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신에게서 인간으로
부활인가, 개화인가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부활했다는 것일까? 그리스의 고전 문화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다. 언제 어디서?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점차 북쪽으로 퍼져나가 16세기 무렵에는 서유럽 전체가 르네상스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럼 르네상스의 역사적인 의의는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서유럽이 1000년에 달하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이행기라는 성격을 지닌다. 학자에 따라서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끝자락에 놓기도 하고 근대의 출발점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이상이 르네상스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이자 동시에 박제화된 지식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설명보다 더 많은 의문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르네상스가 왜 프랑스어로 불릴까?”하는 사소한 의문도 있지만, “왜 하필 2000년 전의 그리스 고전문화가 갑자기 14세기에 부활한 것일까?”라든가, “대체 무슨 이행기가 200년씩이나 될까?” 등의 중대한 의문도 있다.
우선 르네상스가 프랑스어인 이유는 간단하다. 후대에 프랑스 학자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17세기 말에 프랑스의 사전 편찬자들은 르네상스‘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관해 서술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처음으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르네상스라는 말을 썼다. 그 덕분에 르네상스는 문화와 예술을 넘어 14~16세기 서유럽의 지성 운동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승격되었다【사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르네상스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당시 피렌체의 화가이자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자신의 저서인 『예술가 열전』에서 르네상스와 같은 뜻의 ‘리나스키타(rinascita)’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만약 이탈리아가 프랑스처럼 일찍 국민국가를 이루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르네상스 대신 리나스키타라는 말을 썼을 게 틀림없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라는 ‘개화(開花)’를 이룬 주인공이었으면서도 그 열매는 따지 못한 셈이다】.
둘째 의문은 르네상스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은 우문이다. 그리스 고전 문화는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느닷없이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부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의 역사를 씨앗(오리엔트), 뿌리(그리스와 로마), 줄기(중세)로 살펴보았다. 씨앗과 뿌리, 줄기는 같은 식물의 성장 단계들이므로 연속적이고 순차적이다. 이 연속선상에서 말한다면, 르네상스(아울러 대항해시대, 종교개혁)는 중세의 줄기가 자랄 대로 자라 드디어 꽃을 피운 게 된다.
역사에서 비약이란 없다. 그리스가 오리엔트의 문명을 이어받지 않았다면 서양 문명의 뿌리는 없었을 테고, 뿌리 없는 줄기와 꽃이 없듯이 중세와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를 ‘개화’로 규정하지 않고 ‘부활’로 규정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차라리 르네상스 대신 그냥 ‘새로운 시대’라고 부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그냥 사용하도록 하자.
그러면 셋째 의문은 저절로 해결된다. 200년씩이나 오래가는 ‘이행기’란 없다. 그 정도의 기간이라면 그 자체로 ‘별개의 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용을 따져보아도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낀 이행기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천천히 뿌리와 줄기를 키워오던 서양 문명이라는 나무가 바야흐로 최초의 결실인 꽃을 피우는 시기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는 어떤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시대다.
물론 르네상스를 고전 문화의 부활로 보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바로 중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세를 부정하면 그리스 문화로 직접 연결될 수 있다(로마도 끼어 있지만 로마는 문화적 측면보다 국가 체제와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서구 문명의 뿌리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대립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대립일까? 중세를 지배한 하나의 커다란 특성, 즉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분권화된 중세 사회에 전반적인 통합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그러나 중세의 해체기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의 통합력은 점차 약해진다. 여기에는 종교 외적인 면과 종교 내적인 면이 있다. 종교의 바깥에서는 어지간한 힘을 갖춘 세속의 집단(왕국)들이 생겨나고 자라났다. 강력한 왕권이 들어설 수 있는 지역에서는 국민국가의 원형들이 생겨났고(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북유럽), 그럴 수 없는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영방국가들이 발달했으며(독일), 그럴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는 자치도시들이 성장했다(플랑드르와 북이탈리아). 이렇게 세속의 사회들이 발달하는 눈부신 속도는 종교로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 안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거셌다. 사회의 복합화가 진행될 수록 사람들은 지식을 쌓아갔고, 이성의 힘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신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이며 행복을 구하는 길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고 싶어 했다. 심지어 신앙마저도 이성적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 철학자들),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지만 기존의 신앙으로는 사람들의 ‘커진 머리’를 수용하기 어려웠다(나중에 보겠지만 여기에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겹쳐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처음으로 느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금세 모든 사람에게 퍼져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다음 두 가지 판단 중 하나를 개인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첫째,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것은 이제 신이 아니다. 둘째, 신께서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과정은 알고 보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의 것은 신의 부정이고, 뒤의 것은 앎과 이성을 통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중세가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란 어려웠다. 따라서 많은 사람은 뒤의 입장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이성으로 신을 규정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첫 단추는 문학에서 꿰었다.
