 불교정신은 일제강점시대를 통해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문화계의 각 방면을 평심하게 형량하면 학문, 예술, 경찰, 군대, 상업, 기업 그 모든 분야가 왜색에 도배질당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만, 불교문화는 크게 왜색화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구한말 시기에 경허의 문하에서 만공월면(滿空月面), 한암중원(漢巖重遠), 혜월혜명(慧月慧明), 수월음관(水月音觀), 침운현주(沈雲玄珠) 등, 수없는 대덕이 쏟아져 나왔고, 그 법하(法下)에서 선교 양면을 수학한 무수한 제자들이 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시절에도 그 고매한 정신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일본승려라 할지라도 경지의 지고함은 존경할 줄 알았으며, 경허의 문하생들의 선풍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허의 훈도는 호서ㆍ경기ㆍ강원도ㆍ이북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경허는 해인사ㆍ송광사ㆍ범어사와 같은 남쪽의 대찰에도 정신적 기둥으로 주석하면서 강풍(講風)을 바로잡았습니다. 범어사의 선원도 경허가 1900년에 창설한 것입니다. 만공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의식적으로 왜색불교화를 저지하는데, 일본총독들을 꾸짖어가면서 그 도력을 발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정화운동(1954~62)의 한계
사실, 해방 후에 이승만정권이 종교를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저질스러운 짓들을 많이 하면서 오히려 기독교, 불교가 다 같이 망가져갔습니다. 청담이나 성철 스님으로 대변되는 불교정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그 내면에 ‘봉암사결사’와 같은 훌륭한 정신도 있었지만 결국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불교계의 자생적 자정 노력이 펼쳐지지 못한 채, 공권력의 폭력에 의존케 됨으로써 결국 파행적인 해결책만 도모되었고, 불교정신 자체의 타락만 초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총무원장이라는 권좌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저열한 스님들의 행태에까지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 내가 ‘진짜 중’이라는 말 한마디의 의미를 풀려고 했다가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이제 그 의미를 말해보도록 하죠. 내가 말하는 ‘진짜’는 ‘가짜’와 대비되는 상대어가 아니라, ‘분위기’를 지칭하는 비근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진이라는 인간에게는 그를 중다운 중으로 만들어주는 분위기의 특수한 훈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분위기의 혜택을 받은 자가 한두 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중’은 명진 말고도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근세를 통하여 익숙한 이름들, 만해, 춘성, 효봉, 경봉, 운허, 월운, 청담, 성철, 탄허, 전강, 송담, 숭산 행원, 가산 지관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이런 분들은 학식이나 경지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산에서 경허로 이어지는 조선불교의 대맥을 ‘분위기’로서 체화시킨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대학 나와서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사람들과는 체험의 층차, 그 분위기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60년 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찰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철도청 촉탁의사를 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전 가족이 대절 전용기차를 타고 한국의 유명 사찰을 유람하는 매우 특별한 기회를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1950년대에 화엄사, 불국사, 통도사 등의 대찰을 순례하는 기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1960년대에 동진출가(童眞出家)를 하여 유수한 대찰 강원의 엄숙한 과정 4년(사미과沙彌科,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이라도 제대로 마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조선불교의 정통적 분위기를 맛본, 그 혜맥의 끝자락 세대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든지 남아라고 한다면 한번 출가의 꿈을 꾸는 그런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나도 그런 로맨스에 젖어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명진의 이야기
기실 나는 명진의 삶의 일대기에 관해 자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구요. 성인으로 만나 생각이 통하고, 인품의 질감을 통해 교제하는 것뿐이지요. 명진에게는 당대의 여타 스님과는 달리 강렬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중이라 하면 쉽게 ‘도 닦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가치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아는데, 명진은 근원적으로 ‘도를 닦는다[修道]’하는 것을 공동체적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동의 사회적 선(Common Good)을 위하여 자기를 내던지는 일상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요.
