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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암흑을 가져온 민족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암흑을 가져온 민족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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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을 가져온 민족

 

 

공교롭게도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전쟁을 주도한 미케네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미케네는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왕국이었다. 개방성이 강한 크레타의 궁전들에 비해 미케네 왕궁은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성벽을 이루는 돌들이 워낙 커서 키클로페스의 성벽이라 불렸다고 한다. 키클로페스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예술 양식도 크레타 문명에서 물려받았으나 그 내용은 전쟁이나 사냥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힘센 왕국이 왜 무너졌을까?

 

문명이란 물리력에 의해 발전하는 게 아니다. 물리력을 통해 문명을 개척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의 지속적 발달을 위해서는 물리력이 오히려 약보다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보았던 오리엔트의 강력한 전제 국가 아시리아의 경우가 좋은 예다. 더구나 미케네는 군주의 권위를 내세워 오리엔트 전제군주를 모방하려 했으나 그나마 불완전한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 오리엔트 국가들과 달리 미케네는 느슨한 부족 연맹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토지제도에서도 미케네는 사유지 이외에 공유지를 설정했는데, 이것은 공동체적 성격이 잔존했음을 보여준다. 마치 고대 중국 주나라의 정전(井田)처럼 미케네 농민들은 공유지를 공동 경작해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미케네의 귀족들은 중앙 정부에 공납을 바치는 것 이외에는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것을 일종의 고대적 봉건제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의 미케네와 중국의 주나라에 봉건제가 성립했다는 것은 역사 발전 단계의 보편성을 말해준다.(종횡무진 동양사, 37~39). 문명의 성격으로 보면 미케네 문명보다 오히려 크레타 문명이 더 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 문명의 진정한 후예가 되기는 어려웠다.

 

군사적 성격이 붕괴의 내적인 요인이라면 그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은 외부에서 작용했다. 또다시 민족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 전 아리아인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이룩되었지만, 기원전 12세기~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도리스인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파괴되었다. 더구나 도리스인은 문명의 개척과 건설보다는 파괴에 능한 난폭자였다고 전한다(이런 역사적 평가는 다분히 모함일 수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이 시기부터 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까지 약 300여 년 동안 그리스는 암흑시대를 맞게 된다. 암흑시대란 당시 그리스의 문자였던 선형문자 B의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붙인 이름인데, 과연 300년이라는 긴 시기가 실제로 암흑기였는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그리스의 철기시대는 도리스인이 그리스를 지배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암흑시대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호메로스는 그 암흑시대의 끝자락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저작은 암흑시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므로 암흑시대에 관한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암흑시대는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위한 준비기이기도 했다.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고 농경문화를 이루었다(고대 그리스의 군국주의 국가인 스파르타가 바로 그들의 후예다). 따라서 해상무역에 주력한 그리스인들과는 기질부터 달랐다. 물론 일부 그리스인들은 그들과 섞이거나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도 했지만, 그리스인의 본류는 도리스인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터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예 그리스를 떠날 것인가? 그리스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은 이오니아로 가서 많은 식민시를 건설했다. 이오니아에는 일찍이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식민시들이 있었으므로 그리스인이 정착하기에도 용이했을 것이다(이오니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또한 그리스 본토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그리스 중부의 아티카로 모여들었다. 아티카 고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다.

 

이오니아와 아티카 중 문명의 발달이 더 왕성했던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이오니아다. 아직도 오리엔트 문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니 이오니아가 지리상 더 유리했다. 게다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온 그리스인들의 각오는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굳지 않았을까? 이오니아의 경험이 그리스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은 바로 폴리스(polis, 도시국가)의 성립이다.

 

 

도리스인의 그리스 식민시 역사가들은 도리스인의 침략이 그리스에 암흑기를 가져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리스 문명에 도리스인이 합류했다고 보는 게 옳다. 도리스인에게 밀려난 그리스인이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본받아 도리스인도 해외에 식민시를 건설했다. 사진은 시칠리아에 건설된 도리스인의 식민시인 셀리누스의 유적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신화가 말해주는 역사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중매

신화와 역사의 경계

암흑을 가져온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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