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꽃
중세의 줄기가 피워낸 꽃은 세 송이다. 먼저 유럽 세계의 막내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충분히 활용해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다. 이들이 유럽으로 가져온 막대한 부는 유럽 문명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는 데 커다란 밑천이 되었다.
한편 정정이 복잡한 북이탈리아에서는 인간을 신에게서 해방시킨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일어난다. 인문주의의 파도가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밀려들면서, 원래부터 종교적 모순이 첨예했던 독일 지역에서는 종교개혁의 물꼬가 터진다.
이제 중세의 큰 특징이던 종교적 통합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유럽 세계는 다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끝 전쟁을 통해 개별 국가를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1장 다른 세계를 향해
신앙과 양념
15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당시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1권 462쪽에서 보았듯이 곧 통합을 이루니까 이제부터는 에스파냐를 나라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다)는 수백 년동안 진행된 레콘키스타가 거의 완료되었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뒤늦게 중앙집권적 왕국의 기틀을 갖춘 두 나라는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새삼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서유럽 세계에서 어느새 그들은 후진국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지역이었으므로 정치적 여건상 그렇다 치지만, 이베리아는 오랜 이슬람 지배로 서유럽 문화권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탓에 남들이 토끼처럼 달려갈 때 거북이처럼 기어온 것이다.
로마 시대에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로마의 주요한 속주라는 점에서 보면, 이베리아는 게르만 전통의 프랑스나 영국보다도 훨씬 먼저 로마 문명의 혜택을 입었던 지역이다. 그런데 지금은 영락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베리아인들은 당연히 이슬람이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야만 비로소 이 치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꿈을 이루려면 먼저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이교도들의 세상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시험 범위를 알아야 공부를 할 것 아닌가?
우선 이베리아의 동쪽은 유럽과 지중해, 그 너머에는 아시아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는 전통 사회들이 득시글거렸으므로 그들의 시험 범위가 아니었다. 또 사하라 이북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북아프리카는 중앙아시아와 더불어 이슬람의 본산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슬람의 손아귀에서 갓 해방된 이베리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 ‘구세계’의 모든 지역은 중세에 새로이 서양 문명의 핵심으로 성장한 서유럽 강국들의 관할 구역이었으므로 이베리아의 신참들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전력을 투여할 곳은 서쪽의 망망한 대서양과 남쪽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뿐이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새로 일굴 터전도 역시 이 방면뿐이었다. 저 바다 너머에는 뭔가가 있겠지. 대항해시대를 연 종교적 동기는 이렇게 무르익어갔다.
▲ 세계지도를 그리는 유럽 역동적인 역사를 전개한 유럽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도 가장 앞섰다. 그림은 15세기에 그려진 세계지도다. 유럽과 아프리카 서해안 일부 이외에는 엉성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래도 전 세계를 하나의 지도에 담으려 한 유럽인들의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대서양으로 진출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 옛 오리엔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중세 내내 지중해는 문명의 모태 그 자체였다. 유럽 문명의 씨앗을 실어온 것도 지중해였고, 뿌리를 키우고 줄기를 뻗게 한 것도 지중해였다. 그뿐이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중세 3대 발명품을 비롯해 중국에서 생겨난 온갖 문물이 유럽에 전해지는 통로가 된 것도 지중해였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비단길을 통해 또 다른 세계 문명의 발원지인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한 뒤 지중해를 통해 부지런히 유럽으로 실어 날랐으며, 게다가 인도의 과학이나 아라비아 자체에서 발생한 그리스 고전 연구의 성과까지 유럽 세계에 전해주었다(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르네상스의 발생에 큰 역할을 한다). 이처럼 지중해가 없었다면 서양 문명의 발생과 전파, 발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베리아는 지중해 연안에 있으면서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동안 이베리아의 역사는 지중해 때문에 피해를 본 경우였다.
