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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6장 국민국가의 원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4부, 6장 국민국가의 원형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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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이베리아의 변화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못지않게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베리아라면 바로 에스파냐, 8세기 초반 이슬람의 침략을 받아 이슬람 문명권의 일부로 편입된 지역이 아니던가? 그리고 곧이어 9세기에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시칠리아와 더불어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이 지배하는 유럽으로 남아있던 곳이 아닌가? 그 이슬람이 이제 서유럽 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니! 지중해 동쪽 끝에서 날아온 승전보는 지중해 서쪽 끝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이슬람이 에스파냐의 전 지역을 지배한 게 아니었다. 마르셀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이슬람군을 격파한 뒤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로 물러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이슬람 식민지를 건설했다. 물론 북부도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슬람에게 밀려난 에스파냐인들의 터전이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지만 피레네를 넘어간다고 해도 그 북쪽은 프랑스의 아키텐, 제집에서 쫓겨난 철새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줄 텃새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반도 북부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했고, 그런 배수진의 자세가 효과를 보아 이슬람은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에스파냐인들은 옛 서고트족, 한때 용맹을 떨친 게르만의 강성한 민족이었으니 이슬람이 어쩌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반도 북쪽 끝의 산악 지대로 도피해 아스투리아스라는 작은 왕국을 세우고, 남부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해 살아가는 무기력한 동포들을 비난하며 재기를 꿈꾸었다. 서유럽이 중세의 안정기 속에서 서서히 발전을 이루는 동안 이슬람은 그에 반비례해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서고트의 후예들은 하나둘씩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스투리아스는 레온으로 확대 재편되었고, 레온에서는 새로 카스티야가 분리되어 나왔다. 이미 그 동쪽에는 일찍이 샤를마뉴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가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해 있었다. 바야흐로 독립의 계절이었다. 카스티야가 생겨날 무렵 나바라에서 갈라져 나온 바스크인들은 그 동쪽에 아라곤 왕국을 세웠다. 또 그 동쪽의 바르셀로나에는 이미 백작령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도 독립의 계절풍을 타고 자연스럽게 미니 왕국으로 성장했다. 이로써 11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피레네 산맥 남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섯 개의 왕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문명의 도시 코르도바 에스파냐 남부의 코르도바는 로마 시대에 창건된 도시지만 이슬람 지배기에 크게 발달했다.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과 쌍벽을 이루는 서방의 보배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리스도교권으로 수복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두 문명의 흔적이 공존하는 도시다.

 

 

그 나라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십자군이 조직되기 이전이었다. 때마침 코르도바의 식민지 정부에서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그들은 잃은 영토를 되찾고 이교도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기 위해 일어섰다. 비록 나라는 다섯이지만 같은 그리스도교권의 형제들이므로 공동 전선을 펴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멀리 동쪽에서 날아온 십자군의 승전보는 이들에게 더욱 큰 자신감을 주었다. 이들은 일제히 이슬람을 압박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했다. 선봉에 선 카스티야는 레온을 병합하고 반도 중부 마드리드 일대까지 손에 넣었으며, 아라곤은 사라고사를 정복하고 바르셀로나를 병합해 서열 2위를 유지했다. 또한 카스티야에서 분리되어 나온 일파는 남쪽으로 치고 내려가 포르투갈 왕국을 세웠다. 이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서로 경쟁하듯 레콘키스타에 주력해, 마침내 십자군 전쟁이 끝날 무렵인 13세기 후반에는 코르도바, 세비야, 발렌시아 등 반도 남부까지 모조리 두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제 이슬람은 반도 남단의 그라나다만 겨우 유지하는 형국이 되었다(그라나다는 15세기 말에 에스파냐의 영토로 수복된다. 800년이나 이슬람이 지배했기에 그라나다에는 특히 이슬람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다)레콘키스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에스파냐인들이 열심히 싸운 덕분도 있지만, 이슬람 제국이 현저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3세기 초 이슬람 제국은 아바스 왕조가 유명무실해지고 셀주크튀르크가 흥기하면서 혼란에 빠진 탓에 유럽의 먼 서쪽 식민지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레콘키스타는 이슬람 제국을 상대로 한 게 아니라 에스파냐에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싸운 것이었다. 급기야 이슬람 제국은 1258년에 아예 멸망하고 만다. 에스파냐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방에서 몽골 원정군이 침략해왔기 때문이다. 본국이 무너지자 에스파냐의 이슬람교도들은 더욱 힘을 잃었으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는 커녕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라나다는 그 사투의 결과로 얻은 생존의 장소였다.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에스파냐는 비로소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에스파냐가 서유럽 왕가들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뒤늦게 서유럽 세계에 동참한 탓에 이 지역에는 봉건제가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봉건적 발전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중세의 상당 기간을 허송세월했으니 에스파냐는 서유럽의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 걸까? 그러나 근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그랬어도 그 당시에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서유럽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지중해 무역에 동참할 처지가 못 된 덕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서쪽의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대항해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후발 주자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에스파냐의 십자군 정식 십자군의 역사에 등재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인 성전도 있었다. 그림은 에스파냐의 이슬람 세력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토로사 전투에서 승리한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8세의 모습이다. 이때부터 에스파냐에서는 그리스도교 세력이 힘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레콘키스타가 시작된다.

