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사법인)
우리는 지금 여기서 선(禪)을 얘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불교의 근본교리, 그 근원적 지향성을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의 교리에 관한 천만 가지 법설이 난무하지만, 나는 여러분께 내가 불교학개론 첫 시간에 배운 누구나 쉽게 접하는 세 마디를 우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특징 지우는 세 개의 인장과도 같은 것, 바로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사실 이 삼법인이라는 것만 정확히 알아도 불교에 관한 모든 논의는 종료됩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해체계에 이 세 개의 도장만 확실히 찍히면 확고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에는 이런 식의 확고한 기준이 되는 법인(dharmoddāna) 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짜, 이단이 난무하는 역사, 그리스도와 안티그리스도, 정통과 이단, 합리와 신비가 대결하는 역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수승(殊勝)한 이해와 미흡한 이해라는 차별은 있다해도, 확고한 법인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포용적인 발전상을 축적해 왔습니다.
이 도장은 보통 3개로 말하여지지만 4개, 즉 사법인(四法印)으로 불릴 때도 있습니다. 사법인 중에서 무엇을 빼서 삼법인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은 또 지역이나 학파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우선 4법인을 다 써놓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1. 제행무상(諸行無常)
2. 일체개고(一切皆苦)
3. 제법무아(諸法無我)
4. 열반적정(涅槃寂靜)
보통 3법인이라 하면 1ㆍ3ㆍ4를 의미합니다만, 남방상좌부불교에서는 4를 빼버리고 1ㆍ2ㆍ3을 불교의 특상(特相, tilakkhaṇa, 특별한 모습)이라고 규정합니다.
행(行)과 연기(緣起)의 의미
기실 일체개고와 제행무상은 한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제행이 무상하면 모든 것이 ‘고(苦)’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제행의 ‘행(行)’은 우리말로는 ‘간다’는 뜻이지만, 그 원어인 ‘삼스카라 (samskāra)’는 ‘드러난 것’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며 ‘제행(諸行)’은 나의 인식 세계에 드러나는 모든 현상(phenomena)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 사건, 그 모든 것은 항상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제일 먼저 깨달은 진리는 ‘연기’라는 것인데 ‘연(緣)’이라는 것은 원인의 뜻이고, ‘기(起)’라는 것은 연으로 해서 ‘일어나는’ 결과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사물도 그것 자체로 단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변화가 오면 결과는 반드시 변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지금 배가 부릅니다. 그런데 이 현상(行, 행)은 그냥 단절적인 절대적인 사태가 아니라 반드시 ‘연(緣)’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배가 부른 것은 조금 전에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밥을 계속해서 공급받지 못하면 곧 배가 고파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현상은 항상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찰나찰나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 사랑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소스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사실 변화를 안 일으킬 수 없지요) 사랑이라는 사태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사랑이 식어버리는 것이죠. 항상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럼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랑이란 무상(無常)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원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사랑의 식음이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고(苦)다” 그러니까 제행무상과 일체개고라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일체개고’라는 것은 불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공통된 인식의 출발점이었으며, 그것은 매우 유니크한 세계관(Weltanschauung)을 나타내는 독립된 명제이기도 합니다.
일체개고와 쇼펜하우어, 문명사적 맥락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은 ‘일체(一切)’가 다 ‘고(苦)’라는 뜻입니다. ‘고(苦)’ 즉 ‘두흐카(duḥkha)’라는 것은 아비달마 문헌에서는 ‘핍뇌(逼惱)’라고 번역했는데 ‘핍박하여 고뇌하게 만든다’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괴롭다’는 뜻이지요. ‘일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은 ‘존재함’ 그 자체가 고라는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일체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삼법인에 미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 우주가 팽창하느라고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뿐만 아니지요. 우리 주변에 서있는 나무를 볼 때에도, 아~ 저 나무가 저기 저렇게 서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한다는 것, 탄소동화작용을 저토록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저것이 바로 고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고 아닌 것이 없겠지요. 내가 살아간다는 것도 고이고, 삼각산에 인수봉 바위가 저렇게 서있는 것도 고입니다. 이 고의 우주론적 의미를 서양사상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제대로 의식한 인물이 바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헤겔과 동시대의 독일철학자. 우주의 본체를 의지로 파악)입니다. 불교의 고에 본체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죠.
그러나 ‘고통스럽다’는 의미는 역시 인간의 삶과 연결될 때 그 핍진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죠. 그러나 우주의 제반현상 모든 것이 인간의 식(識)작용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苦)는 매우 우주론적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일체가 고다! 왜 이런 발상이 생겨났을까요? 아마도 각박한 풍토와 기후, 척박한 농업조건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고밀도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아대륙 인도, 너무도 다양한 고문명의 성과와 복잡다단한 정치사의 분규가 연이어진 인도의 민중들에게는 일체가 고라는 것, 산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인식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와 같이 기아로 인해 매년 대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하는(물론 지금은 사태가 매우 달라졌지만) 그런 문명 속에서는 인간존재의 덧없음(무상無常)을 보편적 명제로서 인식한다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정원에 늘어진 버들이나 청송의 고매한 자태 속에서 우주의 창조적 기운을 감지하는 조선의 심미적 감각의 양반들에게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것, 그것이 곧 우주의 변화이다)’을 읊을지언정, ‘일체개고’라는 말은 결코 어필될 수가 없었겠지요. 삼천리 금수강산이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산수가 수려해 물맛이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인도와는 좀 상황이 다를 수 있겠지요. 물론 불합리한 정치ㆍ사회제도 하에서 핍박받는 민중의 애환 속에서는 불교적 명제가 공감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요.
중동 사막문명의 테마: 죄
중동으로 가면 상황이 아주 달라져요. 고조선-고구려문명의 테마가 ‘생(生, Creative Advance)’이고, 인도문명의 테마가 ‘고(苦)’라고 한다면 중동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테마는 역시 ‘죄(罪, Sin)’입니다. 사막에서의 삶은 공동체의 영역이 매우 좁으며, 대자연의 순환이라는 생생지도(生生之道)에서 단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땅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수직적 관계 속에서 초월적 ‘존재’로서만 인식되고, 우주의 순환이라는 시공범주를 벗어나 버리죠. 그런데 사막의 사람들이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자에 대하여 갖는 의식은 ‘죄’라고 하는 한계 상황을 통해 매개됩니다.
여러분들께서 구약의 레위기 18장을 펼쳐보시면 다양한 인세스트(incest, 근친상간)를 금지하는 법규적인 조항들이 수십 가지 나열되어 있습니다. 자기 엄마, 아버지와 섹스를 하는 것을 비롯해, 아버지의 첩, 동복누이, 이복누이, 친손녀, 외손녀와의 관계 등등 우리 감각으로는 입에 담지도 못할 얘기들이 주변의 다반사처럼 나열되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Lot)의 두 딸이 씨를 받기 위해 아버지와 섹스하는 장면이라든가(창세기 19장을 보세요), 다윗왕이 자기에게 그토록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속이고 그 아내 밧세바와 사특한 짓을 하여 솔로몬을 낳은 얘기(사무엘하 11장) 등등, 하여튼 간통으로 인한 무수한 얘기들이 성서에 실려 있습니다.
꼭 이스라엘민족에게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사막이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한 텐트 안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끼리 벼라별 일이 다 일어날 수도 있죠. 이러한 사회에서는 족장(Patriarch)의 권위가 중요하고, 그 권위에 복속하여 사는 사람들 내면에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유대교의 죄의식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2의 아담the Last(Second) Adam’ (고린도전서 15:45~49)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법정’에 대한 논의를 계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반드시 죄인인 인간은 그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구원(Salvation)’을 갈망하게 되는데, 그 구원은 자신의 마음의 능력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법정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법정의 의로운 재판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 재판관이 바로 ‘하나님’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예수에 대한 신앙이 됩니다.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구원’이라는 바울의 독특한 ‘인의(認義, Justification by Faith)’사상이 초기 기독교운동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문명의 테마 | |
우리문명 | 생(生) |
유대문명 | 죄(罪) |
인도문명 | 고(苦) |
자연의 생생지도(生生之道)에 대한 깊은 신념, 자연이 제공하는 ‘스스로 그러한’ 윤리적 질서에 대한 깊은 신념을 지닌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규정은 날벼락 같은 억울한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필 죄인으로 태어나는가? 왜 ‘타자에 의한 구원’이라는 짐을 걸머져야 하는가? 그러나 ‘고’라고 하는 현실은 때때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나의 존재의 현실은 내가 개선해야 할 문제이지 재판정에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제법무아의 아트만과 실체
자아! 이제 제3의 명제를 분석해봅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sarvadharma anātmānaḥ
여기 ‘제법’이라는 말 속에, ‘모든’의 뜻을 가지는 ‘제’ 이외로 ‘법(法)’이라는 말이 주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 ‘다르마(dharma)’라는 말처럼 불교세계에서 넓게 쓰이는 말도 없습니다. 다르마는 법칙, 정의, 규범의 뜻도 있고, 불타의 가르침을 총칭해서 쓸 때도 있고, 덕, 속성, 원인의 뜻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중국고전 중에서 법가에서 쓰이는 ‘법’이라는 개념을 선택했지만 기실 다르마는 법(法)보다는 도(道)라고 했어야 옳을 것 같아요. 그런데 4법인 제3명제에서 쓰인 ‘법’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냥 사물, 물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사물, 사태, 사건)은 무아(無我)다! 즉 아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我)’라는 의미로 쓰인 ‘아트만(ātman)’이라는 말을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한자가 ‘나 아我’기 때문에 그냥 ‘나, I, Ich’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산스크리트어와 동어근(同語根)의 말로서 독일어에 남아있는 재미있는 동사가 하나 있습니다. ‘아트먼(atmen)’이라는 동사인데, 그 뜻은 숨쉬다, 호흡한다는 뜻이지요. 영어로 ‘to breath’라는 뜻이지요.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도 ‘숨’ ‘호흡의 기식(氣息)’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의 ‘기(氣)’도 기실 ‘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트만은 숨에서 ‘생기(生氣)’, ‘본체(本體)’, ‘영혼’, ‘자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숨 쉬는 자아, 주체를 의미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불교적 맥락에서 이 아트만은 ‘자기동일체로서의 집착’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즉 숨 쉬는 자아는 그 자아가 영원불변한 자기동일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과연 오늘 숨 쉬고 있는 내가 내일 숨 쉬고 있는 나와 동일할까요? 이 나의 자기동일성은 우리가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불변의 본질, 본체(noumena), 실체(substance)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의 나, 내일의 나! 아까의 나, 지금의 나가 과연 같은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오늘 아침(2019년 6월 26일 수요일) 너무도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이 일을 당하기 전의 나(아트만)와 당한 후의 나는 정말 동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李仁秀)라는 분이 나를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는 기사를 오늘 새벽에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이승만학당 대표이사인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를 고소대리인으로 내세워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 그 소장을 중앙지검으로부터 건네받은 혜화경찰서로부터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당장이래도 가서 조서작성에 기꺼이 임하겠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고발내용을 엄청 많이 보강하여 자료를 보낸다고 하니, 그 후에나 만나면 좋겠다고 해서 7월 22일 혜화경찰서에 출두하기로 했습니다. 온 국민이 같이 본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논의된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매일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상가에게 그러한 정신적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 과연 이 시대의 지성들이 해야할 일일까요? 이미 역사화된(역사 속에서 죽은) 인물에 대한 사상가의 평론은 역사평론일 뿐 사자에 대한 개인적 명예훼손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평론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정당한 사회적 루트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한 페어게임을 포기하고 나를 개체적으로 괴롭힌다는 것이 과연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런 행위를 통하여 과연 이승만이라는 개인의 영예가 회복될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시인 김수영이 써내려간 싯귀 한 구절만이라도 읽어보시면, 이승만 치하의 민중의 애환이 얼마나 심했나 하는 것을 아실 수 있을 텐데요. 나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슬픕니다. 그 슬픔을 가슴에 품은 채 이 글을 계속 써나가겠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아는 서양철학언어를 빌리면 ‘실체(Substance)’에 해당됩니다. 아주 간단히 얘기하면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 즉 자기동일적 분별태가 없다. 모든 사물은 본질이 없다. 실체(Substance)라는 것은 ‘아래에(sub-)’ ‘놓인 것(stance)’이라는 의미이니까,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 본체, 영원한 이데아를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그러한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죠.