중세 후기에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무너진 것은 문명의 중심이 서유럽으로 확고히 옮겨간 계기가 되었고, 이베리아가 이슬람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되는 데도 적잖이 기여했지만, 이베리아인들이 얻은 소득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지리적 여건상 당연히 그들도 한몫을 차지해야 할 지중해 무역권은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동방의 문물은 일단 이탈리아의 항구들에 집적되었다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에까지 전달되었는데, 육로는 이베리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해로는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상인들이 장악했다. 이베리아인들은 상선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빙 돌아가며 큰돈을 버는 모습을 뻔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동방의 문물 가운데 가장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향료였다【향료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향료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기원전 2000년경에 나온다. 그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향료를 유럽에 수출하는 것으로 이득을 남겼으니, 향료 무역은 수천년 동안 변함이 없었던 셈이다. 이 구도가 깨어진 게 대항해시대부터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도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동기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칭기즈칸의 서역 원정에도 향료 무역에 대한 관심이 개입되었을지 모른다(적어도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향료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향료라고 하면 양념이 연상되지만 당시의 향료는 단순히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용도 이상의 필수품이었다. 향료는 고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주었고, 와인을 비롯한 각종 술을 빚는 데도 반드시 필요했다. 몰약, 계피, 바닐라, 코코아, 사프란 등이 모두 향료였으나 그 가운데 으뜸은 후추였다.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가장 큰 무역 이익을 가져다준 것도 바로 후추였다.
향료 무역의 수익률은 대단히 높았다. 향료를 실은 선박 여섯 척 가운데 다섯 척이 도중에 침몰한다 해도 한 척만 무사히 돌아오면 이윤을 남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상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향료의 원산지였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라비아 대상들이 알렉산드리아나 시리아의 항구까지 실어온 향료를 받아다 서유럽에 납품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므로 향료 원산지를 알 수 없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향료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후대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섬들이 원산지라는 사실이 알려지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인도 어디쯤이라는 정도만 알았고, 더욱이 인도가 어딘지 자체도 몰랐다.
그런데 ‘신앙과 양념’의 문제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확대하는 일과 향료 원산지를 찾는 일은 결과적으로 서로 중복되는 사업이었다. 어차피 기존의 그리스도교 세계 내에는 향료 원산지가 없으니까. 타고난 모험심으로 ‘항해가(Navegador)’라는 별명을 얻은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Henrique, 1394~1460)는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엔리케가 먼저 관심을 가진 지역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였다. 젊은 시절 그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도시 세우타(지금의 모로코)를 정복했을 때 남방에 관한 흥미로운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프리카 내륙 어느 곳에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사람이 세운 왕국이 있는데,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서 일찍이 십자군 전쟁보다 앞서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서 탈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왕국과 손잡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세상은 훨씬 앞당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엔리케의 귀에는 아프리카의 황금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아프리카 남쪽 어딘가에는 온통 황금으로 된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프레스터 존과 황금 이야기는 둘 다 전설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프레스터 존의 왕국은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에티오피아는 기원전 1000년경에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가 세웠다고 한다(에티오피아인들은 1975년에 사망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까지 그 왕통이 이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 후 7세기 무렵 아라비아의 셈족이 에티오피아로 이주해왔다. 솔로몬의 자손에다 셈족의 혈통인 탓에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그리스도교 국가다. 또한 아프리카의 황금 이야기는 지금의 황금 해안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엔리케가 들은 소문은 헛소문이 아닌 셈이다】.
▲ 세계에 관한 전설 모르는 것은 두렵다. 낯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어떤 세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 이외의 다른 세계에 그림처럼 가슴에 얼굴이 있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프랑스와 영국이 서유럽의 패권을 놓고 백년전쟁을 한참 벌이고 있을 때, 독일의 영방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의 칼마르 동맹이 그 빈틈을 노리고 강국의 대열에 올라서려 애쓸 때,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에만 눈이 발개져 있을 때, 엔리케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꿈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조선공과 항해 장비 기술자, 천문학자 등을 불러 모았다(당시 베네치아의 조선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원양 항해와 지중해 항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고대부터 지중해를 누비고 다닌 전통의 갤리선으로는 대양에 나갈 수 없었다. 노 젓는 사람들만 수십 명씩 태우고 다녀야 하는 데다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중간 기착지가 없이는 수개월씩 항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항해하려면 당시 신형 모델인 범선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범선을 쓸 경우 갤리선에서는 없어도 상관없는 장비들이 필요했다. 바람의 힘만으로 대양을 항해해야 하므로 바람의 방향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지중해에서야 노련한 선원이라면 어느 계절에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부는지 눈 감고도 알았으나 미지의 세계 대서양은 달랐다. 나침반과 사분의 같은 항해 장비들은 그냥 있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항해 도구였다. 그래서 엔리케는 동방의 선진 문물이 흘러넘치는 이탈리아의 기술자들을 초빙해 그것들을 제작하게 했다.