 

 

 서유럽의 확대: 영국의 편입

 

 

이베리아 반도와 더불어 십자군 시대에 서유럽 세계로 편입된 곳은 영국이다. 1066년 노르망디 공으로서 영국 왕이 된 윌리엄 1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앵글로색슨 시대의 관습과 제도를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일단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의 성가신 제도 개혁 같은 것은 원치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그로서도 한 가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하들의 논공행상이었다. 자신을 믿고 바다를 건너와 해럴드를 물리치고 영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노르망디 출신 가신과 기사 들만큼은 어떻게든 배려해야 했다.

 

윌리엄은 무엇으로 공을 논하고 상을 주었을까? 물론 토지다. 신천지를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굳이 기존의 앵글로 색슨 귀족들이 가진 토지를 빼앗지 않더라도 개국 공신들에게 줄 토지는 남아돌았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줄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것도 아주 쉬웠다. 익숙한 방식을 채택하면 된다. 윌리엄은 토지와 더불어 그 토지에 속한 농민들까지 나누어주었다. 봉토와 농노가 생겨났으니 이것은 바로 대륙(주로 프랑스)의 봉건제다. 윌리엄은 당시 영국에 별로 퍼지지 않았던 봉건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이것으로 영국은 중세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 신고를 마친 셈이다.

 

그러나 대륙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성장한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도입되고 실시된 경우이므로, 아무래도 대륙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는 왕권이다. 프랑스에서는 옛 프랑크 시대의 귀족과 신흥 귀족이 자연스럽게 봉건 영주로 변신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봉건제를 확립했다. 따라서 영주들 간에 서열은 있었으나 특별히 한 명의 영주가 압도적인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그 결과 왕권은 보잘것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영국의 윌리엄은 처음부터 정복자의 지위이고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조의 개창자라는 자격으로 명령을 통해 봉건제를 실시한 것이었으므로 같은 봉건제라 해도 프랑스의 왕보다 훨씬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윌리엄의 왕권은 프랑스의 왕만이 아니라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도 강력했다. 또한 그는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더 넓은 왕실 직속 토지와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첨단의 봉건제가 도입됨에 따라 영국의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은 급속히 사라졌다. 구시대의 유물인 위탄게모트는 폐지되었고,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전국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전국의 행정과 사법을 관장했다. 영국은 이제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중앙집권 체제의 봉건 왕국이 된 것이다.

 

 

영국 귀족들의 사냥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팔자가 늘어진 사람은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영국의 왕은 같은 시대 대륙의 어느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힘센 봉건 영주일 뿐 정치적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영국은 귀족들이 각자 자기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귀족들의 세상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후 영국에서 귀족들 중심의 의회가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룬다. 그림은 영국 귀족들이 사냥을 즐기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직 영국은 대륙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은 어디까지나 노르망디 공이 정복한 지역일 뿐이었으므로, 이를테면 대륙의 어느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힘센 봉건 영주일 뿐 정치적 중심이 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노르망디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가진 것(권력과 재산)만으로 치면 영국의 왕은 프랑스의 왕보다 강력하고 부유했으나, 지위의 면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슬람에서 해방되어 새로 서유럽 세계에 편입된 에스파냐의 왕들보다도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의 왕으로서도 그런 서열을 별로 굴욕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덴마크의 크누드가 그랬듯이, 윌리엄은 영국보다도 자신의 원래 소유지인 노르망디에 더 관심이 컸고, 이후의 영국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륙에서 볼 때 아직까지 영국은 서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고, 문명의 오지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 대륙의 인식은 엉뚱한 문제를 낳았다. ‘노르망디의 지배자가 영국의 왕이 되므로 노르망디의 왕은 자동적으로 영국 왕이 된다.’