▲ 누드의 부활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의 부활이지만 중세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오히려 르네상스는 서양 문명의 뿌리(그리스-로마)와 줄기(로마-게르만)를 충실히 이어받아 꽃을 피운 시기로 보아야 한다. 위의 세 그림은 왼쪽부터 차례로 고전,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미의 세 여신을 그린 작품들이다. 누드화가 부활한 것은 고전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여성들의 표정은 중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학이 문을 열다
14세기 벽두에 피렌체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는 「신곡 (La divina commedia)」이라는 방대한 서사시를 지었다. 그전에도 영국의 영웅서사시 「베오울프(Beowult)라든가 프랑스의 무훈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등과 같은 중세의 서사시는 간혹 있었으나, 그것들은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 여러 차례 살을 붙여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신곡 처럼 지은이가 분명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곡」은 분량에서도 그것들의 세 배가 넘었다.
또한 「신곡」은 중세의 서사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질적으로 달랐다. 하나는 ‘신의 희곡’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의 영역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신곡」은 단테 자신이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참된 종교적 승화를 이루는 내용이다【「신곡」에서 단테가 참된 신앙을 부르짖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대가 참된 신앙을 가능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당시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황제파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교황파로 나뉘어 격심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59쪽 참조), 피렌체의 정치인으로 황제파에 속했던 단테는 1301년 교황파가 피렌체의 정권을 차지하면서 시에서 추방된다. 이후 어려운 망명 생활에서 집필한 작품이 바로 「신곡」이었으므로 당연히 교황이 지배하는 ‘현실의 종교’는 부정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처럼 인간이 이성의 힘을 통해 신이 관장하는 세계를 그려낸 작품은 그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한다 해도 시도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단테에게 지옥을 안내하는 인물이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Maro Vergilius, 기원전70~기원전 19)라는 점이다. 베르길리우스라면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모험을 그린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작가이므로 말하자면 그리스 정신으로 충만한 로마의 시인이었다. 단테는 아이네아스가 저승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베르길리우스를 지옥의 안내자로 설정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염두에 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 고전을 매개로 신의 영역을 묘사한다! 「신곡」의 이런 구도는 이미 중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단테의 한 세대 다음 인물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
1374)와 보카치오(Giovanni Boccactio, 1313~1375)에 이르면 르네상스정신은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다. 호메로스 플라톤ㆍ세네카ㆍ키케로 등 그리스와 로마의 고문헌을 열심히 수집하여 연구했고, 고전 사상과 문학에 해박한 페트라르카는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적 형식에서도 르네상스의 특징인 인문주의(humanism)의 경향성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또 보카치오는 「데카메론(Decameron)」에서 현실의 종교, 즉 성직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교황에서 거지까지, 귀족에서 하인까지 이르는 사회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을 화자로 동원하고 있으므로 「신곡」에 빗대어 ‘인간의 희곡’, 즉 ‘인곡(人曲)’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후대의 학자들은 페트라르카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말하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부른다).