선박이나 항해 장비보다 더 중요한 ‘인력’은 외국인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선원들은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서 모험심과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잘 고르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초부터 엔리케의 특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이베리아를 떠나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탐험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약간의 노예들과 사금을 가져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엔리케는 애초부터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았으므로 실망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 계속 탐험대를 보냈다. 탐험 결과가 누적되고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베르데 곳이 발견되자 드디어 그가 의도한 성과가 드러났다. 대서양 동부의 해도가 작성된 것이다. 해도가 있으면 항로를 찾을 수 있고, 항로를 찾으면 향료를 구할 수 있다. 이제 엔리케의 꿈은 한층 현실에 가까워졌다. 그와 더불어 마데이라, 아조레스 등 대서양의 여러 섬이 포르투갈 소유가 되면서 중간 보급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부산물이었다.
▲ 중세의 첨단 산업 대항해시대의 항해는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나 IT 산업에 해당하는 첨단 분야였다. 사진은 영국의 항해 잡지인 <매리너스 미러(The Mariners Mirror)〉인데, mirror를 mirrov(u)r라는 고어로 표기한 게 보인다. 이 잡지는 1년에 네 차례 간행되는 계간이었으며, 1588년에 창간되어 20세기 초까지 발행되었다.
땅따먹기 게임
엔리케의 원대한 꿈이 실현된 것은 그의 사후였다.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작은할아버지인 엔리케의 유지를 받들어 대서양 탐험대를 계속 지원했다. 마침내 1488년, 탐험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가 이루어졌다. 그전 해에 리스본을 출발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년경~1500)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까지 갔다가 포르투갈로 귀국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끝을 발견했으니 이제 그곳만 돌아 동쪽으로 가면 인도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폭풍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디아스는 그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주앙 2세의 생각은 달랐다. 폭풍을 겪은 것은 선원이고 국왕에게는 어쨌거나 향료를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뿐이다. 그래서 주앙 2세는 ‘희망봉’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바꾸었다【그러나 디아스의 탐험이 엔리케의 의도를 진정으로 계승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엔리케는 1456년 베르데 곶을 발견하고서 서쪽으로의 항해, 즉 대서양 횡단을 꾀했던 듯하다. 그런데 주앙 2세는 남쪽으로의 항해를 지시했다. 게다가 왕은 1487년 디아스의 탐험대와 더불어 육로 탐험대도 보내 향료 원산지를 찾게 했다. 주앙은 엔리케가 사적으로 항로를 개척한 성과에 고무되어 탐험의 규모를 확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엔리케의 유지를 충실히 계승했더라면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를 제치고 더 일찍 신세계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이 대어를 낚자 에스파냐도 큰 자극을 받았다(그동안 에스파냐는 레콘키스타가 끝나지 않아 해외 진출을 미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간다면 계속 뒤처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애써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땅따먹기 게임에는 후발 주자의 이득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에스파나는 엔리케의 원래 구상을 좇아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간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 당시에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지고 있었다(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구로 돌아오는 배가 돛대부터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서쪽으로 계속 간다면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 일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콜럼버스였다. 포르투갈에 비해 수십 년이 뒤처진 에스파냐가 단번에 포르투갈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공로였다. 희망봉이 발견되기 전인 1482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탐험의 지원을 부탁했으나 당시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에만 관심이 있었던 주앙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에게 부탁했다. 여왕 역시 처음에는 승인을 미루다가 1492년 그라나다의 정복으로 레콘키스타가 완료되자 계획을 허가했다. 그해 10월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카리브 해의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여기가 바로 인도라고 여겼고 그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후대의 사람들은 그 일대를 서인도 제도라고 이름 지어 그의 맹신을 위로했으나 과연 이후에도 신대륙에 두 차례나 더 갔던 그가 끝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을지는 의문이다).