열반적정과 삶의 종교
다음의 제4명제를 분석해보죠.
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ṃ nirvāṇam)
열반적정이라는 명제는 제법무아(제법에는 기실 아我가 없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또다시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한 측면과도 같은 것이죠. 제행무상과 일체개고가 한 쌍이라면, 제법무아와 열반적정은 또다시 한 쌍이 되지요. 제법이 무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말이지요.
‘열반(涅槃)’이라는 말은 ‘니르바나(nirvāṇam)’라는 말의 음역입니다. 아~ 참, 제가 가사를 쓰고 제 친구 박범훈이 곡을 만들고 박애리가 노래 부른 ‘니르바나’라는 작품이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데 그것을 보셨나요?(2018년 6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초연, BTN 제작, 29분 7초, ‘박범훈 니르바나’로 치면 나온다). 이 노래처럼 니르바나의 의미를 심오하고 신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없어요. 박범훈의 작곡, 박애리의 노래가 다 최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꼭 보세요! 가사가 같이 나오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어요. 베토벤의 나인 심포니를 능가하는 우리음악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니르바나’는 ‘니로다(nirodha)’라는 것과 같은 어근의 말인데, ‘끈다[滅]’는 의미죠. 뭘 끄나요? 불을 끄는 것이죠. 불이란 무엇일까요?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의 불길이지요. 우리는 ‘화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분노 등의 심리현상을 불과 동일시하는 것은 세계인간언어의 공통인 것 같죠? ‘불같이 화가 난다.’ 오늘 아침 고소소식을 접한 도올도 역시 화가 났겠죠. 불이 훨훨 타오르겠죠. 그대로 두면 신장이 타고 두뇌가 타겠지요. 눈이 타고, 귀가 타고, 코가 타고, 혀가 타고, 몸이 타고, 의지가 타지요(초기경전 『마하박가』의 표현).
주변에서 뭐라 그러겠어요? 참아라! 참아라! 가라앉혀라! 꺼라! 꺼라! 조용해져라! 고요해져라!
불교를 이론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열반’을 죽음과 연결시키죠.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사람 죽는 것을 ‘열반에 든다(入寂, 入滅)’고 해요. 그런데 사실 이런 해석은 엉터리 해석이에요. 죽으면 누구나 적정(寂靜, 적막하고 고요하다)해집니다. 열반을 강조하기 때문에 불교를 ‘죽음의 종교(Religion of Death)’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불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Religion of Life)입니다. 열반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상태, 즉 번뇌의 불길이 다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제법이 무아인 것처럼 깊게 투철하게 확철하게 깨달은 사람은 열반의 상태에 들어가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지요.
자아! 4법인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항상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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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고(苦)다! 아~ 고통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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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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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이게 불교의 알파 - 오메가입니다. 불교의 전부입니다. 불교에 관한 모든 명제는 이 4가지 구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불교가 이렇게 쉽단 말이오?
심리학과 무신론, 그리고 무아의 종교
여기 이 4명제에 관해 정리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어요. 내가 하바드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미국학생이 나에게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일종의 심리학입니까?”
나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어요.
“아~ 그렇죠. 그렇구말구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이 불교를 제대로 못 배우는 것만이 제 한이죠.”
제가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였어요. 목사후보생인 대학원 학생이 묻더군요.
“그럼 불교는 무신론입니까? 4법인에 신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군요.”
나는 학생의 질문에 감동했습니다. 제 강의의 핵심포인트를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추측컨대 ‘무신론(atheism)’이라는 말을 매우 부정적으로 쓴 것 같았습니다.
“아~ 내 강의를 정말 잘 들으셨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종교를 논할 수 없고, 근대정신을 논할 수 없어요. 종교가 반드시 하나님이라는 테마를 전제로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없어도 인간은 종교생활을 향유할 수 있어요. 인간의 종교적 과제는 산적해 있어요.”
불교도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시다. 4법인에 의하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무아’이어야 합니다. 자기동일성 즉 자성(自性)이 없는 하나님이어야만 하죠. 이렇게 되면 이론이 매우 복잡해집니다. 사실 무신론이란 황제신론을 진실한 신론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죠. 4법인만큼 우주의 진리를 요약한 법인이 없어요. 간결하게 말씀드리죠.
4법인의 요체는 ‘무아(無我)’이 한마디입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무아의 종교’입니다. 나도 무아고, 부처도 무아고, 중도 무아고, 절도 무아고, 다르마도 무아입니다.
삼학,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자아! 이제 ‘삼법인’과 함께 ‘삼학(三學)’이라는 것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근본불교시대(역사적 싯달타가 활약하던 가장 근원적인 시기)에 싯달타를 따르는 자들이 선생님이 제시하는 이상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데 필연적으로 지켜야만 했던 세 측면의 수행덕목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그 깨달음을 쉽게 일반대중에게 전하기 위해서 설파했다고 하는 사성제(四聖諦, Four Noble Truth)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성제는 4가지 성스러운 진리(catur-ārya-satya)라는 뜻이죠. 싯달타가 대각 후 녹야원에서 4명의 비구를 향해 행한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의 내용이었다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교설을 이루는 것이죠.
고제(古諦)는 이미 ‘일체개고’를 통해 충분히 설파했습니다. 집제(集諦)는 그러한 생ㆍ로 ㆍ병ㆍ사의 고통이 결국 욕망의 집적에서 온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제가 결과라고 한다면 집제는 그 원인이 되는 것이죠. 멸제(滅諦)는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고, 모든 집착이 멸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멸의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적 길을 제시한 것이 도제(道諦)입니다. 그러니까 멸제와 도제의 관계에서, 도제가 원인이 되고 멸제가 결과가 됩니다.
유전연기(流轉緣起) (생성적 인과) |
환멸연기(還滅緣起) (소멸적 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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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古諦) 과(果) |
집제(集諦) 인(因) |
멸제(滅諦) 과(果) |
도제(道諦) 인(因) |
팔정도와 삼학
그런데 4번째의 도제는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엄청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수행자들의 생활규칙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라는 뜻일 텐데, 이 팔정도야말로 원시불교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죠(우리나라에서는 ‘원시’가 ‘원시인’처럼 ‘primitive’하다는 뉘앙스가 있어 싫어한다. 그리고 초기 불교라고 한다. 나는 불타가 살아있을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부르고, 적멸 후 한 150년간, 부파불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를 원초적이라는 의미에서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양자를 합쳐서 ‘초기불교’라 불러도 무방하다).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 바른 소견),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업), 정명(正命, 바른 생활),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정념(正念, 바른 기억), 정정(正定, 바른 집중)을 가리킵니다. 얼핏 듣기에 이것은 매우 윤리적인 규범의 나열같이 들리기 때문에 무슨 불교적 특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초기불교의 모습은 극히 윤리적인 수련을 하는 단체생활이었습니다.
싯달타도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빨리 해탈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정진하시오”라고 부탁했지요. 이 팔정도는 아라한(阿羅漢, arhan, 응공應供이라고 의역되는데, 응당 공양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성자라는 뜻)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도덕적 수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원시불교는 공자학단의 모습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 팔정도 중에서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3도는 계학(戒學)에 속하는 것입니다.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2도는 바로 정학(定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의 2도는 혜학(慧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정진(正精進)은 계ㆍ정ㆍ혜 삼자에 공통된 미덕입니다.
계(戒) sīla |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 정정진 (正精進) |
정(定) samādhi | 정념(正念), 정정(正定) | |
혜(慧) paññā | 정정진(正精進) |
한국불교계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많이 하신 진짜 대학자 병고(丙古) 고익진(高翊晉) 선생은 모든 후대의 불교종파이론은 알고 보면 다 아함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교를 알려면 선사의 어록을 읽을 것이 아니라 아함경을 읽어라! 선불교를 알려고 하지 말고 불교를 알려고 하라는 나의 주장과 같은 말씀이시죠.
아함경이란 초기불교의 경전을 말하는데 산스크리트어 계열의 초기경전은 상당 부분이 현존하는 한역대장경 내에 남아 있고, 그 온전한 모습은 팔리어로 기술되어 남전대장경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함이란 원래 아가마āpama의 음역인데 전승되어진 교설, 전해 내려오는 말씀이란 뜻이죠. 불교이론의 최고층대(最古層臺)를 가리키는 말이죠【고익진(高翊晉, 1934~1988)은 본시 전남 광주 사람으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심장계통의 병을 얻어 학업을 중단, 산사에 물러나 있던 중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접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대 불교학과에 진학하여 동 학과의 교수로 취임하여 수없이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습니다. 항상 병상에 있으면서도 학문의 근본이 되는 기초작업에만 몰두하였으며 허황된 이론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가 편찬한 『한국불교전서』는 『고려대장경』 이래의 최대 불사라고 칭할 정도의 큰 업적입니다. 한국불교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전서』의 은혜를 입습니다. 동국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한 사람 치고 그를 존경치 아니 하는 후학이 없었습니다. 스님으로서는 『가산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을 편찬하신 가산 지관(智冠, 1932~2012) 대선사를 나는 존경합니다. 고익진 교수와 지관 큰스님 이 두 분이야말로 20~21세기 한국불교의 자존심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관 스님은 항상 옆에서 가까이 모실 수 있었으나 병고 선생은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서로 만나기를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게으름이 발걸음을 늦추었지요. 결국 그의 영전에나 찾아뵈었습니다. 사모님께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셨는데, …… 생전에 만나셨으면 좋았겠어요……”라고 애처로워 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불교사의 특징은 올 오아 낫씽(all or nothing)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혁신적인 새로운 이론도 이전의 이론을 포섭하여 발전시킨 것이죠. 4법인, 알고보면 쉬운 것 같지만, 무아를 실천하고 열반을 구현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나, 하나님이 되는 것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사성제의 진리이론도 매우 간단한 듯이 보입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는 집적된 원인이 있고, 그 집착을 없애면 열반적정에 든다. 그런데 그 멸집(滅執)에 8가지 방법이 있다. 그 8가지 방법을 요약하면, 계ㆍ정ㆍ혜 삼학이다!