▲ 단테와 신곡 희곡 작품 「신곡」에서는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를 각각 지옥, 연옥, 천국의 안내자로 설정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단테가 자신의 세계를 직접 안내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건물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문학을 통해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모두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시들인 피렌체와 아레초 출신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바로 북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발원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 왜 르네상스는 북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을까?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르네상스의 경제적 배경을 이루었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 있다 (22쪽 참조). 그러나 그 점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르네상스의 배경일 뿐 르네상스를 유발한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측면에만 주목하면 르네상스의 원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당시 북해 무역을 독점하면서 북이탈리아에 못지않게 번영을 누리고 있던 플랑드르의 자치도시들에서는 왜 르네상스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차이는 바로 정치적 측면에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독일(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왕조로 있던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말까지 제국과 로마 교황청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제국은 교황청을 신성 로마‘로 여기지 않았고, 교황청은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로마의 간판을 내건 세속과 신성은 실상 ‘세속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서로 격렬히 싸웠다. 가장 큰 피해자는 전장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북부였다. 중부는 교황청이 지배했고, 남부는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었으나,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북부는 정치적으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정치적 공백’(통일된 정치권력이 없다는 의미에서) 덕분에 북이탈리아에는 일찍부터 자치도시들이 생겨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아무래도 교황과 독일 황제의 대립 속에서 이리저리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양측의 내부에서 중요한 정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독일에서는 세습 왕조가 끝나면서 영방국가 체제가 들어섰다. 독일이 분권화의 길을 공식적으로 택함으로써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전보다 약해졌다. 교황청에서는 더 큰 변화가 있었다. 독일 황제보다 훨씬 단순무식한 방법을 구사한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 의해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간 것이다(73쪽 참조). 프랑스가 교황청을 관할하게 되면서 북이탈리아는 그전보다 한결 숨통이 트였다. 두 가지 사건 모두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일어났다【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이탈리아인의 해방감을 보여주는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1347년 로마의 호민관이 된 리엔초라는 청년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부활을 꿈꾸었다. 실제로 그는 아비뇽 교황청과 독일 황제의 지지를 모두 얻어 신성과 세속의 조화에 바탕을 둔 ‘위대한 로마’를 재현하고자 했다. 이상은 좋으나 엄청난 시대착오였다. 결국 그는 권력을 잃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간신히 살아났으나 시민들의 폭동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당대의 페트라르카도 그에게 지지를 보냈을 뿐 아니라, 19세기 ‘위대한 독일’의 이념을 지지한 작곡가 바그너는 리엔초의 극적인 생애를 <리엔치>라는 오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북이탈리아에 잠복해 있던 르네상스의 물꼬가 트였다. 본래 이곳은 옛 로마 문명의 고토이므로 다른 지역보다 고전문화의 전통이 강했고, 로마 시대의 유적과 유물도 많았다. 한마디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난 곳이었던 것이다(또 하나의 뿌리인 그리스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이런 조건은 문학이 문을 연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술이 르네상스의 대표주자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 르네상스의 두 영웅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왼쪽)와 ‘최초의 근대 소설가’ 보카치오(오른쪽)의 초상이다. 물론 이들이 없었다 해도 ‘근대’는 왔겠지만, 이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첫 삽을 뜨고 기초공사를 튼튼히 다진 인문주의의 영웅들이다.
사실성에 눈뜨다
중세의 중반기까지 동방의 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을 앞섰다는 것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여기에는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포함된다. 정치와 경제, 사회제도 등이 하드웨어라면, 문화와 예술은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는 속도는 대체로 하드웨어보다 느리다. 중세가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었던 12~13세기쯤이면 서유럽 세계는 다른 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을 거의 따라잡았으나 문화와 예술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 특히 미술에서는 여전히 ‘비잔티움풍’이 가장 선진적이고 첨단의 유행이었다(그런 탓에 오늘날에도 비잔티움이라고 하면 흔히 제국보다 미술양식을 먼저 떠올린다).
이런 구도를 깨뜨린 사람이 피렌체의 조토(Giotto di Bondone, 1266년경~1337)다. 그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흡수해 새로운 화법으로 표출시킴으로써 후대 미술사가들에게서 ‘유럽 근대 회화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게 된다. 물론 아직 소재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할 단계는 아니었다. 비잔티움 미술은 오랫동안 성화(聖畵, icon)의 전통이 지배했기 때문에 성화를 위한 기법과 양식이 크게 발달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도 이것을 이어 받았으므로【비잔티움의 성화가 서유럽으로 퍼진 것은 특히 9세기 이후부터였다. 왜 그랬을까? 바로 성상 숭배 금지령 때문이다. 1권 328쪽에서 보았듯이 8세기에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수도원 세력을 누르고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이 문제를 놓고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는 여러 차례 분쟁이 벌어지게 되는 데, 이를 계기로 제국 내에서 위축된 비잔티움 양식의 성화가 서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조토 역시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신앙심을 두텁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같은 성화라 해도 조토의 작품은 비잔티움 성화와 크게 달랐다. 비잔티움 성화는 종교적 목적만을 부각시킬 뿐 인물이 평면적이고 비사실적인 형태를 취하는 데 반해, 조토의 그림은 똑같이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하면서도 각 인물을 개성을 가진 존재로 살려내는 사실적인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그럼 조토 이전의 비잔티움 화가와 이탈리아 화가 들은 그 점을 몰랐던 걸까? 그들의 눈에는 누가 봐도 명백한 인물들의 개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듯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그린 걸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비잔티움 성화에서는,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같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나머지 ‘조연’들은 그 주변에 아주 조그맣게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가가 실제로 그 인물들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회화에서는 종교적 목적이 가장 중요했고, 다른 측면, 이를테면 사실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뿐이다. 