명진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핏 경상도 액센트가 강한 것처럼 들리는데, 기실 그는 충청남도 당진(唐津) 신평면(新平面)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차여차 해서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다녔다고 합니다. 6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해요(당시는 초등학교를 다 ‘초등학교’라고 불렀음). 그리고는 다시 여차여차 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당진 송악면에 있는 송악중학교(松嶽中學校)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그만 젊은 여인을 사랑하는 상사병에 걸리고 맙니다. 이 젊은 여인, 당시 24세의 아리따운 얼굴과 정숙한 몸매를 지닌 이 여인은 누구였을까요? 불행하게도 이 여인은 송악중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어선생님이었습니다. 매일 밤 이 선생님을 사모하여 잠 못 이루게 된 명진은 꾀를 하나 냈습니다. 명진은 이 새로 부임한 여선생님이 당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장선생님 사택 한 귀퉁이에 방을 얻어 세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선생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자! 그 집 문깐에 편지를 집어넣으면 선생님은 반드시 편지를 읽어보실 것이다!’
그래서 명진은 용감하게 붓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저는 커서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제발 저의 이러한 생각이 허황되다 생각하여 무시하지 마시고 꼭 기다려주십시요,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선생님을 부인으로 맞아 모시고 평생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 프로포즈를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정말 황당하고 또 황당한 편지이지만, 명진은 결코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순결하게 사랑하니까 그런 용기가 솟구친 것입니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의 부인 브리지트가 24년 8개월 연상이라는 것, 그리고 고교 시절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뭐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1960년 우리나라 일반윤리관념으로 생각하면 좀 기특(奇特, 기이하고 특별한)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객지에서 불현듯 접한 영어선생님은 닭살이 돋았습니다. 좀 공포스러웠습니다. 인생체험이 부족한 젊은 여선생이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 갑자기 맞부닥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여유 있게 형량하자면, 결코 공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한기중(명진의 속명)이라는 학생의 행위는 황당하기는 해도 폭력적인 사태는 아닙니다. 그리고 문제의 테마가 ‘사랑’이고, 사랑은 표현이 가능하고 또 거절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명진을 불러다가 조용히 타이르고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녀인 여선생은 어쩔 줄을 모르고, 또 말날 것 같아 타인에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자기와 좀 말을 나눌 수 있었던 같은 학교 체육선생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육선생은 이 여선생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보는 순간 한기중이 학생이 아닌 연적으로 비화되어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체육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이지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체육선생님은 한기중을 교무실로 부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기중이를 때립니다.
“야 이 새끼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게 뭐야! 선생님에게 이런 편지를 써! 너 정신이 있는 놈야!” 하면서 무식하게 사정없이 패는 것이었습니다.
한 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는 달콤한 꿈에 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이 따귀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는 사태였습니다. 그리고 체육선생이 생각치 못한 것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선생님에게 결혼프로포즈의 편지를 보낼 정도라면, 결코 그런 학생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학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진은 이미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고, 인간의 극한상황에 대한 체험이 있고, 명철한 가치판단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 체육선생의 폭력은 합리적인 수수(授受)가 아닌 일방적인 이유 없는 폭력이었습니다. 명진은 참을 수 없었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의 말대로 화가 치밀어 오른 명진은 가차 없이 체육선생의 따귀를 세차게 맞받아쳤습니다. 아무리 어리다한들, 세파에 시달린 명진의 주먹은 용서 없이 얼떨떨한 체육선생의 급소를 찌르고 들어갔습니다. 따귀대회에서 명진은 완벽한 승자였습니다. 이 사태는 목격자들이 있었고 당연히 학교 전체의 토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이런 사태가 논리적인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인 해결에 도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에 대한 일방적인 징계가 있을 뿐이죠.
어린 학생은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약자’ 였습니다. 한기중에게 퇴학의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명진은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명진은 체육선생을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연적으로서 때린 것이고, 영어선생님에게도 사랑을 표현한 것 외에는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명진은 다음의 작전을 전개합니다. 명진은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잡화상을 하고 있는 친척집에 가서 석유통을 구해 가득 석유를 채워 담고, 그것을 멜빵으로 등에 지었습니다. 석유통을 멘 채 교장선생님 방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선생님, 저는 무례를 범했을지는 모르나 따귀를 맞을 정도로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체육선생님이 저를 전후 사정 없이 다짜고짜 때린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저를 퇴학시키시겠다면 저는 이 석유로 모든 것을 불사르겠습니다. 저는 어차피 인생을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와 같이 불타 죽을지언정, 이런 징계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는 시골에 씨씨티비도 없고 파출소 인력도 없고, 밤에 누가 학교에 혼자 와서 무슨 짓을 한다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교장선생님은 매우 합리적이고 여유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는 결코 폭력적인 처벌로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는 교육자적 양심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가 불타는 사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명진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명진은 어렸지만 삶의 비애를 너무 깊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명진을 다독였습니다.