지눌의 정혜쌍수
보조(普照) 지눌(知訥, 1158~1210)도 무신정권이 발흥하여 대고려제국의 정치체제와 결탁된, 축적된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선불교의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격외성(格外性, 교외별전敎外別傳)이 고려불교 그 자체를 뒤흔들고 있던 시대에, 선(禪)과 교(敎)는 본질적으로 대립되어야 할 양대세력이나 이론체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융합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통불교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해나갔던 탁월한 사상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도통을 전수받을 만한 스승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선이라는 것이 깊게 이해된 상태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독자적인 문학(問學)의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결사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사운동의 핵이 ‘정혜결사(定慧結社)’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계ㆍ정ㆍ혜 삼학의 본래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외쳤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하는 것은 ‘계정혜전수(戒定慧全修, 계ㆍ정ㆍ혜 삼학을 다 온전하게 닦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계(戒)는 너무도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략을 하였지만 정과 혜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정은 바로 선정(禪定)을 의미하며, 혜는 바로 지혜 즉 교학불교를 가리키는 것이죠. 정과 혜를 동시에 온전하게 닦아야 한다는 것은 불교경전이 던져주는 깊은 지혜의 공부가 없이는 선정이라는 정신통일이 달성된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지눌은 교학불교의 대가였습니다. 천태, 법상, 화엄 등의 경전이론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임제 간화선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혜쌍수(定慧雙修)는 곧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정(定) ― 선종 | ↘ | → 하나다! |
혜(慧) ― 교종 | ↗ |
득도와 화두
생각해보세요! 여기 스님이 한 분 있다고 합시다. 왜 이 사람을 스님이라고 우리가 존경을 할까요? 우선 스님이 됐다고 하는 것은 ‘수계(受戒)’를 의미합니다. 즉 계를 받아야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좋아하고 올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을 양보할 수 없는 인생의 도락으로 엔죠이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참기 어려운 쾌락의 향유를 근원적으로 포기한다, 왜 그럴까요? 득도를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여튼 보통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운 매우 근원적인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 그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님이나 신부를, 비구니나 수녀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죠. 스님이 색이나 밝히고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존경해야 할까요? 계율은 스님을 스님다웁게 만드는 기본적 덕목입니다.
경허가 과연 막행막식의 인간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반계율적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초계율적 행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 매우 심오한 슬픔 같은 것을 느낍니다. 경허는 슬퍼요! 그러나 경허만큼 자기 디시플린(discipline, 기강)이 확실한 사람도 없어요.
내가 명진 스님을 친구로 대하는 것도 그에게는 계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지키기 어려운 계율을 초연히 지키기 때문이죠. 일상적 삶에서 자기 디시플린이 확실한 사람이죠. 정의로운 언행 때문에 승적까지 박탈당했으면서도 꿋꿋하게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스님이 스님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계ㆍ정ㆍ혜의 삼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확고히 규정된 것입니다. 선불교라는 것이 따로 독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ㆍ정ㆍ혜의 정(定)이 곧 선입니다. 이 선정을 철저히 행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삶의 일화들이 ‘화두(話頭)’일 뿐이죠. 화두를 통해서 득도를 한다? 나는 간화선(看話禪)? 그따위 것은 개밥통에나 집어넣어라! 그렇게 말합니다.
‘화’는 그냥 이야기입니다. ‘두’는 “머리”라는 뜻이 아니죠. 백화적 용법으로 별 의미가 없는 접미사예요. 나무만 해도 ‘木(mu)’라 하면 될 것을 ‘木頭(mutou)’라 하고, ‘石(shi)’라 하면 될 것을 ‘石頭(shitou)’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화두(huatou)’는 그냥 ‘화(hua)’, 즉 이야기일 뿐예요.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죠. 그냥 ‘구라’죠. 조금 더 리얼하게 말하면 ‘개구라’죠. 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선사들이 삶의 굽이굽이에서 내뱉는 개구라죠. 그 개구라를 받아서 득도를 한다? 웃기는 얘기죠. 득도라는 것은 오직 자기 삶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느낌의 심화는 ‘혜’의 공부에서 생기는 것이지 ‘간화(看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삼학에 이미 선종과 교종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대장경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삼학과 삼장, 성묵과 법담
계ㆍ정ㆍ혜는 싯달타의 삶의 과정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지요. 달타가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 앉기까지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계(戒)였습니다. 그리고 보리수(핍팔라나무) 밑에서 선정에 들어갔지요. 그것이 바로 정입니다. 그리고 정을 통하여 아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합니다. 그러니까 싯달타의 계를 담은 것이 율장이고, 싯달타의 정(定)을 담은 것이 경장이고, 싯달타의 혜를 담아놓은 것이 논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약간의 디테일한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의미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초기경전에는 율장과 경장만이 있었다. 논장은 후대에 성립한 것이다).
삼학 三學 |
계(戒) | 율장(律藏) | 대장경 大藏經 tri-piṭaka |
정(定) | 경장(經藏) | ||
혜(慧) | 논장(論藏) |
싯달타는 어려서부터 명상을 즐겨하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집중력이 강했다는 뜻이지요. 그는 성도(成道) 후에도 7주간이나 그 자리에 앉아 선정을 즐겼다고 합니다. 득도했다고 떠벌리면서 다니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선정에 매우 적합한 체질의 인간이었다는 뜻이죠.
초기승단의 비구의 정명(正命)으로서의 하루생활을 보면, 하루를 주야 4시간씩 여섯 단위로 구분했습니다. 비구가 자는 시간은 10시부터 2시까지 4시간뿐입니다. 야(夜)의 후분(後分)인 2시부터 6시까지는 좌선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는 선정에서 벗어나 세면과 청소, 그리고 탁발을 합니다. 오분(午分) 즉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오전에는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까지는 휴식이나 좌선을 합니다. 석분(夕分), 즉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좌선을 하거나, 여타 비구그리고 신자들에게 설법을 합니다. 밤의 초분인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는 또다시 좌선을 합니다.
그러니까 초기승단 비구의 생활은 하루 24시간의 대부분이 좌선의 명상이었습니다. 비구가 홀로 토굴에 있을 때는 별도이지만 집단생활을 할 때는 오직 ‘성묵(聖默, ariya tunhībhāva)과 법담(法談, dhammī kath)’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성묵이란 성스러운 침묵이지요. 입을 열면 세간의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오직 법(法, 깨달음의 원리, 스승의 가르침)에 관한 얘기만을 해야 하는 것이죠. 나만 해도 철학과에 들어간 이후로는 친구들과 자리에 앉으면 철학에 관한 담론만을 일삼았지, 남의 시시콜콜한 세간살이라든가 인물평에 관한 얘기를 하질 않았습니다. 세간의 잡담을 축생담(畜生談, tiracchāna-kathā)이라고 했는데, 비구의 삶에서 엄격히 금지된 담론이었습니다. 비구들이 앉아서 세간의 여성의 몸매 얘기나 하고, 해제 후에 돈 타서 해외여행이나 가는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얘기군요. 아마도 좌선이라는 것은 인간 싯달타의 삶의 습관 같은 데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 같습니다. 선(명상) 그 자체로 천국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삼학은 상측상입, 하나도 결(缺)할 수가 없어요. 계 속에 이미 정ㆍ혜가 들어있고, 정 속에 이미 계와 혜가, 혜 속에 이미 계와 정이 들어있어요.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의 이해
이제 우리는 3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혜(慧)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혜는 의역이고(선진경전에서 ‘慧’는 특별한 의미가 없던 글자였다), 그 음역이 바로 ‘반야(般若)’라는 것이죠.
반야란 무엇인가 바로 이 주제가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자아!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반야경’이라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반야사상을 표방한 경전들을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히카타 류우쇼오(干潟龍祥, 1892~1991, 동경제대 철학과 졸업. 구주제대九州帝大교수. 일본의 인도철학자)는 의미 있는 중요한 반야경으로서 27경을 꼽고,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반야경연구 전문가, 에드워드 콘체(Edward Conze, 1904~1979, 아버지가 주영독일대사관 부영사였을 때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시민권을 획득했다. 원래 방적회사를 경영하던 부장집 아들이었다. 법률학을 공부하였고 판사까지 되었으나, 철학에 흥미를 느껴 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맑시스트가 되었고 나치에게 주목받는 바 되어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국에서 그는 반야경전을 공부하여 인기 높은 강의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미국대학의 평생교수직을 얻게 되어 도미하려 했으나 미국 정부 이민국이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알고 그의 입국을 허락치 않았다. 콘체는 쓰라린 심정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남아, 산스크리트어 공부에 전념하여 반야경전의 세계적인 권위가 되었다)는 40개의 반야경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모르는 반야경이 많을 것이고, 반야경전의 세계는 카운트방식에 따라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많은 반야경전 중에 제일 먼저 성립한 반야경으로 『8천송반야경(八千頌般若經)』이라는 텍스트를 꼽는 데 사계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8천송반야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
‘8천송(八千頌)’이라는 것은 분량을 말하는 것인데 대부분 옛날 인도경전이 노래로서 암송되었기 때문에 ‘송(gāthā, 偈陀, 伽陀)이라 하는 것이고, 이 노래는 여러 형식이 있지만 불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슐로카(śloka)라는 것입니다. 슐로카는 1구가 8음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이 2구 연결된 것이 또다시 2행을 이루어 하나의 그룹(스탄자stanza 같은 것)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8음절 4구 32음절(8×4=32)의 산스크리트 시형(詩形)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32음절의 슐로카가 8천 개가 모인 반야를 설하는 노래가 바로 『8천송반야경』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8천송반야경』은 25만 6천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우리가 보통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는 것이 몇 슐로카인 줄 아세요? 14개의 슐로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8천송에 비하면 엄청 짧지요(우리가 보통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는 것은 현장역의 소품이다. 대품은 25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사실 『8천송』도 짧은 거예요.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1만8천송』, 『2만5천송』, 『10만송』으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그런데 이 경전들을 대조해보면 반복의 묘미가 너무 심해서 실제로 내용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요. 인도사람들의 구라의 특징이 ‘반복’이거든요. 반복하면서 조금씩 그 ‘맛’을 확대해나가는 거지요. 실제로 ‘논리’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죠.
현재 최초의 반야경전이라고 하는 『8천송반야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산스크리트 원전이 최초의 반야경전의 원래 모습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산스크리트 원전’이라 하는 것들이 대부분 후대에 성립한 사본들이고 원전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사본들이기 때문입니다. 불경의 세계에서는 ‘오리지날(original)’이라는 것은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만큼 문헌에 대한 생각이 느슨하다, 여유롭다고 말해야겠지요.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월지국 루가참의 기적 같은 번역
그럼 진짜 『8천송반야경』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존하는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속에 반야라는 말이 들어간 아주 희한한 경전이 하나 있습니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라는 문헌이지요. 인도사람들은 진리의식만 강하고, 역사의식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누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서 기술하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인도역사기술방식에서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죠. 그런데 「도행반야경」이라는 문헌은 지루가참度이라는 번역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고, 그 번역자가 중국에 와서 이 경을 한역(漢譯)한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인도측 역사에서는 얻기 어려운 것이기에 진실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선 지루가참의 ‘지(支)’는 ‘월지국(月支國)’(혹은 ‘월씨국月氏國’이라고도 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월지의 루가참이라는 의미입니다. ‘루가참(婁迦讖)’은 산스크리트어 Lokakṣema의 음역입니다. 이 사람은 후한시대 환제(桓帝, 재위 146~167)의 말기에 중국에 왔으며 『도행반야경』을 AD 179년(광화光和 연간)에 번역해낸 것이 확실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학교습소도 없었고 외국어학원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생소한 문명에 도착하여 한 15년 만에 그토록 난해한 불경을 소리글체계의 문자에서 뜻글체계의 문자로 바꾼다는 것, 그것도 전혀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단어나 개념을 쌩으로 지어내어야만 하는 창조의 작업, 그것이 과연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재적인 쿠차국(龜玆國, Kingdom of Kucha, 출신의 스님이며 역경의 대가인 꾸마라지바Kumārajīva, 344~413)가 활약하기 전 이미 2세기가 훨씬 넘는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손오공을 부리며 인도를 다녀온 삼장법사 현장이 장안에 돌아온 것도 꾸마라지바가 장안에 온 것보다도 244년 후의 일이었습니다(AD 645년, 당태종 때). 그러니 지루가참이 얼마나 빠른 시기에, 얼마나 위대한 고전의 원류를 번역해내었는가 하는 것은 기적 같은 사실입니다. 그때는 안세고(安世高, 생몰 미상. 안식국安息國Parthia의 황태자.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출가, 후한 환제桓帝 초년에 낙양에 왔다)가 소승경전을 번역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초기정황에서 지루가참이 곧바로 반야경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도행반야경』을 번역했다고 하는 것은 문명간의 교류의 정황이 극히 신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감각으로 본다면 방탄소년단의 소식이 곧바로 미국ㆍ영국ㆍ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전해지는 것과도 같은 속도라고 말할 수 있겠죠.