중세 이전의 시대, 종교가 모든 것을 압도하지 않았던 시대, 즉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이 더 후대인 중세보다 훨씬 사실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그렇기 때문에 조토의 회화는 중세를 건너뛰어 고전 문화와 통하는 르네상스의 특징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토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실성을 부각시킨 것은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말해준다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현상이다. 달리 말하면 조토 이전의 시대와 조토의 시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는 ‘좋은 작품’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만약 중세의 전성기에 조토의 작품이 미술전에 출품되었다면 틀림없이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는 신앙심을 얼마나 잘 담아냈는가가 작품 선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으니까(그런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그전 시대보다 내용의 중요성이 적어진 대신 미술의 형식, 즉 양식미가 훨씬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조토가 개척한 사실성의 새로운 관점은 피렌체 태생인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에게로 이어져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발명품이라 할 원근법을 낳게 된다. 알다시피 건축은 회화보다도 더 사실성이 필요한 예술 장르다. 그림으로 그린 건물은 설령 불안정해 보인다 해도 무너질 일은 없지만 건축에서는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대형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중세에도 건축에서만큼은 사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신앙심의 상징인 고딕 성당의 높은 첨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건축가인 동시에 건축 이론가이기도 한 브루넬레스키는 그 사실성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계산하고자 했다. 그가 연구 대상으로 택한 것은 옛 로마의 유적이었다. 그 고대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는 보는 시점과 각도에 따라 거리감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계산했으며, 그 결과 비례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즉 보는 사람의 눈과 물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경우 어느 정도로 작게 보이는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근법의 근본 원리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은 정작 건축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건축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원근법의 원리가 적용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건축물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근법은 오히려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평면으로 묘사하는 것, 즉 회화에 반드시 필요했다. 회화가 새로운 사실성을 담아내려면 원근법을 수용해야 했다.
가까이 있는 물체는 커 보이고 멀리 있는 물체는 작아 보인다. 이것은 현실 세계가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2차원의 화폭에 담으려면 가까운 것을 크게 그리고 먼 것을 작게 그려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겠다는 발상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 당연한 원리는 훨씬 더 늦게 회화에 적용되었을 것이다【브루넬레스키가 개발한 원근법은 그의 동료 건축가이자 작가인 알베르티가 더욱 체계화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원근법은 선으로 원근을 표현하는 선원근법이었고, 나중에는 색채를 이용하는 색채원근법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원근법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숨어 있다. 자연을 사실적으로, 즉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원근법의 취지였지만 원근법 자체에는 사실의 왜곡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가들은 원근법에 따라 멀리 있는 길은 좁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길은 넓게 그리지만(또한 그게 더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멀리 있다고 해서 실제로 길 자체가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원근법은 사실을 왜곡해야만 사실성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된다. 이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으로 담아내는 데 따르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 점은 나중에 인간 이성의 동질성이 해체되는 19세기에 다시 주요한 주제가 된다】.
조토와 브루넬레스키의 발상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발명이나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작품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예술적 의도는 원래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시대는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인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알타미라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의 벽화에서도 그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내내 관철되어오던 사실성을 향한 지향은 중세 기간에 종교가 만들어낸 무형의 압력에 짓눌려 잠시 맥이 끊겼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 르네상스 미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는 단지 고전 문화만을 부활시킨 게 아니라 억압되어 있던 인간의 본능을 해방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달라진 기준 왼쪽은 12세기의 비잔티움 성화이고, 오른쪽은 르네상스 시대에 뒤러가 그린 성모와 아기 예수다. 같은 소재의 작품이지만 왼쪽 그림은 누가 봐도 두 인물의 비례가 어색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에는 사실성을 기준으로 작품의 가치를 따진 게 아니라 종교적 심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술의 기준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뒤러의 작품은 12세기라면 오히려 어색하다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
조토가 새롭게 불을 지핀 사실성의 불꽃은 15~16세기 마사초, 보티첼리 등의 피렌체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과정에서 회화의 소재는 성서에 머물지 않고 더욱 폭을 넓혀 그리스 신화에까지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고전 문화의 부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불꽃을 이어받아 커다란 횃불로 만든 예술가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라파엘로(Raffello Sanzio, 1483~1520)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죄악시되던 인간의 ‘신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냈고, 성서와 신화의 내용을 빌려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르네상스 시대에 누드화가 부활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이슬람교에서도, 나아가 현대의 거의 모든 종교에서도 신체의 노출은 금기시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로 간주한다. 특히 중세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원죄설에 따라 인간의 신체 자체에 죄악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체를 그린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화가들은 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하면서도 과감하게 나체의 인물들을 작품 속에 도입했다. 이렇게 나체를 그리기 위해서는 골격이나 근육 등 인간 신체의 구조에 관해 상세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르네상스 화가들은 시신을 해부하면서 신체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성과는 생물학과 의학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은 한밤중에 공동묘지에까지 가서 시신을 가져다가 해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토에서 라파엘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들, 나아가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 작가들까지도 거의 대부분 피렌체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당시 피렌체의 인구는 기껏해야 9만 명 정도였는데, 여기에는 뛰어난 예술가를 키워내는 마법의 약이라도 있었던 걸까?
