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
귀족의 전성시대는 끝났다. 아직도 그리스에서 가장 힘센 세력을 꼽으라면 단연 귀족이겠지만, 이제는 그들도 과거처럼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정치권력도 함께 보장받기는 어려워졌다. 구태의연한 귀족은 몰락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시대적 감각에 눈뜬 귀족만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럼 ‘새 시대의 귀족’은 어떻게 했을까?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 그 역사가 상세히 전해지는 아테네의 상황에서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를 엿볼 수 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우선 전통적인 정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수용하기로 했다. 전통적인 귀족정치는 과두정, 즉 집단 지배 체제였다. 의사 결정 기관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회의를 여기서 열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라는 귀족 회의체였으며, 행정의 총책임자는 귀족들이 돌아가며 맡는 집정관(archon)이었다. 집정관은 행정·군사·종교·재판 등의 분야별로 모두 아홉명이 선임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그때까지 귀족들은 이 전통적 정치제도를 이용해 모든 일을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했다. 그러나 이제 평민들의 새로운 요구가 등장한 만큼 더 이상은 그런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명문화된 법전이었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걸린 사안을 귀족들의 자의적인 결정에 맡겨두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 요구에 굴복해 귀족들은 법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드라콘의 법전이다. 이 법전은 기원전 621년 드라콘이라는 사람(그는 전설에 전하는 인물로, 집정관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귀족이었을 것이다)이 당시까지 전해오던 관습법을 집대성해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법전은 사태를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드라콘의 법전은 아고라에 공시되어 그전까지 이루어지던 귀족들의 주먹구구식 판결을 금지하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이 점이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독한 악법이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지나친 중벌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제때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된다는 조항은 고대 세계에 흔한 징벌이었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면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은 너무 가혹했다. 심지어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도 사형에 처해졌다. 후대의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년경~120년 경)는 드라콘의 법전을 ‘잉크가 아니라 피로 쓴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 아크로폴리스 아고라가 사람들의 법이 공시된 곳이라면, 아크로폴리스는 신들의 법이 관철되는 곳이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인데, 주변 지대보다 100미터가량 높은 언덕에 있다. 오른편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아테나 여신을 모신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한 사람은 솔론Solon(기원전 640년경~기원전 560년경)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 오리엔트 세계를 두루 여행했고, 많은 사람의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기원전 594년에 집정관이 되어 개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노예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일이었다.
드라콘의 법전에서 보듯이, 그리스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게 관습이었다.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 몸을 담보로 빚을 얻어 썼다. 그런 혹독한 조건의 빚을 쓸 정도라면 사실상 그 빚을 갚을 능력이 거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농민들은 걸핏하면 지주의 노예가 되었고, 심지어 해외에 노예로 팔려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는 유일한 조치는 부채 탕감밖에 없었다. 솔론은 일단 공적 채무와 사적 채무를 모두 말소시켜 노예가 계속 늘어나는 현상을 막았다.
채무 노예의 증가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면, 평민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하나밖에 없었다.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아레오파고스나 집정관을 선출하는 일은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종전까지 그리스의 정치는 무엇보다 신분을 우선시했다. 여기에 평민을 참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정이라는 중대사에 아무나 끼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솔론이 찾아낸 기준은 바로 재산이었다. 그는 시민들을 재산 소유에 따라 지주(대귀족), 기사(중소 귀족), 농민, 노동자의 네 계층으로 나누고, 이 구분에 따라 정치 참여의 자격을 부여했다【이렇게 재산을 참정권의 기준으로 삼는 방식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의 역사에서 답습되었다. 재산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참정권이 주어지는 보통선거권은 19세기부터 일부 실시되었고, 20세기 중반에야 유럽 전체에서 시행된다】.
귀족정치의 골간을 잃지 않으면서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한 솔론의 개혁 조치는 시의적절하고 절묘한 타협책이었다. 그래서 솔론은 ‘조정자’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조치들이 과연 제대로 기능할 것이냐에 있었다.
솔론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중도적인 성격이었다. 전통적인 귀족들을 어르면서 떠오르는 평민층을 달랜다. 잘되면 일석이조가 될 수 있지만 잘못되면 양쪽에서 뺨을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의 결과는 후자였다. 솔론의 개혁은 불과 한 세대를 가지 못하고 좌초했다. 귀족도, 평민도 그 개혁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막 생겨난 민주정치의 싹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 판이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예전과 같은 귀족정치가 불가능해졌다면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 일부 귀족들은 평민 세력과 손을 잡고 권력 구도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민들의 힘을 등에 업고 권력에 복귀한 귀족들은 공교롭게도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왕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동안 실권은 잃었어도 왕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지배자를 왕으로 칭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귀족들은 새로 권좌에 등장한 ‘사실상의 왕’을 참주(僭主, tyrannos)【참주라는 말에서 tyranny(전제정치), tyrant(독재자)라는 말이 나왔지만,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참주란 주인, 주군을 뜻하는 리디아어에서 나온 말로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왕이 된 자를 가리킬 뿐 압제를 일삼는 독재자라는 의미가 없었다. 초기의 참주들은 오히려 종래의 세습 군주들보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폴리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공헌했다. 이 말이 부정적인 색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좀 더 후대인 기원전 5세기부터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리하여 아테네는 참주정치(tyranny)의 시대로 접어들었다(아테네의 참주정치는 불과 50년 만에 끝나지만 그리스 전체로 보면 기원 전 1세기 무렵까지 참주정치가 지속되었다).
기원전 565년 아테네는 이웃 폴리스인 메가라와 최초의 대외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쌓은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기원전 600년경~기원전 527)는 4년 뒤 평민의 지지와 군대의 무력을 기반으로 참주에 올랐다. 그는 솔론의 친척이기도 했지만 갓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숙제로 남아 있던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권력 강화와 빈농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인 셈이다. 또한 그는 농민들에 대한 세금을 생산물의 10분의 1로 줄이고 평민들의 생활 기반인 상공업을 장려했다. 특히 그는 트라키아의 은광을 접수하고 흑해 방면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등 대외적인 면에서도 큰 업적을 쌓았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한 데는 그의 공로가 컸다.
사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노선이 일관되게 유지되었더라면 이후 아테네와 그리스는 당시 오리엔트나 중국의 역사처럼 평범한 군주국의 역사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족들의 집단 지배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아테네의 귀족과 시민 들은 단일 군주의 권력을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사실 그리스가 오리엔트나 중국처럼 문명의 중심지였다면 귀족 연합 정권이 그토록 오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귀족정치보다는 왕정이 더 발달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그리스가 오히려 (오리엔트에 비해) 문명의 후진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마치 동 시대의 다른 세계에 비해 앞선 것처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도 당대의 영웅이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 때는 그런대로 참고 지냈으나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Hippias, 기원전 560년경~기원전 490)가 참주 자리를 세습하자 귀족들은 입이 잔뜩 부었다. 왕정도 불만인데 왕위 세습까지 이루어졌으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히피아스는 집권 초반에 아버지의 개혁을 계승하고 귀족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잘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514년 동생인 히파르코스가 귀족들의 손에 암살되는 것을 계기로 그는 폭군으로 돌변했다. 그의 탄압을 피해 달아난 귀족들이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Kleomenes, ?~기원전 490)를 끌어들여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히피아스는 실각했으나 이 사건은 나중에 그리스 세계 전체의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 귀족들의 도장 아테네는 귀족의 전통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지만, 평민들이 성장하면서 귀족들은 평민을 등에 업지 않으면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사진은 그리스 귀족들이 사용한 도장들이다. 모두 동물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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