▲ 십자가와 칼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림에서처럼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칼을 들고 있고, 뒤의 부하들은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장차 에스파냐가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예고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주자가 같은 경기장에서 달리게 되었으니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트랙을 달리 정해야 했다. 특히 어리석은 판단으로 콜럼버스를 놓친 포르투갈은 뒤늦게 출발해 추월해버린 에스파냐에 대해 불만이 컸다. 하지만 사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서로 다툴 입장이 아니었다. 한 뿌리에서 나왔고 서유럽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비슷한 데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얻게 될 영토는 무궁무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나라는 속셈이야 어떻든 중재자를 세우고 기준을 정해 서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중재 역할을 맡은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베르데 곳에서 서쪽으로 약 480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남북 방향으로 가상의 경계선(경도에 해당한다)을 긋고,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의 소유라고 발표했다. 쉽게 말하면,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먼저 진출했으니 포르투갈의 소유로 하고 신대륙【유럽인들이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신대륙’이라는 말을 쓴 탓으로 우리는 신대륙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실상 아메리카가 신대륙인 것은 사실이다. 아메리카는 인간이 가장 늦게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아시아와 알래스카를 잇는 베링 해협이 육지였을 무렵 동북아시아에 살았던 몽골 계통의 인류가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이 아메리카에 인간이 살게 된 기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은 에스파냐의 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신대륙 경영에 참여할 수 없게 되니 누가 봐도 불공평했다(마 교황은 에스파나인 이었다). 게다가 그 경계선은 대서양 한복판을 세로로 종단하므로 포르투갈이 영토로 삼을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 이듬해 두 나라는 경계선을 다시 서쪽으로 1500킬로미터쯤 더 이동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이것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부른다. 베르데 곶에서 서쪽으로 2000킬로미터 지점이라면 오늘날 서경 50도 부근에 해당하므로 브라질의 동쪽 끝부분에 걸치게 된다. 당시에는 남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포르투갈로서는 미지의 세계를 걸고 도박을 감행한 셈이다. 그러나 그 도박이 성공한 덕분에 오늘날 브라질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 국가가 되어 있다.
▲ 신대륙의 이야기 콜럼버스 덕분에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이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직후에 그려진 지도인데,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만이 그려져 있다. 당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대서양 연안의 신대륙뿐이었으니 당연하다.
가상의 경계선이 처음 위력을 발휘한 때는 1500년이었다. 그해 포르투갈 선원 카브랄은 희망봉으로 가던 항로에서 실수로 이탈했다가 브라질 해안에 닿았다. 실수로 횡재를 얻은 그는 국왕인 마누엘 1세에게 보고했고, 왕은 이탈리아의 항해 전문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eci, 1454~1512)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1503년 베스푸치는 마누엘에게 드디어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성과물이 생겼음을 알렸다. 정작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오늘날 콜롬비아라는 나라 이름으로만 남았지만, 브라질을 확인한 베스푸치의 이름 아메리고는 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아메리카)이 되었다.
부전공인 대서양 항로에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전공인 인도 항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인도 항로를 독점하게 된 포르투갈은 항로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물론 그 끝에는 인도가 있을 터였다. 1497년 마누엘로부터 ‘대사’라는 직함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Vasco di Gama, 1469년경~1524)는 네 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 항구를 출발했다. 이듬해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인도에 닿은 다 가마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향료 원산지에서 향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엔리케가 탐험을 계획한 지 80년만에,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해 절반의 목표를 이룬 지 꼭 10년만에 인도 항로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519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의 탐험은 대항해시대 100주년 기념 선물이었다(마젤란은 항해 도중 필리핀에서 죽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몰루카 출신으로 처음부터 항해에 참여한 그의 노예 엔리케다). 게다가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으로서 에스파냐의 지원 받았으니, 말하자면 두 나라의 합작품인 셈이다.