피렌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일부러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고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르네상스 직전에 번영기를 맞이했고 르네상스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쇠퇴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북이탈리아에 자치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12세기에 피렌체는 자치도시가 되어 모직물 산업과 상업으로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느 북이탈리아 도시들처럼 피렌체 역시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되어 늘 정정이 불안했다. 13세기에 교황파가 대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권력을 잡은 것은 단테에게는 추방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피렌체를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시의 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있던 봉건 귀족들이 물러나게 된 것이다.
새로 정권을 잡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업 활동을 위해 가장 유리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것은 바로 공화정이었다. 옛 로마, 제국 시대 이전 원로원이 다스리던 초기 로마의 영광이 피렌체에서 축소판으로 부활했다. ‘작은 로마’ 피렌체가 실제의 로마를 닮아간 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상인들의 공화정보다 더 큰 변화를 바랐던 시내의 수공업자들과 시 주변의 농민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공화정 정부는 다시 옛 로마의 해결책으로 대응했다. 농노를 해방하고 평민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러나 옛 로마에서도 공화정이 무르익은 뒤에는 결국 제정으로 향했듯이, 공화정으로 봉건제의 폐단을 제거한 피렌체에서도 점차 강력한 권력체가 필요해졌다. 시대의 추세는 강력한 왕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도시조차 공화정으로는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1458년 대금융가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쿠데타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는데, 이것이 메디치 가문의 시작이다.
적어도 형식상 피렌체는 공화국이었으므로 코시모는 왕이 아니었으나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고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냥 피렌체의 정치적 지배 세력으로만 있었다면 메디치 가문은 후대에까지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을 것이다. 메디치는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그 자신이 시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예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피렌체 르네상스의 발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피렌체가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자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잇달아 피렌체를 모방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의 물결은 순식간에 이 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다【피렌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에서도 르네상스 미술이 발달했는데, 이들을 베네치아 화파라고 부른다. 당시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의 선두주자로서 경제와 정치에서 자치도시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런 탓에 미술에서도 피렌체처럼 주지적 경향이 적고 그 대신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채 미술이 발달했다(이는 베네치아가 비잔티움과 친화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풍경을 바탕으로 인물을 배치하는 혁신적인 구도를 선보인 조르조네(Giorgione, 1477년경~1510)와 신화의 인물을 관능적인 색채로 그려낸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 1576)가 유명하다】.
이렇듯 전제군주가 예술을 애호한 데서 서양 예술의 한 가지 특성이 생겨났다(예술상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예술을 둘러싼 여건의 특성이라 해야겠지만), 군주가 예술가들을 식객처럼 거느리고 지원하자 자연히 예술가들은 군주의 가문과 궁실을 중요한 소재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이들을 궁정 예술가라고 불렀다). 1839년 프랑스에서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물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그림뿐이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의 생일이라든가, 군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군주의 명령을 받아 기념사진을 찍듯이 인물화를 그렸다. 이리하여 초상화의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 왕국 같은 공화국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형식적으로 공화국을 취했지만, 실상은 지배 가문이 왕처럼 군림하는 군주국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피렌체의 전경인데, 한가운데에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 중 상당수는 원래 ‘순수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미술 시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해도 미술가들을 먹여 살릴 만큼 크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미술가가 작품의 판매로 생활할 수 있으려면 9만 명의 피렌체 인구가 각 가정마다 작품을 하나씩은 구매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내적 동기에 의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보다 주로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그런 점에서 동양 미술이 발달한 과정은 사뭇 대조적이다. 동양에서도 관청에 속한 화원들은 왕이나 귀족의 명령을 받아 영정을 그렸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문인들이 여가 활동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런 작품들이 후대에 명화로 남았다는 점에서 서양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작품 판매의 의미가 아니라, 권력자가 예술가의 기능을 사주는 형식이었다. 