 

이게 프랑스 귀족들의 생각이었다(이렇게 영국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영국이 서유럽에 편입되면서 그 가치가 예전보다 높아졌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 왕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은 물론 조상들의 고향인 노르망디도 영국 왕실의 소유였다. 이런 시각 차이로 인해 노르망디를 둘러싼 분쟁의 불씨는 점점 커져갔다.

 

1128년에 프랑스 서부의 앙주 백작 조프루아는 정복왕 윌리엄의 손녀인 마틸드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고, 마틸드는 그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인 데다 3년 전에 죽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미망인이었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인데, 어떤 정략이 숨어 있었을까? 앙주 가문은 10세기부터 노르망디 남쪽을 영지로 갖고 있었는데, 가세를 키워 12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의 유력 가문으로 떠올랐다. 당시 영국 왕 헨리 1(윌리엄 1세의 아들)는 앙주 가문의 힘을 빌려 노르망디를 지킬 마음을 먹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혼맥을 구축하는 것이다. 헨리는 때마침 싱글이 된 딸을 앙주 가문의 며느리로 보냈는데, 그녀가 바로 마틸드였다. 덕분에 앙주 가문은 노르망디를 거저 얻게 되었으니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헨리가 후사도 없고 후계자 지명도 하지 않은 채 죽자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헨리의 조카 스티븐은 재빨리 공석인 왕위를 물려받는 데 성공했으나, 바다 건너 노르망디에서 마틸드가 노려보고 있었다. 젊은 남편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마틸드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영국은 노르망디보다 훨씬 넓고 군대도 강했으나, 노르망디는 엄연히 영국의 본국이자 모국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영국 귀족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사병들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스티븐은 마틸드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국이 노르망디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런던의 시민들이었다. 싸움을 방관하고 있던 런던 시민들은 마틸드가 영국을 우습게 여기고 거드름을 떠는 태도에 격분해 그녀의 대관식을 육탄으로 저지했다. 애초부터 영국에 눌러 살 생각은 없었던 마틸드는 영국 왕위를 순순히 포기하고 노르망디로 귀환했다당시 마틸드의 별명은 여황제였다. 독일 황제의 미망인인 데다 프랑스 유력 가문의 상속녀, 게다가 영국 왕위 계승권까지 쥐고 있었으니, 권력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유럽 왕실들이 통혼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프랑크가 분열될 때부터 따지면 9세기부터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성행하는 것은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이 사건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노르망디는 영국 왕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앙주 가문의 것이 되었다. 둘째, 스티븐의 왕위는 인정되었으나 그의 가문으로 후사를 이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 이제 영국 왕위는 어떻게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154년 스티븐이 죽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조프루아와 마틸드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제 앙주 가문은 정식으로 영국 왕가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헨리의 아버지인 조프루아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새 왕조의 개창자는 조프루아가 되었을 것이다. 조프루아는 자기 투구에 금잔화의 가지(planta genista)를 꽂고 다녀 플랜태저넷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그게 새 왕조의 이름이 되어 영국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 왕조가 생겨났다(또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새 왕조의 이름을 지은 경우다)플랜태저넷 왕조는 앙주 왕조라고도 부른다. 사실상 이 무렵에는 영국에 앙주 왕조가 생겼다기보다는 앙주 왕조가 영국을 차지했다고 말하는 게 옳다. 즉 잉글랜드는 앙주 왕국의 일부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덴마크 혈통으로 출발한 영국 왕실에는 이때부터 프랑스의 혈통이 섞이게 되었다. 윌리엄 시대에 봉건제도가 이식된 데 이어, 플랜태저넷 왕조의 성립으로 영국은 대륙의 국제 질서에 포함되면서 유럽사의 한 바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후부터는 특히 프랑스의 역사와 맞물린다.

 

 

 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영국에 새 왕조를 건설한 앙주 가문은 분명히 프랑스의 유력 가문이다. 그런데 왜 이 분쟁에 프랑스 왕가는 개입하지 않은 걸까?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으로 본다면 당연히 프랑스 정부가 관여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 프랑스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아닐뿐더러 당시 서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에 존재하던 일반적인 왕국’, 즉 초기 영토 국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였다. 서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전통적인 프랑스가 어찌 된 일일까?

 

물론 프랑스에도 왕이 있었고, 왕조도 있었다. 서유럽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초대 국왕이며, 서유럽 왕실들의 모태를 이룬 카롤링거 왕조는 바로 프랑스의 왕조가 아니던가? 역사로만 본다면 어디에도 뒤질 게 없는 프랑스다.