▲ 후발 주자의 이득 뒤늦게 유럽 문명권에 복귀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서양 항로 개발에 뛰어들었다. 에스파냐는 조금 먼저 출발한 포르투갈에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를 빼앗겼으나 그 덕분에 서쪽 항로를 개발해 신대륙을 발견했다. 닭을 놓친 대신 꿩을 잡은 격이다.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 부족과 싸우다 전사하고 동료들만 귀환했지만, 같은 시기 에스파냐 탐험대가 아메리카를 다루는 과정은 포르투갈의 경우와 현저히 달랐다. 1511년 쿠바를 정복하고 이곳에 근거지를 차린 에스파냐는 본국에서 아예 대규모의 군대를 데려다놓았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탐험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아메리카에는 제법 힘깨나 쓰는 원주민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스파냐는 탐험대라는 간판을 내리고 대신 ‘원정대’의 깃발을 세우기로 했다. 이제 에스파냐는 원주민들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탐험대 → 상선의 세련된 코스를 밟았다면, 에스파냐는 탐험대 → 원정대라는 무식한 코스를 택한 셈이다. 에스파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향료 무역의 이득을 노리고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의 섬들과 접촉한 포르투갈과 달리, 에스파냐는 대륙을 상대로 장기적이고 잠재적인 이득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정복의 과정은 포르투갈의 경우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당시 멕시코의 고원지대에는 아스테카인들이 200년 전부터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에 터를 잡고 주변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문명의 개념을 부여하지 않았던 에스파냐인들은 아스테카 제국을 문명국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나, 아스테카인들은 찬란한 고대 문명인 마야를 계승한 데다 문명의 가장 명확한 증거인 문자와 달력도 사용하고 있었다【마야인과 아스테카인은 왜 북아메리카의 넓은 평원 지대를 두고 좁은 멕시코 고원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을까? 이 점은 인류학의 주제로 아직도 연구 대상이지만 큰 윤곽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북아메리카, 그러니까 지금 미국 동부의 넓은 평원은 기후도 좋고 사냥할 짐승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인구가 너무 적었다. 더구나 베링 해협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갈라지면서부터는 더 이상 구세계로부터의 이주도 없었다. 문명이 발달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구밀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구세계보다 훨씬 문명의 발생과 발달이 늦었으며, 오히려 더 남쪽으로 간 무리들이 좁은 고원지대에 모여 살게 되면서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평원에 그대로 남은 무리는 오늘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 에스파냐인들이 군대를 끌고 간 이유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아스테카 문명의 제례 의식을 야만적이라고 단정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문명의 수준에 비해 군사력이 취약하다는 아스테카인들의 단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아스테카는 정복한 전쟁 포로를 제물로 사용한 탓에 주변 민족들의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 주변 민족들은 나중에 에스파냐가 공격해왔을 때 오히려 에스파냐 측으로 붙어 아스테카와 싸웠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시작한 1519년에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는 11척의 함대와 14문의 대포, 660명의 병력으로 쿠바의 기지를 떠났다. 그들이 닿은 곳은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외항이라 할 베라크루스였다. 이곳에서 에스파냐군은 무려 4만 명의 원주민 군대와 싸워 이겼다. 아스테카의 결정적인 약점과 에스파냐의 우수한 화력이 한 데 어울려 낳은 ‘어처구니없는’ 전과였다【당시 아스테카인들은 말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고산지대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으므로 그들은 말을 키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에스파냐 병사들을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짐승(말)인 괴물이라고 여기면서 카바호라고 불렀다(이를테면 반인반수,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로스에 해당한다). 카바호는 ‘말’이라는 뜻의 에스파냐어인 카바요(caballo)에서 나온 이름이었는데, 말이라는 단어가 없으니까 아스테카인들이 에스파냐어를 빌려 만든 단어다】. 여기에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스를 세워 테노치티틀란을 공략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그는 비록 하급 귀족 출신이었으나 열여덟 살에 청운의 꿈을 안고 신세계로 찾아온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나이였다.
원주민 군대의 실력을 알 만큼 알았다고 판단한 코르테스는 즉각 공세에 나서 1521년에 마침내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했다. 이교도의 문명은 문명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지극히 야만적인 행위로 실현되었다. 수천 년간 이어진 멕시코의 고대 문화를 군홧발로 짓밟고, 아스테카 원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아스테카 궁전을 장식하던 수많은 황금 장식물은 순전히 본국으로 수송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현지의 가마에서 녹여졌으며, 피라미드를 비롯한 테노치티틀란의 많은 신전은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이 되었다(이렇게 이교도 문명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긴 것은 본국에서 파견되어 정복 전쟁 때마다 따라다닌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또 하나의 아메리카 토착 문명인 잉카 문명은 더 보잘것없는 동기에서, 더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통해 무너졌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탐험가를 자처하는 수많은 건달이 신세계로 건너왔다【그런 건달 중 하나로 발보아가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서 황금의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횡단한 끝에 1513년 태평양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최초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이다(태평양이라는 이름은 7년 뒤에 마젤란이 지었다). 그러나 그가 찾던 황금의 나라, 잉카 제국은 더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그는 결국 황금을 보지 못하고 동료들을 배신한 죄로 본국에서 온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태평양과 대서양이 가장 가까이 맞닿은 파나마에 간 것은 엉뚱한 결과를 빚었다. 발보아 때문에 신대륙의 동서 폭이 의외로 좁다고 여긴 탐험가들은 서쪽으로 약간만 더 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마젤란의 세계일주도 거기서 자극을 받았을 터이다】. 그들 대부분은 남아메리카 어딘가에 있다는 엘도라도라는 황금의 땅을 찾으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년경~1541)라는 자였다. 그는 한동안 수색과 탐험을 거듭한 끝에 페루의 잉카제국이 바로 엘도라도라고 확신했다.