당시의 권력자라면 단연 도시의 지배자인 군주였으나 교회도 그에 못지않은 최고의 주문자였다. 교회를 새로 지으면 건축가를 비롯해 제단화와 벽화를 그릴 화가, 조각상을 만들어줄 조각가 등이 필요했다. 교회는 말하자면 오늘날 영화 산업처럼 종합예술의 공간이었다. 교회의 의뢰를 받은 예술가는 그것을 생업 활동이자 자기 솜씨를 발휘해 명성을 드높일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중에서 보수도 최고이고 최고의 영예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교황청이 의뢰하는 경우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당〉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명화다【그런 면에서 보면 르네상스 미술이 발전한 것은 서양 역사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해준다. 인구 대다수가 먹고살기 급급한 시대에 예술을 후원할 수 있는 계층은 귀족과 부자였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귀족과 부자가 있지만 그들이 언제나 예술과 문화의 창달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의 지배층은 늘 정치권력에 굶주려 있어 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발달시키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대는 더 나중이지만 서양의 근대 음악이 발달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바흐(Johanm Sebastian Bach, 1685~1750),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등 근대 음악의 창시자와 거장들은 모두 궁정 음악가로 일하면서 모시는 군주나 교회의 의뢰를 받아 음악들을 작곡했다. 이를테면 군주가 자식을 낳았을 때 작곡한 축가, 군주가 죽었을 때 작곡한 진혼가 들이 오늘날 ‘걸작’으로 남게 된 것이다(미술이나 음악에서 이른바 ‘순수한 예술적 동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작품을 판매하는 것으로도 예술가가 먹고살 수 있게 되는 19세기부터의 일이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한창일 무렵 미술에 비해 음악은 아직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음악의 르네상스’는 17세기 독일 지역에서 태동하게 된다.
▲ 예술 산업 흔히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을 구분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지금은 고전으로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들도 당대에는 모두 상업 예술이었다. 르네상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상업화의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부유층을 위해 그림에서와 같은 전문 화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알프스를 넘은 르네상스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비옥한 토양이었다면, 북방(알프스 북쪽을 가리킨다)에도 그에 못지않은 환경이 또한 군데 있었다. 바로 플랑드르였다. 이곳은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을 빚은 북이탈리아의 독특한 정치 상황만 제외하면 북이탈리아와 여러모로 닮은 지역이었다. 북해 무역을 바탕으로 쌓은 한자동맹 도시들은 재력에서 북이탈리아에 뒤지지 않았으며, 강력한 지역적 통일 권력이 없다는 점도 비슷했다.
플랑드르에서 피렌체의 조토와 같은 선구자의 역할을 한 화가는 후베르트 반에이크(Hubert van Eyck, 1370년경~1426)와 얀 반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간~1441) 형제였다. 그들은 유화 기법【르네상스 시대 이전, 수천 년 동안 화가들이 사용한 회화 기법은 물감을 물에 섞어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이었다. 교회의 벽화나 제단화 등이 대부분 프레스코화인데, 건물과 한 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색이 바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프레스코를 대체해 템페라 기법이 발명되었다. 이 기법은 물 대신 다른 물질로 용액을 만들었는데, 주로 달걀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물감이 금세 말라버린다는 단점이 있어 화가들이 제 솜씨를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유화 기법이었다. 유화는 기름을 용액으로 쓰기 때문에 잘 굳지 않으며 한번 굳으면 쉽게 변색하지 않았다. 유화 기법을 창시한 반에이크 형제가 없었다면 오늘날에까지 전하는 르네상스 작품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을 처음으로 도입해 후대의 미술사가들에게서 북방 르네상스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평가를 얻었다. 어쩌면 그들이 유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한 것은 무대가 플랑드르이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북이탈리아와 달리 플랑드르 화가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좋은 터전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더욱 밀고 나갈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플랑드르 화가들은 북이탈리아 화가들처럼 그리스 고전 문화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양식을 실험할 수 있었다.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발전시킨 것과, 자연의 풍경과 인물을 함께 배치하는 새로운 시도는 바로 그 산물이다. 또한 오늘날의 SF 영화를 보는 듯한 기괴하고 음울한 작품으로 유명한 보스(Hieronymus Bosch, 1450년경~1516)라든가, 두 차례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뒤 이탈리아의 양식을 과감히 취사선택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도 플랑드르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화가들이다.
전통과 고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플랑드르의 조건은 새로운 미술 양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문주의도 가능케 했다. 북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 고전 문화를 부활시키고 모방하는 데 열중했지만, 플랑드르에서는 그런 열정으로부터 비교적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성과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더 근원적인 형태를 취했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더 충실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를 제쳐두고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오히려 교황이 없기에 더 가능했다.