『8천송반야경』의 유일한 조형과 대승불교의 출발
『도행반야경』은 현존하는 『8천송반야경』의 유일한 조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도행반야경』을 번역한 지참(支讖, 지루가참의 약칭)은 월씨국에 『8천송반야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8천송반야경』의 원형의 모습을 우리는 『도행반야경』에 의해 추론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현존하는 한역본 『도행반야경』을 거꾸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8천송반야경』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겠다는 것이죠. 그러나 과연 지루가참이 산스크리트 원본을 문자 그대로 직역했을 것인가?
사계의 대학자인 카지야마 유우이찌(梶山雄一, 1925~2004)【경도대학 철학과 출신의 불교학자. 경도대학 문학부 교수로서 경도학파를 이끌었다. 대승불전에 있어서의 공(空)사상 연구의 제1인자】는 『8천송반야경』의 유일한 고본이 『도행반야경』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으나, 양자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지참(支讖)은 『8천송반야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적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맥락을 과감하게 첨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행반야경』은 번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창조라는 것이죠.
『도행반야경』의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김수진 번역의 『도행반야경』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10권30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제3품, 제1의 「도행품(道行品)」, 제2의 「난문품(難問品)」, 제3의 「공덕품(功德品)」이 반야경의 프로토타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3품을 합하여 보통 서분(序分)이라 말합니다. 이 서분이야말로 모든 반야경의 기원을 이룩하는 원초형이라고 말하는 사이구사 미쯔요시(三枝充悳, 1923~2010)【동경대학 철학과 졸업. 뮌헨대학 철학박사. 쓰쿠바대학에서 교편 잡다. 훌륭한 불교학자】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아~ 얘기하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전문적으로 흘러 재미가 없어진 감이 있군요.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대장경 전체를 펼쳐놓고 얘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여러분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다 전달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먼저 왜 반야경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간결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야경의 성립은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한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여러분께 상기시켜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반야경이 성립하면서 대승불교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대승불교’라는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야경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리고 또 소승(小乘)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반야경전들과 『반야심경(般若心經)』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한국의 선불교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반야 얘기로 튀었는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얘기되어야만, 여러분들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월지국에서 쿠샨제국으로
이런 얘기를 하기 전에, 딱 한 가지, 지루가참의 ‘지(支)’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월지(월씨)는 본시 흉노족이 크게 세력을 떨치기 이전에 돈황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의 영역, 그러니까 감숙성의 서쪽에 살던 상당히 강인하고 영리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영역을 ‘하서주랑(河西走廊, Hexi Corridor)’이라고 부르는데 중국 내지(內地)의 서역통로로서 가장 중요한 요도(要道)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고조선 제국의 일부 종족이 서진하여 정착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월지는 흉노족의 중흥조인 라오상츠안위(老上單于, Lao Shang, BC 174~161 재위)의 공격에 대패하고 그들의 왕이 살해당하자, 월지의 주간세력이 서진하여 소그디아나(Sogdiana)와 박트리아(Bactria)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희랍지배를 종료시킵니다.
박트리아는 중국역사에서 ‘대하(大夏)’로 불리는데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3세를 정복하면서 셀류코스의 치하로 편입되어 풍부한 희랍문명이 축적된 곳이죠. 현재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입니다. 월씨는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의 고문명을 흡수하고, 또 규수(嬀水, 아모하阿姆河, Amu Darya, 옛 이름은 옥수스강Oxus River) 양안에 대월씨왕국(大月氏王國)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대월씨왕국은 5개의 봉분 군주로 나뉘는데, 그 중 하나가 인도 북부지역을 차지한, 중국역사에서 ‘귀상(貴霜)’이라고 불리는 쿠샨왕조(Kushan Dynasty)인데, 제1대 대왕인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 AD 30~80 재위, 중국말 구취각丘就却) 때에 박트리아를 계승한 대월씨왕국 전체를 지배영역에 집어넣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통합하는 대제국이 탄생된 것이죠. 제2대 비마탁투Vima Taktu or Sadashkana, AD 80~95 재위, 중국말로는 염고진閻膏珍), 제3대 비마카드피세스(Vima Kadphises, AD 95~127 재위, 중국말표기 염진閻珍)를 거쳐 제4대 카니슈카대제(Kanishka, AD 127∼140경 재위, 중국말표기 가니색가迦膩色伽) 때 이르러 쿠샨제국은 절정의 길로 치닫습니다. 이 시기에 쿠샨제국(Kushan dynasty)은 중국, 로마, 파르티아와 함께 유라시아 4대강국으로 꼽혔습니다. 중국의 사가들은 어찌하여 쿠샨제국이 중국을 멸망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논의를 할 정도로 쿠샨제국은 강대했습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쿠샨제국 내에 간다라와 마투라가 들어 있었고, 이 두 지역(간다라는 뉴델리에서 한참 서북쪽, 마투라는 뉴델리 바로 밑에 있다)에서 최초의 불상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죠.
쿠샨왕조의 성격: 포용적 문화, 불상의 탄생, 대승의 기반
쿠샨왕조는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개화된 상업인들의 마인드가 이 문화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쿠샨왕조는 금화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금화를 보면, 희랍, 로마, 이란, 힌두의 신들, 그리고 불상을 자유롭게 주조해 넣었는데, 희랍어문자로 친절한 설명까지 첨가해놓고 있습니다. 어느 한 종교에 아이덴티티를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로 이러한 종교적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동서문명의 가교역할을 했고, 불교를 동방에 전래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루가참이 중국에 왔을 때 그 ‘지(支)’는 쿠샨왕조였으며, 매우 개명한 고등문명의 사람으로서 그는 한자문명권에 발을 내딛었던 것입니다. 쿠샨왕조는 이란에서 사산왕조가 흥기하고 북부 인도에서 토착세력이 고개를 쳐들면서 3세기부터 몰락의 일로를 걷다가 5세기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지명 하나, 인명 하나, 나라이름 하나를 그냥 적당히 넘어가면 생동하는 역사의 흐름의 핵을 유실하게 됩니다. 자아~ 여기서 이미 제기된 문제는 대승, 불상, 반야 이런 말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얽혀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관계양상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도행반야경』이라는 텍스트와 그 이전의 자질구레한 대승 계열 경전들의 여러 상황으로 추론해보면 반야경이라 말할 수 있는 최초의 엉성한 프로토 경전이 AD 50년 경에 성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단단해지고 치밀해지고 계속 확대되어 나간 것이죠.
현장의 『대반야경』이라는 거질
현장(玄奘)이라는 정력적인 역경대가가 AD 663년 10월 20일에 『대반야경』이라는 책을 번역ㆍ완성합니다. 그리고 넉 달 후에 그만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664년 2월 5일 야밤중. 향년 63세). 요즈음으로 보면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요즈음 사람들이 공연히 오래 사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대반야경』이라는 책이 언제 번역과 편집을 시작한 것인지 아세요? AD 660년 원단(元旦)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과 3년 11개월 만에 그 대작을 완성한 것이죠.
그런데 미치고 똥 쌀 일이 하나 있어요. 이 『대반야경』의 분량이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 아세요? 8만대장경판 중에서 단일 종목으로는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인데,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편집된 대정대장경의 두꺼운 3책을 다 차지하는 분량입니다. 해인사 장경각의 수많은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지요. 함(函)수로 하늘 천(天)함에서 벗 내(柰)함까지(『천자문』순서로 함 번호가 매겨져 있다)니까 그것은 자그마치 60함이 되는 엄청난 분량이죠. 권수로도 600권이 됩니다. 이 600권은 16회(會)로 분류되어 있는데, 회라는 것은 컬렉션의 단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반야경』(온전한 명칭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은 단일 종의 책이 아니라, 반야경전이라고 세상에 나온 책들을 모조리 컬렉션하여 16회(會)로 분류한 반야경대전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불경을 짊어진 현장
확대와 축약
자아! 간단히 생각해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반야경전은 대강 AD 2세기 지루가참의 『도행반야경』으로부터 AD 7세기 현장(玄奘)의 대전집 『대반야경』에 이르는 소품계, 대품계, 밀교계의 다양한 경전들이 열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핵심경전의 성립을 AD 1세기로 본다면 약 600년간의 끊임없는 확대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반야사상은 인기가 있었고 대중의 호응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헌은 ‘확대’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번잡하게 교설이 확대되어 나가는 중에 혹자는 이렇게 뇌까릴 수도 있습니다.
“에이 씨발 뭐가 그렇게 복잡해! 번뇌를 버리고 잘 살면 되는 거 아냐? 한마디로 하자구! 한마디로!”
이러한 확대과정에 역행하여 극도의 축약화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축약은 단순한 축약이 아니라 단행본으로서 자체의 유기적 독립성을 갖는 단일경전이 되는 것이죠. 이 반야경 중에서 독립적 단일경전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금강경』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따로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두 경전은 동일한 반야경전그룹 내의 두 이벤트일 뿐입니다. 『금강경』도 『금강반야바라밀경』이고 『반야심경(般若心經)』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둘 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주제를 설파한 경전들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금강경』은 현장의 『대반야경』 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는데 반해(600권 중에 577권이 『금강경』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극히 짧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반야경』에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만큼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독자적 성격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현장이 『대반야경」의 방대한 작업을 끝내고 『반야심경』을 번역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현장(玄奘)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먼저 단행본으로서 번역하고 『대반야경』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반야경과 도마복음서
『반야심경』의 ‘심(心)’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야를 성취하는 우리의 마음을 설하는 경처럼 오해하는데, 여기 ‘심’은 ‘흐리다야(hṛdaya, 음역은 흘리다야紇利陀耶)’의 뜻으로 그러한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물리적인(의학적인) 용어로서 신체의 중추를 형성하는 심장(Heart)을 의미합니다. 육단심(肉團心이라고도 번역하지요. 그리고 밀교에서 만다라(曼茶羅)를 그릴 때 그 전체구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심인(心印, hṛdaya-mantra)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핵심(核心)’이라는 말이 그 원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般若心經)』이란 600권의 방대한 『대반야경』의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반야경』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부피는 1,000만 대 1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그 무게는 동일합니다!
자아!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입니까? 『대반야경』을 한글로 읽으시려고 해도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한글대장경판으로 두꺼운 책 20권입니다. 그것을 다 읽으려면 그야말로 ‘존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그 어마어마한 600여 년의 성과가 다 료해(了解)될 수 있다? 이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반야경의 책이 성립한 시기가 바로 기독교복음서가 집필된 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이죠. 복음서 중에서도 마가복음이라는 오클로스(ὄχλος) 복음서(민중복음서), 큐복음서, 도마복음서 등등의 경전이 동일한 시대정신(Zeitgeist)을 표방하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 요즈음 사상계의 새로운 동향입니다.