10세기 이후 안데스 고원지대 쿠스코에 자리 잡은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가 침략해올 무렵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더욱이 잉카는 아스테카와 달리 군사력도 강한 국가였다. 수백년 동안 인근 민족들을 차례차례 정복했을 뿐 아니라 15세기부터는 멀리 북쪽의 에콰도르까지 손에 넣은 정복 국가였다. 배고플 때는 뭉치다가도 배부를 때는 갈라서는 게 인지상정일까? 국력이 크게 일어나자 잉카의 지배층은 쿠스코파와 에콰도르파로 양분 되어 다툼을 시작했다. 1531년부터 2년간 두 세력은 치열한 내전을 벌여 에콰도르파가 승리했으나 대외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내분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조개와 새의 싸움에서 이득을 본 어부는 피사로였다.
자칭 탐험가, 타칭 건달이었던 피사로는 그간의 탐험 공로로 1531년 180명의 병력을 인솔하게 되어 지휘관이라는 명함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는 새 명함을 에콰도르의 실력자인 아타우알파에게 내밀었다. 쿠스코 세력과 한창 전쟁 중이던 아타우알파로서는 누구의 도움이라도 아쉬운 판에 강력한 무기를 가진 에스파냐군이 지원을 약속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내전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아타우알파에게 피사로는 명함이 아닌 성서를 내밀었다(물론 그 자리에는 에스파냐 사제가 있었다), 태양신을 비롯한 자연의 신들을 믿는 잉카인들에게 성서가 웬 말, 아타우알파는 성서를 내던지고 개종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180명의 ‘카바호’들에게 제국을 송두리째 내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1533년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는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인들의 손에 처형되었고, 그 반인반수의 야만인들은 쿠스코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태평양 연안 산기슭에 오늘날 페루의 수도가 된 리마라는 새 도시를 세워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에 나섰다.
▲ 잉카 유적 아스테카처럼 잉카 제국도 에스파냐 병사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남은 유적이 많지 않다. 이 마추픽추의 유적은 에스파냐의 침략을 피해 달아난 잉카인들이 도피 생활을 하던 곳인데, 에스파냐 병사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덕분에 멀쩡한 상태로 20세기에 발견되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동방으로 진출한 포르투갈은 목표로 삼았던 향료 원산지와 직거래함으로써 탐험의 열매를 신속히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엔리케 이후 포르투갈의 일관된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덕분에 오히려 더 큰 횡재를 한 것은 에스파냐였다. 동쪽 항로를 포르투갈에 선점당한 에스파냐도 원래는 서쪽으로 가서 향료 원산지를 찾으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신대륙이라는 엄청난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도 한동안 에스파냐의 탐험가들은 신대륙 내부를 탐험하기보다 향료를 찾기 위한 항로를 개척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손에 쥔 것이 항로와 향료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이어 수많은 탐험가가 신대륙으로 몰려들었다.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날마다 신대륙과 신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온통 화제를 이루었다. 처음에는 향료가 없다는 데서 오는 실망감이 컸으나, 엘도라도의 소문이 퍼지면서 실망감은 큰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으로 에스파냐가 얻은 소득은 향료도, 황금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대륙의 영토 자체였다.
졸지에 본토의 수십 배에 달하는 해외 식민지를 얻게 된 에스파냐는 이를 관리하기 위해 왕실 직속 기구를 편성했다.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얼추 세 가지였다. 첫째, 식민지 통치 구조를 확립한다. 본국과의 업무 연락을 위해서도 이것은 가장 시급했다. 둘째, 탐험가와 정복자(conquistador)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다. 현지에서 흘린 에스파냐 군대의 피와 땀을 보상해주지 않으면 금세 반란이라도 날 터였다. 셋째, 이교도를 개종한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였지만 천천히 해나가면 되니까 시급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은 간단했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우선 믿을 만한 인물로 식민지 총독을 파견했고, 현지의 콘키스타도르에게는 각자 정복한 영토를 관할하게 했다. 또한 정복지마다 교회를 짓게 하고 사제들을 대거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 문제는 모두 쉽게 해결되었다. 단, 에스파냐 입장에서의 해결일 뿐이었다.