▲ 참신한 소재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 해도 플랑드르 화가들은 소재를 종교나 고전으로 제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했다. 그림은 얀 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인데, 성공한 부르주아 은행가 부부의 초상이다. 창턱에 놓인 한 개의 조그만 오렌지는 당시 북유럽에서는 처음 수입되기 시작한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교황이 지배하는 이탈리아에서는 성서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르네상스 학자라 해도 적어도 성서에 관한 한 교황청의 해석에 의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촌 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고, 따라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기에 성서 자체에 훨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다. 그 대표자는 플랑드르의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였다.
에라스뮈스는 기존의 권위 있는 해석을 거부하고, 성서에 바탕을 둔 소박한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특히 이탈리아보다 더 타락한 북방의 교회와 성직자 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살아 있는 사례’였다. 철학자나 신학자, 성직자 등 지식인의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한 「우신 예찬(Moriae encomium)」은 그런 토대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탈리아였더라면 혹시 교황이 보낸 자객에게 칼을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에라스뮈스는 그런 대담한 사상을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약 북방의 매력적인 지식인으로 떠오르며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고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곧이어 다가오는 종교개혁의 폭풍 속에서 수없는 개혁 사상가가 탄압을 받게 되니까.
알프스를 넘어온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플랑드르만이 아니라 서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지만, 플랑드르만큼 르네상스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지역은 없었다. 전통의 강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서유럽의 선두 주자였던 만큼 체제가 이미 굳어져 있어 새롭고 창조적인 정신이 스며들 여지가 적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물결은 프랑스를 우회해 동쪽으로는 플랑드르로, 서쪽으로는 에스파냐로 흘러들었다. 마침 에스파냐는 대항해시대에 축적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문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종합판이라 할 ‘초상화의 황제’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가 에스파냐의 궁정에서 활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큰 변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은 독일 지역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고 플랑드르에서 전승한 르네상스의 정신은 당시 교회의 모순이 집적된 곳, 심지어 ‘교황청의 젖소’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리던 독일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르네상스식 기념사진 사진이 없던 시대에 그림은 예술품이라기보다 실용품에 가까웠다. 군주나 주교 들은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았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휘하에 거느린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곤 했다. 그림은 에스파냐의 궁정화가로 명성을 날린 벨라스케스가 다섯 살짜리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을 그린 <시녀들>이다. 왕명을 받고 그렸을 텐데, 벨라스케스는 왼쪽 귀퉁이에 붓을 든 자기 모습을 그려넣어 자신의 ‘기념사진’으로도 만들었다.
인간 정신의 깨어남
르네상스라고 하면 미술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네상스가 인류 역사, 특히 서양의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문 분야였다. 미술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어도 르네상스 시기 학문적 사고의 변화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양 문명이 발달하고 마침내 전 세계의 패자가 되는 데 필수적인 거름이었다.
인간을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한 인문주의는 실로 오랜만에 인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인간의 위상과 세계 내에서의 역할이 신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규정되었으므로 인간을 설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고전 시대 이래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를 얻었다. 오랫동안 인간은 ‘세계의 일부’이기만 했으나 이제부터는 세계를 마주 대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되었으므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새로워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연히 철학의 주제였지만, 아직 철학은 신학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처음으로 부르짖은 것은, 중세에 신학 이외의 ‘잡학’, 즉 교양과목으로 묶여 있던 천문학이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이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할 때,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micus, 1473~1543)는 엄청난 학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1530년 그는 학생 시절부터 오랫동안 연구해온 성과를 조심스럽게 자비로 출판했다. 그것은 로마 시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한 천동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지동설이라는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천동설은 1300년 동안이나 일식과 월식, 행성들의 위치 등을 정확히 예측하게 해주었고 그리스도교 이념에도 충실한 이론 체계였다. 그랬으니 코페르니쿠스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더구나 그 자신도 신앙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학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반응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맨 먼저 교회로 보냈다.