“그래! 너를 일방적으로 체벌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어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체육선생님께 대든 것 또한 무례한 행동이며,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너도 응분의 벌을 받아야겠지.”
결국 퇴학은 취소되었고, 정학 3일의 가벼운 벌로써 이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명진은 계속해서 학교를 잘 다녔고 무사히 졸업을 했습니다.
명진과 얘기를 하다 보면, 하루종일 이런 얘기가 그의 입에서 쏟아집니다. 어떤 때는 다 들어주기가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얘기를 그에게 처음 들었을 때, “야~ 이거야말로 우리의 비근한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진짜 공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든 의식의 흐름에는 경허 선사의 슬픔이랄까, 그 우환의식이 가물가물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명진이 19세 때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하기 이전의, 불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명진과 같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닥친 실존적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자세의 비범성이나 과단성 같은 것에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 중학교 시절의 명진 스님.
마조와 은봉
지앙시(江西)의 어느 절, 비탈길, 어느 젊은 스님이 손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 비좁은 비탈길 아래 켠에 거대한 체구의 노장 조실스님이 다리를 뻗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수레를 몰고가면서 황망히 외쳤습니다.
“스님! 스님! 수레가 내려갑니다. 비키세요! 뻗은 다리를 오므리시라구요[청사수족請師收足]!”
조실스님이 눈을 번뜩 뜨면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이! 한번 뻗은 다리는 안 오무려[이전불축已展不縮].”
그러자 젊은 스님이 외칩니다.
“한번 구른 수레는 빠꾸가 없습니다[이진불퇴己進不退].”
아뿔싸!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조실스님의 발목을 깔아뭉개고 말았습니다. 딱 부러진 발목을 질질 끌고 법당에 들어간 조실스님, 거대한 황소 같은 체구에 호랑이 같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 대며 나오는 손에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이는 큰 도끼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바라가 울리고 대웅전 앞 뜨락에 대소 스님들이 총집결, 엄숙히 대열을 정돈했습니다.
“아까 어떤 놈이냐? 이 노승의 다리 위로 수레를 굴려 발목을 부러뜨린 놈이! 나와!”
이때 젊은 스님,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늠름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와 조실스님 앞에 무릎 꿇고 가사를 제낍니다. 그리고 목을 푸른 도끼칼날 앞에 쑤욱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 긴장이 감도는 순간, 노승의 얼굴엔 인자한 화색이 만면, 도끼를 내려놓았습니다(이상은 내 책, 『話頭, 혜능과 세익스피어』 pp.119~120을 참고할 것).
뭔가 명진의 이야기와 좀 통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들은 뭔 지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기 조실스님은 바로 중국선종사의 거봉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남악회양南嶽懷讓의 제자. 마조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남전南泉이고 남전의 제자가 그 유명한 조주趙州이다)을 가리킵니다. 젊은 스님은 오대산(五臺山) 은봉(隱峰), 마조의 139인 입실 제자 중의 한 명이죠. 마조는 퍽 너그러운 선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은봉의 객끼를 인가해준 셈이니까요.
▲ 성철 큰 스님이 명진 스님의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사진.
안거
‘안거(安居)’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문자 그대로 ‘편안히 거한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낸다는 뜻입니다. 사실 초기 인도불교승단에서는 6월 초부터 9월까지 약 3ㆍ4개월 동안 몬순기(monsoon期, 남서 계절풍이 부는 인도의 우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한 곳에 정주(定住)하여 수행에 전념토록 한 승단의 법규를 의미했습니다. 비가 내리면 저지대에 있는 개미, 파충류들이 모두 고지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수행자들이 유행(遊行)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거는 본래 우안거(雨安居)였고, 이 우안거는 여름 한 철의 하안거(夏安居)밖에는 없었습니다. 동안거(冬安居)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의 추운 지대로 불교가 전파됨에 따라 추운 지방에서는 동안거의 의미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돌아다니는 것이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한대지역인 중국ㆍ한국ㆍ일본에서는 동안거를 설안거(雪安居)라고도 부릅니다. 안거는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수행을 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변천되어 갔습니다. 여름 90일, 겨울 90일 동안 지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죠. 그래서 그 결투의 시작을 결제(結制)라 하고 그 결투가 끝나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합니다.