반야경과 대승불교와 선불교
『금강경』과 『심경』은 어느 쪽이 더 먼저 성립했을까요? 『금강경』은 구라의 질감이 매우 평이하고 비개념적이며 시적이며 반복의 묘미가 매우 리드믹한 느낌을 형성하고 있지요.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반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260개의 문자 속에는 이미 ‘공(空)’이라는 철학용어가 나오고, 오온(五蘊),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기초이론이 깔려있는가 하면, 용수(龍樹, Nāgārjuna, c.150~c.250)의 중론(中論)의 논리도 이미 반영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금강경』보다는 후대에 성립한 경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저의 추론으로는 『금강경』은 AD 50년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은 AD 300년경으로 그 성립연대를 잡으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라집의 『반야심경』 번역(『대명주경』)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면 『심경』 성립연대가 더 후대로 잡힐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모든 정황을 신중히 고려한 방편적 가설이지, 절대적인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는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께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반야경의 성립은 곧 대승불교의 시작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해서, 기나긴 불교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의 종착지는 선종이었다.”
선불교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모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실천불교의 정점입니다. 불교는 선종을 통해서만 법난(法難)을 이겨낼 수 있었고,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에만 해도 선종의 독자적이고 실천적인 성격 때문에 그 통불교적인 포용성을 상실하지 않고 순결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선불교의 뿌리와 우리 민중의 선택
우리는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라는 삼학(三學)을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성적등지(惺寂等持)의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선종을 정(定)의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선정이라는 것은 ‘정신수양’의 생활이요 방법론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定)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은 혜(慧)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혜(慧)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언어로 ‘지혜(Wisdom)’라고 생각하면 확연히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 막연한 개념입니다. 부파불교시대까지만 해도 ‘혜’는 그냥 지혜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막연한 지혜를 전제로 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혜(慧)’에 대한 확고하고도 새로운, 그리고 혁명적인 해석이나 목표가 설정되지 않는 한 ‘정(定)’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선불교의 핵심은 ‘선(禪)’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혜(慧)’에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에 대한 혁명적 생각이 선종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우리나라는 선불교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민중은 선사들의 어록이나 공안집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깨달았다고 잘난 체하는 인간들의 ‘개구라’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민중들은 그런 개구라에 속질 않아요. 선사들의 구절이 가슴에 와닿질 않아요. 우리민중들이 사랑하는 책은 오직 2권의 경전이죠. 『금강경』과 『반야심경(般若心經)』! 민중들은 잘 알고 있지요. 이 두 개의 경전만 깨우치면 선사들의 개구라나 이론이 필요 없다. 선에 무슨 이론이 있느냐!
자아! 저는 이미 『금강경』을 해설한 책을 세상에 내어놓았습니다. 요번에 이 책과 함께 완벽한 한글개정판 『금강경강해』를 다시 내어 놓았습니다.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설함으로써 제가 50년 동안 불교에 진 빚을 갚으려 합니다.
대승이란 무엇이냐
자아!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해설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을 펼치면, 제일 첫머리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해설하려면 ‘관자재’가 무엇인지, ‘보살’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대승불교’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뻐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야경이 대승불교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부터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무엇이냐? 이 한 주제만 전문적으로 설하려고 하면 또다시 거대한 단행본을 써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경』에 도달치도 못하고 이 책이 끝나버릴 수가 있습니다. 최소한 2천 5백 년의 불교사 전체가 항상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의 향연으로 함입하면 헤엄쳐 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작전은 저의 서가에 있는 모든 책을 덮고, 저의 전문적 지식을 닫아버리고 정좌하여 머리에 떠오르는 통찰만을 전달하려 합니다. 소략한 설명이 되어도 『심경』의 이해를 돕기 위한 대승의 성격만을 이야기한다는 전제 하에 양해하여 주시기를 앙망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승(大乘)’이라는 용어가 매우 부정확하고 근원적으로 타당치 않은 의미맥락에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라 하면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상대개념으로 이해되고 있고, 지역적으로 중국ㆍ한국ㆍ일본의 불교는 대승, 버마ㆍ타이ㆍ스리랑카 등 남방의 불교는 소승이다. 이런 식의 도식적 이해는 참으로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까지를 소승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이라는 것은 소승이라는 개념의 짝으로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대승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을 지칭하는 말로서 태어났습니다. ‘대승(大乘)’은 문자 그대로 ‘큰 수레(Great Vehicle)’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원어로 ‘마하야나(Mahayāna)’라고 합니다. 이것을 음역한 것이 ‘마하연(摩訶衍, 온전한 번역은 ‘마하연나摩訶衍那’)’인데 재미있게도 이 용어가 『도행반야경』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하야나’ 즉 ‘대승’이라는 말은 AD 1세기에는 확립된 개념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소승’ 즉 ‘히나야나(Hīnayana, Small Vehicle)’라는 개념은 그것보다 최소한 200년 이후에나 나타납니다. 즉 ‘큰 수레’라는 말을 쓴 사람들이 이 ‘큰 수레’ 운동에 따라오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비적으로 지칭하여 비하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밀다(‘건너간다’라는 뜻이 있다)’를 전제로 해서 말한다면 차안(此岸. 이쪽 강둑)에서 피안(彼岸, 저쪽 강둑)으로 가는 배가 큰 것은 대승이고 작은 것은 소승일 텐데, 건너간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큰 수레나 작은 수레나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버스와 자가용을 생각한다면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지만 자가용은 그 주인과 아는 사람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개방적인 데 반해 자가용 세단은 폐쇄적이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 갈 수 있는 수단이고 자가용은 ‘선택된’ 소수만이 갈 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관련하여 쓰는 삼승(三乘, yana-traya)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3종류의 수레라는 뜻이지요.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 보살의 의미
그 첫째가 성문승(聲聞乘), 그 둘째가 독각승(獨覺乘, 혹은 연각승緣覺乘), 그 셋째가 보살승(菩薩乘)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3승은 실제로 기나긴 초기불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싯달타가 말하는 소리[聲]를 실제로 들은[聞] 사람들이니까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같은 불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싯달타의 자가용에 자연스럽게 올라탈 수 있는 선택된 소수들이겠지요.
그 다음에 독각승이라는 것은 홀로[獨] 깨닫는[覺] 사람, 즉 선생이 없이 홀로 토굴에서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들, 12인연을 관하여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연각승이라고도 합니다. 분명 이 독각ㆍ연각이야말로 성문 다음 단계에 오는 수행자들이었겠죠.
그 다음이 보살이라는 개념인데 보살이라는 것은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의 줄임말입니다. ‘보리(菩提)’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 있죠. ‘살타(薩埵)’ 즉 ‘사트바(sattva)’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외연이 넓은 말입니다. ‘본질’, ‘실체’, ‘마음’, ‘결의(決意)’, ‘태아’, ‘용기’, 그리고 ‘유정(有情, 정감 있는 존재라는 뜻)’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보리살타라는 것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 중에서 성문과 독각은 물론 작은 수레의 인간들이겠죠. 그렇다면 셋째 번의 보살이야말로, 보살이 타는 보살승이야말로 큰 수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살에 관해서는 매우 다양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삼승 三乘 yana-traya |
성문승(聲聞乘) | 말하는 소리를 실제로 들은 사람 |
독각승(獨覺乘) | 홀로 깨닫는 사람 | |
보살승(菩薩乘) |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
싯달타의 자기파멸과 자기 완성의 길
여러분은 정말 고타마 싯달타라는 청년이 정말 샤카족 카필라성의 왕자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4성문에서 충격 받는 일들을 목격하고 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런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살아있는 동안 무지막지하게 비상식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예수의 생애와는 달리 아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싯달타의 실존성에 관해서는 예수만큼이나 구체성이 없습니다. 그에 관한 얘기들은 결국 알고 보면 양식화된 후대의 기술이니까요. 그의 생존연대도 BC 6세기부터 4세기까지 왔다갔다 하니깐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만 해도 최근에는, 사도 바울이라는 유대인 사상가가 신화적인 죽음과 부활의 테마를 통하여 에클레시아(교회조직) 운동을 일으켜 크게 성공하자, 그 성공에 힘입어 복음서기자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이론도 있고, 또 예수는 당시 많았던 인물의 한 유형일 뿐이며, 따라서 예수가 일종의 집단적인 고유명사일 수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공적인 이야기라도 역사적 실존성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싯달타에 관해서도 히말라야 네팔 지역 어느 산 중턱의 조그만 종족의 부잣집 청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의 ‘4문출유(四門出遊)’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고뇌의 테마는 노(老, 늙음)ㆍ병(病, 병듦)ㆍ사(死, 죽음)의 3자입니다. 노ㆍ병ㆍ사가 고(苦)로서 자각되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평소에 젊음에 대한 오만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살아있음에 대한 오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젊음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비통이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병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삶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노ㆍ병ㆍ사를 고(苦)로서 자각할 수 있었던 아주 예민한 감성의 젊은이가 싯달타였기에 그의 고뇌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이 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ㆍ병ㆍ사를 자각할 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떻게 자기완성의 길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 속에서 무명(無明, 인간의 본질적 무지)을 발견하고, 사성제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초기 수행자들의 엄격한 계율과 한계
나는 싯달타를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업(業, karman)이라든가, 윤회(輪廻, saṃsāra)라든가, 열반(涅槃, nirvaṇa, 니원泥洹이라고도 음사한다) 같은 것은 한국사람들에게 김치와도 같이 인도사람들의 생활 속에 배어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고 감정의 원천이지요. 이러한 기본적인 틀에 대하여 싯달타는 조금 혁명적인 생각을 한 것뿐이죠. 그러나 싯달타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위대한 초기 경전들이 결집되었다는 것이고, 또 그 경전의 내용들이 계속 발전적으로 부정되고 확대되어 나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죠.
싯달타 대각자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초기승단의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요즈음처럼 시건방을 떠는 스님들이 아니었어요. 요즈음 스님들은 끄덕 하면 자기가 성불했다 하고, 대각했다 하고, 비구의 권위를 내세워서 자기존재감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신도들이 엎드려 절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주지니 총무원장이니 조실이니 방장이니 하면서 권좌에 앉기 위해 벼라별 추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렸지만, 초기승단의 비구들은 매우 소박하고 성스러운 맛이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겸손하고 함부로 성불을 운운하지 않는 도덕적 집단이었습니다.
‘도덕적’이라 하는 것은 계율이 매우 세분화되고 엄격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 확실했으며 출가자는 비구(比丘, bhikṣu, 여성출가자는 비구니比丘尼bhikṣuṇī)라 했는데, 비구는 ‘빌어먹는다’는 뜻입니다. 비구는 반드시 탁발수행을 해야 하며 물건을 사취할 수가 없습니다. 비구가 된다는 것은 계를 받는다는 것인데, 비구가 지켜야 할 계율이 250가지나 되었습니다(팔리율은 227계조戒條). 요즈음 스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수행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삶의 목표는 시건방지게 금방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각자인 싯달타가 남겨놓은 가르침에 따라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대체적인 수행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문(聲聞)ㆍ독각(獨覺)의 소승시대에는 ‘내가 부처가 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경외감을 유지하지, 함부로 자기도 불타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요. 결국 모르니까 까부는 거예요.
