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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2장 폴리스의 시대,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2장 폴리스의 시대,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건방진방랑자 2022. 1. 2.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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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스파르타가 아테네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그리스 국제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들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이래 최초로 국제 무대에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 전체로 볼 때 더 중요한 사실은 아카이아 전통의 그리스에 처음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섞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파르타는 어떤 점에서 이질적이었을까?

 

스파르타는 스파르타 교육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Lacedemon)이다. 라케다이몬이란 신화 속의 인물인데,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에우로타스의 딸 스파르테와 결혼해 그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스파르테에서 나온 것이니, 결국 남편의 이름은 공식 국호가 되고 아내의 이름은 별칭이 된 셈이다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에서 스파르타라는 이름을 썼지만, 그다음 세대 인물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스파르타를 라케다이몬이라고 불렀다. 이는 역사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더 공식적인 역사서였음을 보여주는 한 예다(사실 투키디데스의 책도 원래 제목은 그냥 역사였으나 후대의 학자들이 두 책을 구분하기 위해 나중에 나온 투키디데스의 책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기행문이나 박물지 같은 책인 데 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훨씬 더 엄정한 역사 서술을 보여준다.

 

지금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다. 그렇듯이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면서 그리스의 역사를 이끌어간 양대 축이었다. 단적으로 비교해 아테네는 아티카의 중심으로서 민주정치를 꽃피웠던 반면,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맹주로서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발달한 나라였다. 스파르타에 군국주의 전통이 생겨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도리스인이 남하한 직후 그리스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과잉이었다. 사실 인구 과잉은 이미 미케네 시대부터 문제가 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일찍부터 해상 진출과 해외 식민을 시도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 형편에 북쪽에서 도리스인들까지 왔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그리스 전체의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통적인 해결책은 해외 식민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린토스와 칼키스 같은 나라들이 그런 방책을 구사했다. 새로운 해결책은 아테네처럼 무역을 활성화시켜 수출을 늘리는 방법이다. 그 때문에 앞서 본 것처럼 아테네에서는 평민층이 성장하는 새로운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둘 다 부작용이 없는 말끔한 해법은 아니다.

 

 

그리스의 이질적 요소 스파르타는 처음부터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이루어진 군사 국가였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맹주로 군림하는 동안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면서 아테네에 도전장을 내밀 만큼 성장한다. 사진은 스파르타의 유적인데, 군사 국가이기 때문인지 아테네에 비해 훨씬 단조로움이 느껴진다.

 

 

이 인구 과잉 문제에 대해 스파르타는 제3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힘만 있다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인데, 무력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이 방법으로 꽤 재미를 보았다.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는 두 차례의 메세니아 전쟁을 일으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스파르타는 반도 남동부인 라코니아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남서부인 메세니아를 정복함으로써 반도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리스의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고대에 도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연결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부에 먼저 정착했다.

 

하지만 이 방법에도 문제는 있었다. 원래 라코니아를 정복할 때부터 스파르타는 피정복민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비교적 저항이 심하지 않고 스파르타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인 사람들을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렀고, 끝까지 저항한 골수 반대파를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다. 페리오이코이에게는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불이익을 주지 않았지만, 헤일로타이에게는 그 정도에 그칠 수 없었다. 그들은 복종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카이아인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도리스인인 스파르타와 민족적으로도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를 철저히 억압하는 정책을 취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의 지주들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했으며, 주거지도 제한되어 마음대로 이주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를 엄중히 감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헤일로타이의 힘센 젊은이를 밤에 몰래 살해하는 관습을 제도화하기까지 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감시하려면 온 국민이 사방을 경계하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군국주의화는 필연적이었다.

 

아테네에 드라콘이 있었듯이, 스파르타에도 전설적인 입법자인 리쿠르고스(Lycurgos)가 있었다. 기원전 9세기에 그는 군국주의를 아예 전 국민의 생활로 만들었다. “허약한 어린이는 버린다. 모든 남자는 7~30세까지 집단생활을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런 스파르타 특유의 기풍은 리쿠르고스가 만들었다고 전한다(심지어 우수한 남성은 우수한 유부녀를 그녀의 남편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제도도 있었다). 아테네에서 실패한 왕정(참주정치)이 스파르타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전통에 있었다스파르타의 왕은 대개 두 명이었는데,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상당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원하기만 하면 어떠한 나라에 대해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스파르타 시민은 누구도 이것을 방해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국외로 추방된다.”.

 

메세니아 전쟁 이후 헤일로타이의 수가 급증해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많아지자 군국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당연하지만 그 결과로 스파르타는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중장보병(hoplites)은 바로 스파르타를 대표하는 육군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밀집대형 전술은 그리스 군대의 대표적인 전술로 발달했다. 기원전 5세기에 이 밀집대형 전술은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그리스를 구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폴리스의 형질 변경

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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