정복 과정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즉각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자기 영토에서 전권을 움켜쥐게 된 콘키스타도르는 그 토지에 살던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들로서는 본국에 세금도 내야 하고 이익도 거두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동안 들인 본전을 뽑아야 했다. 정복 과정에 들어간 경비는 대부분 자비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아메리카의 대농장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본전을 뽑는 데 그치지 않고 이내 막대한 수익을 올리자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점차 탐험과 상관없는 일반 사람들도 신세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건달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개중에는 선교사와 법관 등 관리 경험을 가진 자들도 있었고, 토지를 얻으려는 빈민들의 ‘순수한’ 이주도 있었다. 그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함부로 대한 것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크나큰 결과를 빚었다. 이로 인해 메스티소(mestizo)라는 전혀 새로운 인종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는 그 무렵에 생겨나 현재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메스디소는 생물학적인 기준에서의 인종 구분은 아니다)【1519년 베라크루스를 정복했을 당시 코르테스는 원주민 여자 노예와 결혼했는데, 이것은 장차 중남미에 메스티소가 생성되는 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에스파냐의 군인들은 원주민 여성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했고, 마음에 들면 첩실로 삼았다. 겨우 500년 만에 메스티소가 중남미 최대의 인구로 자리 잡은 데는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렇게 라틴 계통의 백인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대량으로 혼혈을 이룬 데 비해 후대에 이주하게 되는 게르만 계통의 백인(영국, 프랑스)은 좋은 대조를 보인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결혼하거나 성적으로 관계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런 차이를 낳은 원인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북아메리카의 경우에는 비교적 도덕적인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이주가 이루어졌다(나중에는 이것도 무너졌지만). 둘째, 가족 단위로 이주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위주인 에스파냐와는 달랐다. 셋째, 중남미에 비해 북아메리카에는 처음부터 원주민 인구가 적었다. 또한 에스파냐인들이 성적으로 타락한 것은 당시 에스파냐를 지배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측면도 있다. 이는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의 섬들을 영토화하는 데 그쳤지만(일본에 최초로 간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이었다), 에스파냐는 광활한 영토와 노동력을 한꺼번에 획득했다. 신대륙에는 황금과 땅과 노예와 여자가 있었다. 에스파냐 사람들(특히 남자)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서유럽의 후진국 에스파냐는 이것을 밑천으로 일약 국제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된다. 특히 엘도라도 까지는 아니어도 멕시코와 칠레에서 다량으로 발견된 은광과 금광은 에스파냐의 경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금을 땅에서 캐내는 셈이니까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에서 올리는 이득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에스파냐로 흘러드는 금과 은은 서유럽 경제 전체를 쥐고 흔들 정도였다. 뒤늦게 신세계의 위력을 깨달은 서유럽의 전통적 강국들이 여기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유럽인들은 미처 실감하지 못했겠지만 그들이 신대륙에서 얻은 보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유럽만이 아니라 구세계 전체가 신세계 덕분에 누리게 된 혜택이었다. 오랫동안 구세계와 독립된 역사를 가져왔기에, 신세계 원주민들은 구세계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작물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바로 옥수수와 감자, 강낭콩, 호박, 면화, 토마토 등이었다. 이 작물들은 단순히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구세계, 특히 유럽에 만연한 빈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물론 초콜릿처럼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작물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만병의 근원이라는 담배도 신세계가 원산지였다【그래서 오늘날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담배를 ‘홍인종의 복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데 대한 앙갚음으로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담배를 전래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정복자들이 담배를 적극적으로 수입했으므로 복수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지만】.
▲ 에스파냐의 잔혹극 포르투갈은 신세계로부터 무역 이득만 얻어내려 했으나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엄청난 땅과 보물과 노동력을 확보했다. 그런 만큼 포르투갈과 달리 에스파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신대륙을 경영할 의도가 없었다. 그림은 에스파냐 병사들이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본보기로 살육하는 장면인데, 로마 시대부터 투견으로 기르던 사나운 마스티프 개가 학살에 이용되었다.
정복의 결실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지구의 끝을 보았다. 물론 지구상 어느 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나름대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지만, 적어도 전 세계를 처음으로 하나의 관점에서 인식하게 된 것이 유럽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요컨대 당시 지구 전체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뿐이었다(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천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천하는 중국이 중심이고 사방이 오랑캐 땅인 ‘우물 안 천하’에 불과했다). 아는 것은 힘이고 지식은 곧 권력이다. 세계의 정체를 먼저 인식한 유럽 문명은 결국 세계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고 글로벌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 그 출발점이 바로 대항해시대, 정복의 시대다.