초기불교시대에 수행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위를 아라한(阿羅漢, arhan)이라고 했는데, 한역한 것을 보면 ‘응공(應供)’이라고 했습니다. 공양이나 존경을 받을 만한 응당의 가치가 있는 성자(聖者)라는 뜻이죠. 이것을 줄인 말이 ‘나한(羅漢)’ 이죠. 아라한들이 자신을 부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초기불교는 부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들의 삶의 목표는 부처님 말씀을 잘 배우고 따르고 계율을 잘 지켜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수행을 하다 보니 그들은 소수화되었고 고립화되었고, 범인들이 사는 세계로부터 격리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범접치 못할 본보기는 되었을지언정, 민중과 더불어 구원을 얻는 삶을 향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쇼카 시대의 결집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 자기를 이롭게 한다, 자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한다. svārtha, ātma-hita)만을 추구했지 이타(利他,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parārtha, para-hita)의 결과를 초래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의 원래적 의도는 자리(自利)를 통하여 이타(利他)가 도모되는, 다시 말해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합일이 되는 경지에 있을 것입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함)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하는 삶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권위화되어가고 소수집단화되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체적 방향성에 새로운 계기가 생겨납니다.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불리우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아육왕阿育王이라고 음사된다)이지요. 아쇼카(Aśoka)의 연대도 확실치 않습니다. 사실 역사적 싯달타의 생애도 아쇼카의 치세와 연동하여 추론하곤 하는데 아쇼카도 확실한 기준이 되질 못해요. 그러나 아쇼카는 역사적인 존재성이 매우 확실한 사람이고 그의 치세는 대강 BC 268~232으로 학자간에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 아쇼카왕이야말로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친 것과도 같은 진실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마우리아왕조의 개창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handragupta Maurya)의 손자인 아쇼카는 인도역사상 최대의 온전한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찬드라굽타는 아라비아해에서 벵갈만에 이르는 영토, 북으로는 히말라야산맥, 남으로는 데칸고원의 대부분, 서로는 카티아와르반도(kathiawar Peninsula, 사우라슈트라Saurashtra라는 별명도 있다)에서 힌두쿠쉬산맥에 이르는 거대영토를 확보하였는데 그의 손자 아쇼카는 이를 한층 확대하였습니다. 아쇼카의 제국영토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방글라데시에 이르렀고, 타밀나두(TamilNadu), 카르나타카(Karnataka), 케랄라(Kerala) 몇 지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휘덮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찬드라굽타가 건설한 왕국이 바로 알렉산더대왕의 동정 이후의 사건이며, 찬드라굽타는 그리스의 군사적 지배권을 몰아내고 난다왕조를 무너뜨린 후 마우리아왕조를 창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의 찬란한 고문명이 헬레니즘의 찬란한 꽃을 피울 시기였다는 것이죠. 아쇼카왕의 치세기간은 이미 동서문명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대였어요.
불교사적으로도 아쇼카왕 시대에 많은 사건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우선 ‘결집’이라는 게 있어요. 산스크리트어로 ‘삼기티(saṃgīti)’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같이 노래부른다’라는 뜻입니다. 비구들이 한군데 모여 붓다의 가르침을 운을 맞추어 노래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기억을 확인해가면서 합의가 되면 그것을 성전에 적어 올리는 것이죠. 참 아름다운 광경이지요. 제가 말씀드렸지만 종교는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싯달타 그 개인에게 분명 위대한 소지, 그 씨앗이 있었겠지만 진정 불교를 만들어간 것은 결집을 해나간 사람들의 노력입니다. 싯달타 입멸 직후에 왕사성 교외에서 500명의 비구(아라한)들이 모여 제1차 결집을 했습니다. 이러한 성전 편찬대회의는 교단의 통일화를 위하여 매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장경이라는 것은 계율과 아함밖에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장과 경장 2장밖에는 없었던 것이죠.
그 뒤 불멸후 100주년이 되었을 때 제2차 결집이 일어났는데 이때 결집내용에 대한 이견이 일어나 정통주의적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가 분열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파불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3차 결집은 바로 아쇼카왕 때 일어났는데 이때 부파불교의 이론들이 성숙하고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즉 논장(論藏)이 성립하는 것이죠. 부파불교의 이론들이 성숙해져가는 과정이었죠. 이렇게 해서 삼장(三藏)체계의 대장경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파불교의 시대는 불타 입멸 후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기원전후 시대에 걸치고 있다고 보면 되겠죠(불타입멸을 BC 450경으로 잡으면, BC 350~AD 10년 정도까지를 부파불교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스투파문화와 개방된 성역의 형성
그러나 불교사적으로 아쇼카왕 시대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변화는 스투파신앙의 대중화라는 현상입니다. 스투파(stūpa)는 졸탑파(卒塔婆,) 솔탑파(率塔婆), 솔도파(率都婆)라고 음역되는데 약하여 탑파(塔婆), 그냥 탑(塔)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우리말의 ‘탑’이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스투파’의 음역이 변화하고 축약되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탑은 기와집처마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린 석조조형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양식적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목조건물모양이 석조화 된 것이죠. 그러나 인도인들의 스투파는, 우리의 탑의 개념과는 다른, 진짜 무덤인데, 벽돌을 엄청 크게 산처럼 쌓아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분황사 모전석탑이 그나마 그 원형을 조금 보존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아쇼카왕은 불교의 문화사적 가치, 그리고 그것의 세계사적 위상을 통찰한 인물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것처럼, 싯달타의 교설과 그에 대한 신앙을 대중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인도정신을 창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쇼카왕은, 붓다가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한 후 그 유골을 8부족이 나누어 8개의 불사리탑을 건립했다고 하는데, 그 8개의 불사리탑 중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 7개의 사리탑을 분해하여 그 유골을 재분배하여 전 인도에 8만 4천 개의 스투파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리’에 대한 미신적 신앙이 있습니다만, ‘불사리(佛舍利, bhagavato sarīra)’라는 것은 화장을 하고 난 유골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재까지 다 합했다고 하면 8만 4천 개로 나누는 것도 그리 불가능한 얘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8만 4천 개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불타스투파의 인도 전역 편재로 인하여 새로운 문화, 이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대중문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이 스투파가 여기저기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장엄한 모습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전통문화와 관련되어 지속되어 내려온 ‘탑돌이’라는 것이죠, 종교는 ‘기원(빔)’입니다. 화를 피하고 복을 비는 것은 인간의 지극히 평범한 심원(心願)이고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죠. 교회 나가는 사람도 예수를 믿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복 받고 마음 편하고 돈 잘 벌고 천당 가려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대중의 성향에 잘 부응하면 누구든지, 어떤 종교바닥에서든지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탑돌이’도 기원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데 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기축이 되는 사람은 돈 많은 집 마나님들이겠지요. 그런데 새로 생긴 부처님의 스투파! 얼마나 매력적이겠어요?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많은 공양물들을 지참하고 오겠지요. 부처님의 스투파에 꽃잎을 흩날리며 탑돌이를 했겠죠(『금강경』을 잘 읽어보면 이런 광경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다).
이 부처님스투파 탑돌이문화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싯달타라는 대각자가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그의 열반 후에는 그의 설법은 들을 수도 없었고, 그의 집단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루트가 전혀 개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기원정사 류의 정사나 비하라 같은 곳은 성문ㆍ독각의 수행처로서 고립되고 격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부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투파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도 부처님의 스투파이니 그곳에서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성취를 빌면 정말 효험이 있었겠지요. 다시 말해서 스투파는 승가집단 ‘외에’ 생겨난 부처님의 향내가 나는 개방적 공간이었습니다. 이 ‘개방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대승’이라고 하는 말의 실제적 의미의 전부라고 봐도 됩니다. 이러한 개방적 공간에는 남녀노소, 족보나 신분이나 사상적 성향이나 종교적 기호나 신념과 무관하게, 누구든지 올 수 있고 또 언제든지 집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계율도 없고 간섭자도 없고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이 모여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대중’이지요..
구라꾼과 보살과 보살가나의 등장
그런데 이 대중에게 한 가지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싯달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각자(覺者)인 붓다가 되었는가? 그의 인생스토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석가족의 성자)의 라이프 스토리는, 리얼 스토리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양식화 되어간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회를 전제로 하는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전생담(싯달타 전생의 이야기들. 본생담本生이라고도 한다)의 구라가 끝없이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귀부인들은 먼 길을 고생해서 왔는데 몇 시간 있다가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몇 날 며칠을 텐트를 치고 그곳에 체류하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석가모니에 관하여 유창한 구라를 늘어놓는 설화인(說話人)들은 귀부인들의 인기를 얻게 되겠죠. 인도는 참 온화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많은 문명입니다. 문명의 일반 수준이 낮질 않습니다. 이 ‘구라꾼(說話人)’들은 어느샌가 탑돌이커뮤니티의 존경 받는 리더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부를 많이 하여 싯달타의 생애와 교설에 관해 심오한 언설을 늘어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라를 풀다 보면, 자기 구라 속의 모델 인물인 그 주인공의 모습으로 자기가 변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석가모니를 생각하고 석가모니를 본받고 석가모니의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석가모니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각성, 자각이든 사람을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보살’은 ‘보리를 구현한 존재’, ‘보리를 향한 존재’. ‘보리의 실현이 그 본질인 사람’, ‘보리가 체화된 사람’이라는 뜻이지, 비구보다 더 낮은 단계의 사람도 아니고, 스님을 섬겨야만 하는 공양주보살도 아닙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불교라는 전체체제에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되었습니다. 비구중심의 승방정사에서 탑중심의 거대한 가람으로 불교중심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죠.
원래 스투파 주변에 설화인과 그들의 설교에 감화를 받는 신도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는데, 이 공동체를 차이띠야(caitya, 제다制多, 지제支提)라고 했습니다. 이 차이띠야는 항상 스투파 옆에 형성되기 마련이었고 그 전체가 하나의 가람이 된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절에 탑이 있는 것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보살의 커뮤니티(보살가나gaņa라고 부른다)에서나 가능한 새로운 현상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부처님 무덤을 끼고 승려들의 주거가 같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죠. 이 차이띠야 공동체는 승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적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잘되는 곳은 돈이 많이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일례를 들면 부파불교의 비구나 비구니는 스투파에 바쳐진 공양이나 시주를 계율상 일체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라꾼보살들은 그러한 하등의 제약이 없었습니다.
타부시되던 불상이 만들어지다
마우리야왕조는 아쇼카 이후 쇠퇴의 일로를 걷습니다. 그리고 AD 30년경에는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가 월지종족을 통일하고 박트리아의 문화를 계승한 쿠샨왕조를 세웁니다. 쿠샨왕조의 4대 왕인 카니슈카대왕(Kanishka I, AD 127~140 재위)이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논의한 바와 같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보살운동은 불상문화와 결합되면서 놀라운 힘과 체제와 하부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초기불교에는 계율이 심했고 타부가 많았습니다. 제일 큰 타부 중의 하나가 입멸한 석존은 절대 형상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형상의 윤회를 초월하여 무형의 세계로 들어간 불타를 또다시 형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不敬)이었고 반신성의 모독이었고 세속적 집착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불전도에는 세존의 발자국만 그려져 있는 것이 끽이었습니다. 형상화하지 않은 것이 정도(正道)였습니다.
그런데 월지가 들어간 박트리아는 알렉산더대왕의 부하장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셀류코스왕국의 주요 지방이 되었고, 짙은 희랍 문명의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희랍문명은 이데아의 세계를 이상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했고, 돌조각의 천재들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조각했습니다. 박트리아에서는 보통사람들 집안의 정원이 조각품으로 가득했습니다. 분수를 많이 만들었는데 분수도 오줌 누는 신동으로 꾸미는 것은 다반사지요. 그런데 아무런 초기불교의 타부를 모르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수대에 부처님 돌조각을 올려놓으면 집안 전체가 성스럽게 보였습니다.