해인사 반살림
그런데 이 90일간의 싸움기간 동안의 한 중간이 되는 45일을 ‘반살림’ 또는 ‘반결제’ 라고도 부릅니다. 그때에는 시작이 반인데 이미 반을 잘 채웠으니 나머지 기간도 아무런 마장(魔障)이 없이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큰 행사를 합니다. 성찬을 준비하여 대중공양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방장스님께서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대의 해인사 총림 방장스님은 성철(性徹, 1912~1993, 경허 스님 돌아가신 해에 태어남)이라는 분이었는데, 해방 후 정화운동과정을 통하여 한국불교, 특히 비구승단의 중심점이 되신 분으로 엄청난 권위를 축적해온 거목이었습니다. 학인들은 감히 궐내에서 고개 들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서슬퍼런 존재였습니다.
법문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웅전 앞마당 삼중석탑(三重石塔)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기다랗게 서있는 강당(講堂)인 궁현당(窮玄堂: 신라시대 동호대사東護大師가 강법지당講法之堂으로서 시창始創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시말은 알 길이 없고, 중수기에 의거하여 이 건물이 성종成宗 21년, 1490년에 학조대사學祖大師의 감독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3동 80칸으로 293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다. 실제로 해인사의 추요樞要라고 상량문에 쓰여져 있다)이었습니다. 당시 동안거였기 때문에 바닥이 따뜻한 궁현당을 사용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나오실 때는 해인사 역내의 비구ㆍ비구니가 다 모이고 또 재가신도들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500여 명 가량이 꽉 들어찬 장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죽비가 쳐지고 입정하면서 법상에 올라앉은 성철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 액센트(경남 산청 사람)에 짙은 한문투의 문구로 이루어진 말들을 쏟아냅니다. 이때 법거량(法擧揚, 법의 경지를 겨루어보는 말싸움)을 작정한 명진이 대중 속에서 불쑥 일어나 성철을 향해 외칩니다.
“저 놈의 성철의 모가지를 한 칼에 쳐서 현당 밖 마당에 내던지면 그 죄가 몇 근이나 될꼬?”
참으로 과격한 언사입니다. 그러나 당시 28세였던 명진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죠. 아무도 감히 성철의 모가지를 칠 생각은 못했으니까요. 명진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는 성철의 답변에 대한 논리적 반박문구들을 몇 초식(招式)은 미리 준비해두었을 겁니다. 그러나 명진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한학의 밑천이 딸렸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문투는 시적(詩的)이고, 한글투는 산문적이라는 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시적이라는 것은 논리적 전개를 절단시킨다는 것이죠. 이러한 시적 대응에 명진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죠.
퇴옹 성철은 이러한 사태에 매우 노련했습니다.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우선 명진은 이 간결한 말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이얀 백골들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는 뜻일 텐데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떨어진 모가지가 산같이 쌓였다는 뜻으로, 조사들의 잘린 모가지가 이미 산처럼 쌓여있는 데 네가 뭘 또 다시 내 모가지를 치겠다고 까부느냐 뭐 이 정도의 뜻이겠죠. 그러나 의미를 따지려고 들면 이미 지는 것입니다. 비논리적인 명제를 논리적으로 대응하려는 순간 이미 경지의 얕음이 폭로되는 것이죠. 아마도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야 이 새끼야! 너 죽었다”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도올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응구했을 것입니다.
“백골이귀공(白骨已歸空)인데 하운산(何云山)이리오?”
(백골은 이미 공으로 돌아갔는데 어찌하여 산을 말하는고?)
혹은
“흑골파산(黑骨破山)”
(흑골이 산을 깨버렸다)
하여튼 말이 안 되는 말을 계속 씨부렁거려대면(한문으로 끝없이 대구를 만들 수 있으니깐요) 아마 성철이라 한들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 답변을 준비했던 명진의 초식은 일시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뜻뜻 머뭇거리는 명진에게 성철은 욕지거리를 퍼붓습니다.