이 시대에 유럽의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동쪽 아시아에서는 아라비아 상인들을 물리치고 향료를 직수입할 수 있게 되었고, 서쪽 아메리카에서는 금과 은, 각종 신종 작물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남쪽 아프리카에서는 건장한 흑인 노예들이 마구잡이로 잡혀왔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종전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판매하던 가격의 절반으로 직수입 향료를 서유럽에 판매했으며, 아울러 인도에서 차를 수입해 서유럽 문화에 중요한 한 가지 요소를 추가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일본, 중국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명을 두루 알리는 사절 노릇을 톡톡히 했다(1557년 중국의 명나라 때 해적을 토벌한 대가로 마카오 거주권을 얻은 게 그 한 성과다)【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 중국에는왔으면서도 한반도에 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에 온 서양인은 17세기의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이 최초인데, 그마저도 둘 다 네덜란드 상인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 표류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다. 그 이전은 물론 당시까지도 서양인들은 한반도의 조선을 몰랐으며, 알았다고 해야 중국의 일부로만 여겼다. 조선은 실제로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맡기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속국이었다】.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는 급속히 바뀌었다. 지중해 무역의 의존도가 떨어지면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자치도시의 상인들은 쇠락해 갔다(다음에 보겠지만 그전까지 기세가 좋았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르네상스가 급속히 쇠퇴한 데는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새로운 경제 중심은 단연 이베리아였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후진국에다 ‘이슬람의 멍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일약 서유럽 세계의 맹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적인 면에서의 맹주에 불과했고, 게다가 그들이 그 지위에 있었던 시기는 정복의 시대뿐이었다. 서유럽 문명을 세계의 중심 문명으로 만드는 데는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그들은 더욱 커진 그 문명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문명사적 역할은 중세 이래 전통적인 강국으로 성장한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서유럽 세계가 성장하는 데 경제적인 밑거름이 되는 것이었다. 그전에 먼저 서유럽은 ‘중세의 멍에’인 종교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살아남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상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주목한 것은 시장의 개념이었다. 예전에는 물건이 없어 팔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시장이나 경쟁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참패한 뒤 그들은 시장의 관점에서 생산과 판매의 과정을 새로이 바라보게 되었다. 새로운 깨달음의 먼 결과는 자본주의였고, 가까운 결과는 네덜란드(플랑드르)와 영국, 프랑스가 잇달아 세우게 되는 동인도주식회사였다. 이 점에 주목한 애덤 스미스(Adian Smith, 1723~1790)는 훗날 정복의 시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대’로 규정했다(경제학의 창시자인 스미스로서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발생, 발전과 관련된 것이 가장 중요했을 테니까).
대항해시대에 서유럽 문명의 힘이 급속도로 팽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15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유럽의 패자가 된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초 이집트를 정복해 옛 이슬람 제국의 재현을 꿈꾸었다.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헝가리를 점령한 뒤 오스트리아의 빈을 위협했으며, 1538년에는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로마 교황의 연합함대를 지중해에서 무찔렀다. 서유럽 그리스도교권은 몽골의 침략 이래 300년 만에 다시금 존폐의 위기에 몸을 떨었다. 서유럽은 중세를 헤쳐 나올 무렵인 16세기 중반까지도 힘에서 아직 동부 지중해 세계를 앞서지 못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방 무역의 육로를 이스탄불에서, 해로를 동부 지중해에서 차단하고 독점함으로써 서유럽은 경제 위기에 빠졌다. 당시 동방의 향료가 서유럽의 실수요자에게 왔을 때는 원래 가격의 30배로 치솟았을 정도였다. 이런 시점에서 대서양 항로가 개척된 것은 오스만 제국에 치명타를 가져왔다. 가뜩이나 정정 불안에 시달리던 제국은 무역 부진에 따른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더 이상 서유럽을 물리적으로 위협하지 못했다.
1571년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로마 교황의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그리스 부근의 해상에서 다시 한 번 맞붙었다. 불과 30년 만의 재대결에서 연합군은 오스만 함대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레판토 해전인데, 여기서의 활약으로 에스파냐 함대는 무적함대(Armada)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연합함대가 승리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장악은 저지되었고, 그리스도교 세력이 지중해 교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 레판토 해전 신대륙에서 얻은 부는 에스파냐의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1571년 에스파냐 함대는 오스만 함대를 물리치고 지중해마저 제패하여 무적함대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서양 문명이 이제 물리력에서 세계 최강의 지위에 올랐음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그림은 레판토 해전의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