스투파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구라꾼보살들에게는 귀부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일이고, 부파불교의 비구들이 지키는 타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누가 부처님얘기를 하는데 스투파 한 곳을 파서 불감을 만들고 그곳에 불상을 앉혀놓고(불상은 대강 보리수 밑에 앉아 증득하는 모습) 싯달타의 고행과 정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인기가 짱이죠. 시주도 더 많이 들어옵니다. 듣는 사람도 훨씬 더 실감납니다. 불상은 순식간에 퍼져가고 돈이 되니깐 전문제작인들이 생겨나고, 또 주문자들의 원칙이 서게 됩니다.
불상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문제는 정론이 없지만, 간다라 지역과 마투라지역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불상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나는 이 제작시기를 기원 전후, 그러니까 1세기 초 혹은 약간 그 이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불상학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 최초의 연구가 타카타 오사무(高田修, 1907~2006, 동경제대 인도철학과 출신]의 『불상의 기원(佛像の起源)』입니다. 저는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1967년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타카타의 불교미술 연구시각은 일본의 불교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간다라지역의 불상은 매우 희랍적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련미가 있는데 반해, 마투라지역의 불상은 투박하고 토착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절깐에 가서 대웅전의 부처를 본다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대웅전(大雄殿)’이라는 말도 웃기잖아요? ‘큰 수컷이 앉아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니 이런 권위주의적이고 위압적인 이름은 초기불교와는 거리가 멀죠. 중국에서도 당나라 중기 이후에나 생겨나는 말인데 무슨 ‘마쵸’를 강조하는 그런 관료주의 냄새가 나죠(금부처가 앉아있는 것이 하도 희한해서 처음에는 그냥 ‘금당’이라 불렀다).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전혀 다른 성격 다섯 가지
자아!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간결하게 대승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불경스럽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자각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리리타(自利利他)’, ‘자각각타(自覺覺他, 스스로 깨우침으로써 타인을 깨우침)’의 염원을 제1의 목표로 삼습니다. 자기의 구제만에 전심하여 타인의 구제를 등한시하는 소승의 종교가 아닙니다. 철저히 구도의 과정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죠. 경직된 계율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 것’ 정도로 불살생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율의 본래적 의미는 자기만 살생하지 않으면 오케이가 되는 계율이 아닙니다. 타인으로 하여금 살생치 못하게 하는 계율도 된다는 것입니다. 불살생의 계는 나의 청정만으로 지켜지는 계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구한다, 타인을 생명의 위협에서 건지는 계가 되는 것이죠.
둘째는, 대승불교는 일체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없는, 양자가 일관(一貫)되는 체제와 경지에서 출발한 새로운 종교운동입니다.
초기 불교는 어디까지나 출가자 비구들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재가자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종교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나라의 비구승가를 특별한 권위체로 인정하는 모든 체제는 사실 소승이지 대승이 아닙니다. 비구는 빌어먹기만 할 뿐,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비구는 돈, 권력, 절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초기 승려들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 내의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은 후대에 생겨난 방편일 뿐입니다. 초기대승불교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습니다. 삼보(三寶)가 일체였습니다. 그리고 출가보살의 독자적인 계율도 없었습니다.
셋째로, 대승불교는 보편적 인간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난행도(難行道, 어렵게 달성되는 길: 공부. 이지적 깨우침)와 이행도(易行道, 쉽게 달성되는 길: 염불, 신앙)를 포섭합니다.
행(行)과 신(信)을 다 중시하며, 우자(愚者), 약자(弱者)라 할지라도 구원에서 빼놓지 않습니다.
넷째로, 대승불교는 보살 일승(一乘)의 종교입니다.
성문, 독각, 보살, 삼승(三乘)의 구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타에 대한 관념도 매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불타는 이미 색신의 싯달타가 아닙니다. 색신(色身)의 불타는 사라지고 법신(法身)으로서의 불타가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모든 이론의 도약을 가져오게 되지요.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 이러한 법신에 대한 이해가 없어 도그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색은 모든 인간이 보살이라는 신념에 있지요.
소승의 아라한은 불타의 가르침을 따라 번뇌를 단절한다는 소극적 자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불타와 동일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의 인간입니다. 소승의 아라한은 보살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원래 등신불의 불상을 앞에 놓는 것도 그것이 숭배의 대상이거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의 인간을 숭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증득하는 그 모습을 앞에 놓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죠. 불상숭배는 실상 모두가 보살신앙에 속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대승화 의의
세부적인 면에서 얘기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대승불교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 『반야심경』 본문에 즉하여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보기로 하죠! 대승불교의 혁명적 성격을 우리는 너무도 진부한 상식적 언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예를 들자면, AD 1세기에 일으킨 예수운동(Jesus Movement) 그 자체는 오히려 매우 혁명적이고 구약(소승)에 대하여 대승적인(신약: 새로운 약속)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면서 정경화 되었고 권위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그 권위를 뒤엎는 새로운 대승의 개방의 과정을 겪지 못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도 일정한 권위의 틀 속에서만 머문 것이고 진정한 대승의 종교혁명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아나밥티스트들(Anabaptists, 자각적이지 못한 유아세례는 무효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의 주장도 수용하지 못하고 박해했으며,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 종교개혁시대의 래디칼한 신비주의 설교자. 루터에 반대)의, 성경은 단지 과거의 영적 체험의 잔재일 뿐,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영적 생명력을 갖지 않는 한 휴지쪽일 뿐이라는 주장을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뮌처는 비참하게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역사적 불타로부터 한 500년간 지속되어온 초기불교의 모든 이스태블리쉬먼트(establishment, 질서)를 뒤엎었습니다. 교리와 교단조직과 성원(成員)의 성격까지 모두 뒤바꾸는 혁명을 감행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출현이 없었더라면, 호모사피엔스가 이 지구에서 만들어낸 모든 종교는 그야말로 사악한 도그마와 배타와 전쟁의 판타지만 만들고 스러지는 그러한 족적만을 남기지 않을까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가 아닌 반불교, 종교가 아닌 반종교의 위대한 언설이라는 나의 첫 인상을 이제 확인해봅시다.
『심경』 8종, 그리고 대본과 소본
우선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하는 경전은 AD 649년에 현장(玄奘)이 역출(譯出)했다고 하는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고 있고, 그 가장 정종이 되는 판본은 우리 고려제국의 대장경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이 인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 4년 만에 이 『심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장 이전에, 일례를 들면 구마라집(350~c.409)이 번역한 『심경』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대정대장경에 수록된 『반야심경』만 해도 다음의 8종류가 있습니다. 학구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8종을 우선 써보겠습니다.
1.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1권,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 No.250
2.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현장 역(649), No.251
3. 『보편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법월(法月, Dharmacandra) 중역(重譯), No.252
4. 『반야바라밀다심경』 1권, 반야(般若, Prajῇâ)와 이언(利言) 등이 공역(共譯, 790). No.253
5. 『반야바라밀다심경』 1권, 지혜륜(智慧輪, Prajῇācakra) 역(861). No.254
6. 『반야바라밀다심경』 1권, 법성(法成) 역(856). No.255
7. 『당범번대자음반야바라밀다심경(唐梵翻對字音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불공(不空, Amoghavajra) 음역(音譯, AD 746~774경). No.256
8.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佛說聖佛母般若波羅蜜多經)』 1권, 시호(施護, Dānapāla) 역(AD 1000년경). No.257
여기에 제가 든 8개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모두 타카쿠스가 편한 대정대장경 제8권에 실려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쉽게 그 동이(同異)를 대조해볼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만 해도 현존하는 산스크리트본에 따라 대품계(大品系, 대본大本이라고도 한다)와 소품계(小品系, 소본小本이라고도 한다)로 나눌 수 있는데 소품과 대품은 아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품은 더 축약되어 있고, 대품은 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또 상황설명도 자세합니다. 일례를 들면, 소품은 곧바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혹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 시작하지만, 대품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개대환희 신수봉행(皆大歡喜 信受奉行)’으로 끝납니다. 대품은 전통적 경전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지요.
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자아! 그렇다면 구마라집의 번역은 소품일까요, 대품일까요? 우리가 보통 소품이라 하면 현장(玄奘)의 『심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라집의 번역을 대품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라집의 번역은 현장의 것과 같은 소품계열입니다. 상기의 8개 중에서 소품계는 1ㆍ2ㆍ7뿐이고 나머지 5개는 다 대품계입니다. 그런데 제7의 『심경』」은 번역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본을 발음대로 한자로 써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한자발음기호지요. 얼마나 부정확한 발음표기이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음역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자의 음가를 재구(再構)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사실 불경 때문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이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품계 한역은 라집 것과 현장 것 두 개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금강경』 번역을 놓고 생각해보죠. 『금강경』의 라집역을 우리는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玄奘)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는 것은 제가 이미 저의 『금강경강해』(신판 53쪽을 참고할 것)에서 충분히 해설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 번역의 경우 현장의 신역이 라집의 구역에 영 못 미칩니다. 이것에 대한 해설도 제가 이미 충분히 『금강경강해」에서 논구한 것입니다. 문장의 간결성과 심미적 아름다움과 의미전달력과 반복의 리듬감에 있어서 도저히 현장의 신역이 라집의 구역의 오리지날리티(originality)를 못 미치는 것이죠. 『금강경』의 경우는 라집역이 월등히 좋다! 그런데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우는 현장역이 월등히 좋다!
자~ 그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우도 그까짓 260 자밖에 안 되는 동일 텍스트인데 어찌하여 라집역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고 현장(玄奘)역이 절대우위를 차지했을까? 어떤 연유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자아~ 이런 문제를 텍스트 크리틱을 해가면서 접근하면 또 하나의 책이 필요합니다. 이런 문제는 텍스트 비평의 전문영역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계는 문헌의 고등비평에 너무 소홀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텍스트비평적 시각을 자세히 펼치자면 너무 난감한 문제가 많습니다. 결론만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누구든지 문헌비평의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라집역과 현장역을 비교해 놓고 보면, 라집역이 너무도 졸렬하고 같은 의미체계를 쓸데없이 반복하거나, 전달하는 내용도 그 포괄성이나 심미적 질감에 있어서 현장역에 썩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선 제목만 비교해보아도 당장 라집역의 저열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라집 제목 | 현장(玄奘) 제목 |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蜜多心經 |
가장 큰 차이는 ‘심경(핵심이 되는 경전)’이라는 말을 ‘대명주경’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습니다. ‘흐리다야 수뜨람(hṛdaya-sūtram)’을 ‘대명주경’이라고 바꿀 이유가 없지요. ‘대명주(大明呪, 크게 밝은 주문)’라는 말이 본문 속에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반야바라밀다’를 일종의 주술적인 주제로 간주하여 그것을 제목으로 내건다는 것은 ‘반야’의 사상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대명주의 ‘명(明)’은 ‘무명(無明)’에 반대되는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 이미 ‘반야’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을 주술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대명주경’이라는 제목에는 후대 밀교적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반야바라밀다’가 ‘반야바라밀’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축약형이 아무래도 더 후대의 관례인 경우가 많지요.