“저 놈은 행자시절부터 목청을 높이더니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만 도모하고 있구나……”
한마디로 명진은 대중 앞에 ‘좆돼불은’ 것이죠. 그러나 명진은 계속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나 성철은 다시 명진 앞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성철은 명진을 행자 때부터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진이 해인사를 떠난 것을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명진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명진다웁게 발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너그러운 교육의 방편을 가지고 있었던 스님은 아니었습니다(해인사의 역시 큰 스님이신 가산 지관 스님께서는 나에게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명진의 그릇됨이 “대단하다”라고 말씀하셨죠. 나중에 가산 스님은 총무원장 소임을 맡게 되자 명진을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셨습니다).
성철 스님의 입장
성철은 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서 계율적인 엄격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경허 - 만공계열의 선풍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막행막식이 새로 태어나는 순결한 비구종단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가 1947년 봉암사결사를 묘사한 글을 보면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이었습니다. 즉 근본목표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성찰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매우 고귀한 측면이 분명 있고, 정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줄기 순결한 빛줄기로서 큰 효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철 본인이 부처님 법의 진면목을 대중화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성철은 수행승으로서의 철저함이 있고 교학불교에도 탁월한 실력이 있는 거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그를 권위주의적 아상(我想) 속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성철 스님 본인에게도 근원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부처님 법’의 사회적 맥락을 보다 개방적으로보다 철저하게 이해했어야 했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선불교가 아니라 통불교이다
내가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에 관해서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제 함구불언(緘口不言)하려 합니다. 내가 얘기하려 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문벌싸움, 일종의 불교종파주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계에서 도를 닦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소개하고 싶었고,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이야말로 당ㆍ송의 불학을 뛰어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과 가치와 느낌의 결정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새로운 정신사적 활로라는 것을 이 조선땅의 미래세대들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내가 택한 불교의 진리체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서의 서론이 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론인 『반야심경(般若心經)』으로 직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선사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 우선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선불교’(일본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Zen Buddhism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영역할 때 Seon Buddhism이라고 해야겠죠)라는 말자체가 알고 보면 매우 이상한 개념입니다. 불교면 그냥 불교이지, 선불교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종’이라는 종파가 중국 당나라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실제로 선종의 본래면목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것은 조선불교일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 불교다운 불교가 점점 인멸하여 지금은 그 진면목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불교를 선종이라는 종파적 의식 속에서 바라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불교의 원래의 모습을 통째로 보전한 ‘통불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허 같은 사람이 고뇌하고 있는 것은, 훌륭한 ‘선사’가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단지 불교가 가르쳐준 근본 진리를 통해 참다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아주 보편적이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인간학의 과제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이라는 것이 무슨 종파의 으뜸 원리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종의 진리는 붓다의 언어적 가르침과는 별도로 전해내려온 진리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선종의 진리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파악되지 않는다. 문자를 세우지 마라), 직지인심(直指人心, 수많은 경전을 읽을 생각 말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라), 견성성불(見性成佛, 사람의 본래 성품을 보기만 하면[드러내기만 하면] 너는 곧 부처가 된다)의 4구를 기인(旗印)으로 내걸고, 조사들의 공안을 자신의 심지를 단련시키는 깨달음의 열쇠처럼 숭앙(崇仰)하고, 좌선(坐禪)에 몰두하는 집단을 우리가 ‘선종’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불교와 선, 삼매, 요가의 뜻
선불교는 물론 인도불교에 없는 개념이고, 인도불교사에는 선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한 적이 없습니다. 기실 선불교라는 것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점점 중국적인 풍토와 언어와 심성, 그리고 사회적 여건에 적응하여 간 종국에, 다시 말해서 인도불교의 중국화과정 (Sinicization process)의 정점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불교의 모습일 뿐이죠. 불교의 변화상(變化相)일 뿐이죠. 산문적인 불교가 운문적인 불교로, 논리적인 불교가 초논리적 불교로, 논술적인 불교가 시적인 불교로, 다시 말해서 산스크리트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가 고전중국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로 변해가는 과정의 극단적 사례가 선불교의 제반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禪)’이라는 말은 본래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닙니다. 댜나(dhyāna, 산스크리트어), 자나jhāna(팔리어)의 음역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원래 ‘선나(禪那)’라고 썼던 것인데, 약해서 ‘선’이라 한 것이죠.