교회는 아직 사태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언뜻 생각하기에는 천동설이 지동설보다 오히려 인문주의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면 우주가 인간 중심의 질서를 취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신 중심의 질서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만든 가장 높은 수준의 피조물이므로 천동설은 신 중심의 세계관을 강화해준다. 그에 비해 지동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을 세계의 다른 존재(예컨대 사물)와 같은 위상으로 격하시키는 듯하지만, 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지동설은 인간이 이성의 힘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문주의는 인간 자체보다 인간 이성(reason)을 중심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인문주의(humanism)라기보다는 이성주의, 즉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실제로 17세기부터는 합리주의적 전통이 자라나면서 이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지게 되므로 인문주의는 합리주 의의 단초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발명했다기보다는 ‘발견’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아리스타르코스가 지동설을 주창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쟁쟁한 학자들이 천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금세 묻혀버렸다. 젊은 시절 북이탈리아에 유학을 왔던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학설을 설명하는 그리스 시대의 문헌에 주목했다. 마침 그리스와 연관된 것이면 모든 것을 부활시키려 했던 당시 북이탈리아의 시대적 추세도 그에게 큰 힘을 주었을 것이다.
예상외로 교회에서 공식 출간을 권유하자 코페르니쿠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 망설이다가 죽기 1년 전에 야 출간을 결심하고 죽음을 앞두고 자기 책을 받아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다행이었다. 지동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교회는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했고, 그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이단으로 몰기 시작한 것이다.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인 것은 그 절정이었다(지동설은 17세기에 완전히 옳은 학설로 인정되지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금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쇄술이 발전한 데 있었다. 15세기 중반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발명함으로써 서적의 대량 인쇄와 유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그렇잖아도 급속도로 확산되어가는 르네상스 문화와 사상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 뒤바뀐 세계관 지구는 수십억 년 전부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설명하는 담론은 고대에 지동설, 중세에 천동설, 다시 근대에 지동설로 바뀌었다. 사물은 변함없지만 그 사물을 규정하는 말은 자꾸 변한다. 이렇듯 앎이란 ‘사물’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림은 지동설이 진리로 굳어진 17세기에 간행된 천문학서의 삽화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이 코페르니쿠스다.
중국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서유럽에 전해진 4대 발명품 (중세 3대 발명품에 종이를 더함)은 모두 르네상스 시기 서유럽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화약이 서유럽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의 불’을 만들어 쓴 게(1권 316쪽 참조) 8세기이고 보면 그 이전일 것이다. 그다음 8세기에는 종이가 유럽에 전래되었고, 11세기 무렵에는 나침반이 그 뒤를 따랐다. 인쇄술의 경우에는 전래 여부가 확실치 않으나 원 제국 시대인 13세기에 유럽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이 발명품들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때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한 가지 예로, 유럽인들은 오래 전에 종이가 전래되었는데도 중세 내내 양피지를 계속 사용하다가(필사본을 만들 때는 양피지가 더 좋았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야 더 값싼 종이를 대량 생산하고 사용하게 되었다.
동양 사회는 인쇄술과 활자를 먼저 발명했으나 주로 지식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예를 들어 실용 서적이 아니면 대량 인쇄를 하지 않고 네 부만 인쇄해서 네 군데의 서고에 보관하는 식이었다(역사서가 대표적인 예다). 그 반면 서양에서 인쇄술은 발명되자마자 지식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인쇄술이 동양에서 먼저 발명되었어도 많이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동양 사회가 늘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동양 사회에서 서적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굳이 서적을 대량으로 생산해 유포할 필요가 없었다. 농사나 약학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은 지배층이 가지고 이용하는 것이지 민간에 확산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쇄술은 주로 궁정에 보관하는 사서(史書)나 관청의 자료를 제작하는 데만 사용했다. 인쇄술을 정부가 독점한 것과 달리 서양에서는 인쇄술이 발명되자 곧바로 민간에 퍼졌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지 불과 50년 만에 서유럽에서는 200여 곳의 출판사-인쇄소가 생겨났다】. 르네상스 시대에 초기 시민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식이 점차 민간에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서적의 필요성이 커졌다. 인쇄술이라는 첨단의 매체가 발달한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 정립된 세계관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그러나 지식의 보급 이전에 인쇄술이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한 분야는 따로 있었다. 인쇄술과 활자가 개발되자 가장 먼저 인쇄하고 싶은 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성서였다. 성서가 대량으로 인쇄되고 폭넓게 보급된 것은 당시 일렁이고 있던 종교개혁의 물결을 거센 파도로 바꾸었다.
▲ 동서양의 인쇄술 왼쪽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성서의 한 쪽이고, 오른쪽은 그보다 700여 년 앞서 중국에서 목판인쇄로 간행된 서적의 한 쪽이다. 인쇄술은 동양에서 먼저 발명되었으나 꽃을 피운 것은 서양에서였다. 동양에서 서적은 지식을 보급하기보다 보관하는 매체였으나 서양에서는 반대였다. 특히 서양의 인쇄술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종교개혁으로 일반 민중에게 성서를 보급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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