셋째로 ‘마하(摩訶)’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미 ‘반야바라밀다’는 대승운동에서만 가능한 개념입니다. 그 앞에 ‘마하(크다, 위대하다)’라는 군소리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원어도 ‘prajñāpāramitā’이지 그 앞에 ‘마하’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 그 얼마나 간결하고 심플한 제목입니까?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좀 촌스러운 무당집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라집은 다른 계열의 소품 산스크리트본을 기초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라집역을 현존하는 많은 산스크리트본과 대조연구한 결과, 라집본은 결코 산스크리트원본을 전제로 한 번역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라집본은 현장(玄奘)의 한역을 보고 적당히 개작한 후대의 날조품이다라는 얘기가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왜 사람들이 현장역을 택하고 라집역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쉽게 설명이 됩니다. 현장역 이전에 라집역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은 불교사에서 라집의 『대명주경』이 언급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죠. 라집은 현장보다 2세기 하고도 반이 이른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라집의 『반야심경』 번역이 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최초의 기록은 지승(智界)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AD 730)에 나오는데, 그 시점은 현장역보다 81년 후의 시점입니다.
하여튼 복잡한 얘기는 그만둡시다. 라집역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그 텍스트도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가장 권위 있는 최초의 『심경』은 우리 고려제국의 대장경 속에 들어있는 현장(玄奘)의 『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하는 것만을 기억해두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전체가 부정될 수도 있으며 라집의 번역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독단은 불가합니다. 라집이 번역한 대품반야경계열에 2만5천송에 해당되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라는 책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라집 번역본에서 『반야심경』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구문들을 뽑아 라집의 『대명주경』과 비교를 해보면 도저히 『대명주경』의 문장이 라집의 친필이라고 믿겨지질 않아요. 하여튼 이런 문제는 생략키로 하지요. 저는 단지 왜 현장(玄奘)의 『심경』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보았을 뿐입니다. 최종적 결론은 이것입니다.
『반야심경』에 관해서는 현장의 『심경』 텍스트만을 확실하게 이해하면 만사 오케이!
바라밀의 해석
다음, 우리는 제목이 되는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해설해야 하겠습니다.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출발이다’라는 말은 누누이 반복되었습니다. 반야사상은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정의된 사상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대승불교는, 우리가 소승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지만, 그냥 방편상 그렇게 부르고 있는 초기불교의 승가집단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조직과 이론으로부터 발생한 새로운 불교운동입니다.
여러분! 대형버스와 고급자가용세단과 뭐가 다를까요?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세단은 안면이 있거나 신분이 있거나 특수관계에 있는 소수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싼 버스표만 있으면 탈 수 있지요. 작은 수레(소승)와 큰 수레(대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계율의 문제입니다. 소승은 계율이 250가지나 되는 매우 복잡한 자격을 지녀야 올라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에게는 그러한 계율이 무의미했습니다. 세목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널리 구원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같이 큰 수레에 태워야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려면 계율이 유연성 있게 운영되어야 하고 또 혁파될 것은 혁파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새로운 대승의 실천원리가 이른바 ‘6바라밀(六波羅蜜, 육도大度)’이라고 하는 것이죠.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知惠라고도 쓴다)라는 것인데, 250계율과 같은 것에 비하면 매우 일반화 되고 추상화 되고 유연성 있는 원칙이 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6번째의 지혜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 6바라밀은 반야의 바라밀에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서 앞의 5바라밀은 제6바라밀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죠.
자아! 우선 ‘바라밀’이 무엇인지 살펴보죠! ‘바라밀다(pāramitā)’는 ‘최고의’라는 뜻을 가지는 형용사 ‘parama’로부터 파생한 말, ‘pārami-’에,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tā’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추상명사입니다. ‘극치, 완성’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또 한편 교의적인 어의해석을 내리는 사람들은, ‘저기 저 언덕에 가는 것, 간 상태’를 의미한다고 고집하죠. 이것은 피안(彼岸)을 의미하는 명사 ‘pāra’의 목적격인 ‘pāram’에 ‘간다’라는 의미가 있는 어근 ‘i’를 붙여서 ‘피안에 가는 자, pāramit’라는 명사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문법규칙에 의하여 최후의 ‘t’를 생략하고, 접미사 ‘tā’를 첨가하여 ‘pāramitā’라는 복합어를 탄생시키죠.
어학적으로 볼 때에는 전자의 ‘극치, 완성’이라는 해석이 더 타당성이 있어요. 보다 소박한 해석이죠. 그러나 교의적으로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도피안(度彼岸)’의 어의를 선택합니다. 티베트경전이나 한역경전에 후자적 해석이 많이 등장합니다. ‘도피안(度彼岸)’, ‘명도(明度)’ 등의 역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결합해서 생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저 언덕 즉 ‘피안’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 즉 ‘깨달음’을 의미하죠. 실제로 개울을 건넌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그렇다면 ‘피안’은 ‘탁월함의 극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바라밀다’라는 것은 ‘탁월함의 극치에 가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완성’을 의미하죠. 라집이 번역한 논서(論書)에 『대지도론(大智度論)』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제 ‘대지도’라는 말과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겠죠? 음역과 의역에 따라 외관상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지도론』은 인도의 대사상가인 용수의 저작으로서, 대품계열 반야바라밀다경의 주석서이지요.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자아! 이제 앞에서 말한 ‘6바라밀’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다 바라밀이 붙지만(보시바라밀, 지계바
라밀…… 이런 식으로) 실제로 ‘완성’을 의미하는 ‘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5덕목에는 붙을 수가 없습니다. 앞의 5덕목은 오직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만 바라밀의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6바라밀’이라고 하지만 지혜바라밀은 여타 덕목과 차원이 다른 것이죠. 여기에 나는 여러분께 “계율과 지혜의 길항성” 이라는 인간 보편의 테마를 제시하려 합니다.
대승은 비구ㆍ비구니집단이 아닙니다. 오늘날 해인사ㆍ송광사 등의 절간에 출가하는 자들에게는 대승을 운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소승집단이 되어버린 것이죠. 소승이라고 꼭 나쁠 게 없어요.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으니까요.
그런 이전의 250개나 되는 초기불교 승가계율이라는 것은(실제로 그보다 적을 수도, 더 많을 수도 있다) 그 특징이 재가자와 출가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데서 출발하는 계율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계율은 기본적으로 비사회적ㆍ출세간적 소극적 계율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계율은 보살에게는 맞지 않아요. 보살은 우선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없었고 활동이 대중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대승의 계율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관한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보살의 계율은 사회적ㆍ세간적 계행(戒行)에 관한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사회적ㆍ세간적인 적극적 계행이 바로 ‘6바라밀’로 결정화(結晶化) 된 것이죠. 꼭 6개만 있겠어요? 처음에는 4바라밀, 10바라밀, 다른 덕목의 6바라밀 등 다양한 것이 있었다 해요. 그 외로도 초기대승 교도들이 지켜야 할 ‘십선업도(十善業道)’라는 것이 6바라밀과 더불어 중요한 계율로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탐욕(貪欲), 진에(愼恚), 사견(邪見)의 악행을 벗어나는 것이죠. 이것은 모두 사회생활 하는 데서 지켜야 할 덕목들입니다. 그리고 탑돌이커뮤니티에서 ‘구라꾼’들이 귀부인들이 가져다주는 좋은 술을 너무 먹으니까 ‘불음주(不飮酒)’라는 덕목이 특별히 첨가되었다고 해요. 요즈음 우리나라 스님들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두 잔이야 문제없지만 끊임없이 과음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스님생활 하려면 술을 들지 마세요. 오현 스님과 같은 특별한 경지를 함부로 흉내내지 마세요.
좌우지간 계율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경직화되고 세분화되고 교조화되면 주자학 또라이들보다도 더 못한 맹꽁이가 되어버려요. 밴댕이콧구멍 만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이 계율에 눌린다는 것은 비극적 상황입니다. 보살혁명은 계율혁명이었습니다. 승가가 아닌 새로운 보살가나(gaņa, 보살커뮤니티: 부파불교시대까지의 승가僧伽와 다른 개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보살가나에도 새로운 계율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6바라밀’입니다.
타율적 계율이 느슨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적 지혜는 고도의 자기 조절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율적 자기컨트롤 능력이 없을 때는 당연히 타이트한 계율 속에서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느슨해진다 loose |
느슨해진다 loose |
|
↑ | ↑ | |
계율 | 지혜 | |
△ | ||
↓ | ↓ | |
타이트해진다 tight |
타이트해진다 tight |
대승의 발전은 계율의 느슨함을 초래함과 동시에 지혜의 특별한 수행, 특별한 자각적 바라밀다, 완성의 길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 벼락경과 아상 버리기
여기서 아예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 좋겠군요. 여러분들께서 제 『금강경강해』를 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아예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어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동일한 주제를 전달하는 대승경전인데, 『금강경』의 주제는 초장에 이미 적나라하게 노출되어있습니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열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불타가 말합니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예수가 말합니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사람들의 죄업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다. 그러나 나는 실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불타는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구문명은 영원히 유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치하다(childish)’하는 것은 열등한 도그마의 절대적 선을 주장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구역사에서는 진정한 혁명이 불가능합니다. 정치적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곧바로 기존의 도그마로 회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타나 예수나, 그들의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위대성은 단 하나! ‘아상(我相)’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승은 전혀 초기불교ㆍ부파불교와는 다른 갈래에서 나온 매우 혁명적인 새로운 교설이었지만 결국 ‘무아(無我)’라는 이 한 가르침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무한한 혁명을 수용합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불교가 무한한 혁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최초의 원초적 핵심에 불교가 이래야만 한다는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혜의 완성’ ‘지혜의 배를 타고 피안으로 고해를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바로 아상(我相)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이라는 번역어가 나올 때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은 없었습니다. ‘금강경’을 ‘다이아몬드 수트라’라고 영역하는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금강은 ‘금강저’를 말하는데 그것은 희랍의 제신 중의 대왕인 제우스가 휘두르는 무기나 인도신화에 나오는 ‘바즈라(vajra)’라는 것인데, 그것은 ‘벼락(thunderbol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실제로 ‘벼락경’ ‘벽력경(霹靂經)’으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멸집(滅執)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벼락을 보통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죠.
벼락 ↓ |
||
나 | → 집착 |
대상 |
그러나 『금강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이 말하는 멸집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벼락 ↓ |
||
나 | → 집착 |
대상 |
벼락이 나에게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죽습니다. 나는 가루가 되어버립니다. 벼락을 맞아 가루가 된 나!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오온(五蘊)이 해체된 나, 그것을 바로 ‘공(空)’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온 그 자체가 공이지요.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항상 아상(我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최소한 이런 계율은 지켜야지’ ‘나는……’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상을 죽이는 수행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계율이기는 하지만 타율적 수율(守律)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기수련입니다. 예수도 구세주라는 아상을 가지고 있다면 구세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학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상에 울부짖은 한마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אלי אלי למה סואחטאני,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기부정의 인간이었다는 것이죠.
과연 아상을 버린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아는 아트만의 부정이다! 아트만의 부정은 실체의 부정이다! 이런 말을 천만 번 뇌까려도 그 의미가 뼛속 깊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무 살 초경에 광덕사 변소깐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260자와 석 달 동안 진검대결을 벌인 후에 제가 쓴 오도송 하나를 여기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쓴 최초의 오도송은 한문이 아닌 순한글로 썼습니다. 그것도 일곱 자입니다.
나는 좆도 아니다.
이것이 나의 오도송의 전부입니다. 아 씨발 나는 좆도 아니다. ……
이런 아주 비근한 의식 속에서 나는 향후 50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평론을 한 것을 가지고 고소를 당하고 경찰서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의 오도송은 여전합니다. 나는 좆도 아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피 흘린 가없는 중생들, 좆도 아니라고 무시당한 수없는 이 민족의 원혼들을 달랠 수가 있다면 ‘좆도 아닌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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