댜나라는 것은 뭐 특별한 제식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명상’ ‘정신집중’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심신을 통일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역(意譯)할 때는, ‘정려(靜慮, 고요히 사색한다)’, ‘정(定, 마음을 한 군데로 정한다)’, ‘사유(思惟, 생각한다)’, ‘수정(修定)’ 등의 단어가 쓰였습니다. 정려, 집중, 정신통일과 같은 의미로 쓰는 말이 바로 ‘삼매(三昧, samādhi, 삼매도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일 뿐, 그 자체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뜻으로 하면 ‘세 가지 우매함’이 되는데 전혀 가당치 않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이나 ‘삼매’는 그냥 비슷한 옛 인도말입니다.
그리고 또 비슷한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가(yoga)’라는 말이지요. 우리나라에 ‘요가’는 아주 흔한 운동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를 하시겠네요. 요가는 한자로 ‘유가(瑜伽)’라고 음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요가는 ‘매듭짓는다’ ‘묶는다’라는 뜻의 동사 ‘유지(yuj-)’에서 파생된 말인데 그것은 결국 해탈을 향한 깨달음의 수련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묶는다.’ ‘마음을 결속(結束)시킨다’는 뜻이니까 ‘심신통일’ ‘정신집중’ 등의 말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요가’를 초기불교교전에서는 ‘상응’이라는 말로 의역했습니다. ‘상응’ 이란 ‘서로 감응한다’는 뜻이니까, 그것은 대상세계(불교에서는 ‘경(境)’이라 한다)와 나의 마음이 하나로 융합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정력(定力: 집중하는 능력. 마음을 정하는 능력이 자유자재롭다는 뜻)이 자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자면, 선이니 삼매니 요가니 하는 말들이 뭐 대단히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니라 ‘정신집중’ 정도의 아주 비근한 인도말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요가수행을 강조한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ara)’라는 학파가 있는데 그 학파가 중국에서는 ‘유식파(唯識派)’로 불리게 됩니다. 바로 요가수행은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고양시키는가 하는 전식성지(轉識成智, 인간의 의식을 전환시켜 궁극적 지혜에 도달케 한다.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도 함)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요가수행은 인간의 의식의 분석으로 심입(深入) 했습니다.
법상종과 댜나의 음역 속에 겹친 속뜻
그리고 이 학파는 법의 본질(性, 성)을 다루지 않고 법이 드러나는 의식의 현상(相, 상)을 다루기 때문에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제 말이 다시 너무 학술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만, 겉으로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요가행파’ ‘유식종’ ‘법상종’은 거의 같은 말이라고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법상종(유식종)에 의하여 아주 복잡한 불교 인식론이 만들어졌고, 선의 궁극적 의미도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을 이해해야만 확연하게 풀린다는 것만을 얘기해놓고 넘어가겠습니다. 단순히 선사들의 공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선(댜나), 삼매, 요가 등등은 본시 인도사람들의 생활습관 속에 배어 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그러한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지고한 철학적 경지나 신비한 체험, 혹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만 하는 어떤 실체적 코스모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禪)’이라는 낱말은 그것이 한역(漢譯)되는 과정에서 아주 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아~ ‘선(禪)’은 분명 단순한 ‘댜나’의 음역이며, 음역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랑보(特朗普, telangpu)’라고 음역하는데 ‘특랑보’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못 갖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자고로 음역과 의역을 겹쳐서 말을 만드는 취미가 있습니다. ‘미니스커트’라 말할 때 ‘미니(mini)’를 ‘迷你(mini)’라고 음역했는데 그것은 ‘너를 유혹한다’라는 뜻이 됩니다. 단순한 음역에 자체 단어의 의미를 겹치게 만든 것이죠.
‘선(禪)’은 단순한 음에서 나온 말이지만 중국사람들에게 그것은 본래적으로 매우 신성하고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봉선(封禪)’이라는, 오직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봉은 본시 신성한 산에 지내는 제사였고 선은 제단을 설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선’이라는 글자를 보면 보일 시[示] 자와 단(單)이라는 성부(聲符)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示)’는 하늘의 신령한 기운이 하강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단(單)’은 제단을 의미하는 ‘단(壇)’자와 통합니다. 이 태산 봉선제는 중국황제 중에서도 진시황, 한무제, 당고종, 당현종, 송진종 등 몇 명만이 거행할 수 있었던 지고의 대전(大典)이었습니다. 최초로 댜나를 번역한 사람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 글자를 선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선(禪)’은 우주의 신령한 기운과 감응한다는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선(禪)’이라는 번역은 참으로 깡다귀 좋은 번역이지요. 그래서 선종이 신비로운 기운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특히 선종은 ‘의발전수(衣鉢傳授)’라고 하는 관념이 있어 사승관계의 족보를 엄격히 따지는 문벌의식을 강하게 표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따위 의발수수의 짓거리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죠. 불교를 편협한 종파주의로 휘모는 편협한 짓거리입니다.
교와 선, 이와 사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불교를 선종이니 교종이니 운운하고, 이판(理判, 좌선수행을 주로 하는 선승)이니 사판(事判, 조직운영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이니 하여, 분별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합니다. 불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 방편적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개념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敎)’와 ‘선(禪)’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교종ㆍ선종을 운운하기 전에 불교 그 자체를 고구(考究)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학승은 선경이 높질 못하고, 좌선만 하다가 득도했다 하는 스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고 스님들이 서로서로 비난하는 소리가 잘 들려와요. 선과 교를 분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이런 대립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서산대사나 경허대사나 그런 류의 대덕들이 모두 치열한 선적인 구도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교학불교의 마스터라는 데 있습니다. 지눌도 그러했고, 원효의 시대에는 선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임제 법문의 궁극적 의미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성상태현(性相台賢, 성은 법성法性을 말하며 삼론종三論宗을 의미, 상은 법상法相을 말하며 유식종을 의미, 태는 천태종天台宗, 현은 현수종賢首宗, 즉 화엄종華嚴宗을 의미한다)의 불교경전을 골고루 섭렵하였으며, 그 이전에 이미 유교의 기본경전과 도가의 경전들을 통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책을 읽고 사색한다는 것 자체가 좌선의 용맹정진과 똑같은 삼매(三昧)입니다. 어떻게 지식을 배제하고 높은 선경(禪境)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이렇게 생각해보죠. 선종의 마지막 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이렇게 말했어요
야 이놈들아! 불법이란 본시 힘쓸 일이 없나니라 단지 평상심으로 무사히 지내면 되나니라 너희들이 옷 입고 밥처먹고 똥 싸고 오줌 누고 졸리면 자고 하는 짓이 다 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불법무용공처(佛法無用功處), 지시평상무사(只是平常無事), 착의끽반(著衣契飯), 아시송뇨(屙屎送尿), 곤래즉와(困來卽臥).
임제는 또 말하지요.
이놈들아! 뭘 추구하겠다구, 발바닥이 닳도록 사방을 쏴다니고 있는 게냐?
無佛可求 무불가구 |
원래 너희들이 구할 수 있는 부처라는 게 없는 것이요 |
無道可成 무도가성 |
성취할 수 있는 도라는 게 없는 것이요 |
無法可得 무법가득 |
얻을 수 있는 법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
眞佛無形 진불무형 |
진짜 부처는 형이 없고 |
眞道無體 진도무체 |
진짜 도는 체가 없고 |
眞法無相 진법무상 |
진짜 법은 상이 없나니라. |
이 삼법(三法)은 혼융(混融)하여 하나로 수렴되어 있거늘 이 사실을 분변하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미망의 바다를 헤매는 업식중생(業識衆生)에 불과하도다!
밥 먹고 똥 싸는 것, 졸리면 자곤 하는 것이 선(禪)이다? 이 깊은 뜻을 조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결코 쉽게 넘어가는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임제는 여기서 ‘일상의 삶’, 그 모든 것이 선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는 모든 종교적 환상의 실체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佛)도 없고, 도(道)도 없고, 법(法)도 없다. 그냥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럼 무엇이냐? 그걸 말해보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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