 

그러나 프랑스는 봉건제의 본산이었던 만큼 그 폐해도 가장 크게 겪어야 했다. 봉건제의 정치적 측면은 바로 분권 체제가 아닌가? 에스파냐와 영국이 신흥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무렵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끊긴 것과 비슷한 무렵(1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도 카롤링거 왕조 대신 유력한 귀족들이 저마다 가문을 이루어 프랑스의 왕계를 잇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이미 카롤링거 왕가에서만 왕을 배출한 것은 아니고 귀족 가문들끼리 적절히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던 터였다. 어찌 보면 왕권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987년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가 이제부터 자기 아들에게 프랑스 왕위를 세습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귀족들은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카페(Capet) 왕조는 이렇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출범했다.

 

 

오늘날의 파리를 만든 인물 카페 왕조의 개창자인 위그 카페(오른쪽)가 성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가 카페 왕조를 열었다고 해서 긴장하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당시 카페 왕조는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만을 다스리는 봉건 영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페 왕조가 프랑스에 전국적인 정치력을 확보하는 시기는 12세기 후반부터다. 그러나 카페 왕조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이랬으니 카페 왕조의 운명은 뻔했다. 11세기까지 카페 왕조의 왕들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의 지역만 영지로 소유하고 지배했을 뿐, 다른 봉건 귀족들의 영지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못했다(왕보다 더 큰 세력을 자랑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니 간섭하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근근이 왕권을 이어오던 카페 왕조에 도약의 계기가 찾아왔다. 1108년에 왕위에 오른 루이 6세는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하급 영주들을 확실히 단속하지 않으면 자기 밥마저 찾아 먹지 못하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예전의 허약한 카페 왕조를 염두에 둔다면 그가 마음만 먹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느 정도 비빌 언덕이 있었다. 얼마 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이 한창일 때 카페 왕조는 일찌감치 교황의 편을 들어 적절한 타협을 이루고 교회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418쪽 참조), 예상대로 자기 밥을 확보하고 난 다음 루이 6세의 야망은 이참에 카페 왕조를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왕가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그는 강력한 봉건 귀족들인 아키텐 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을 제압하고 아들 루이 7세에게 처음으로 왕다운 왕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었다.

 

 

앙주의 상속자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린 엘레오노르가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했을 때 가슴이 뜨끔했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아키텐의 상속녀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헨리는 재빨리 앙주의 영유를 주장하고 나서서 골치 아프게 만드는데, 이것이 나중에 백년전쟁의 씨앗이 된다. 그림은 헨리와 엘레오노르가 부부애를 과시하듯이 다정하게 교회를 헌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의 왕은 프랑스를 지배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루이 7세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키텐 공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결국 이혼했다. 문제는 1152년 그녀가 앙주 가문의 상속자와 재혼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새 남편은 바로 2년 뒤에 영국에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게 되는 헨리 2세였다. 이미 프랑스에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를 소유하고 있던 헨리 2세는 수지맞는 결혼으로 아키텐마저 얻음으로써 프랑스 서부 지역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그의 아버지 조프루아도 마틸드와의 결혼으로 재산을 불렸으니 앙주 가문은 일찍부터 혼맥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 문제는 200년 뒤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지는 백년전쟁의 불씨가 된다.

 

첫 결혼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세 번째 결혼에서 비로소 대박을 터뜨렸다. 아들 필리프를 낳은 데다 유력한 귀족들인 샹파뉴 백작, 블루아 백작을 처남으로 두게 된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는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가 서부 지역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카페 왕조가 지배하는 형세가 되었다.

 

 

필리프에게 온 편지 영국 왕 리처드와의 불화로 십자군 전쟁에서 혼자 되돌아온 필리프에게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다. 성지가 다시 위기에 처했으며, 이슬람군의 침략으로 입은 피해가 상당하다는 내용이다(편지 아래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은 모두 편지가 배달되는 동안 여러 군데에서 찍은 확인 도장이다). 이런 편지가 왔다는 사실은 당시 프랑스의 왕이 십자군의 리더였음을 말해준다. 두목이 내뺐으니 3차 십자군이 실패할 것은 당연했다.

 

 

루이 7세의 아들이 바로 존엄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리프 2(Philippe II, 1165~1223, 재위 1180~1223). 그는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의 동료가 헨리 2세의 아들로 영국 왕이 된 리처드 1세였다. 프랑스 내의 영토를 놓고 반목이 심하던 그들이었으니 원정 도상에서부터 서로 심하게 다툰 것은 당연했다. 필리프가 원정을 중지하고 되돌아온 이유도 사실은 리처드가 없는 틈을 타 노르망디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귀족들의 반대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리처드는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처럼 당대에 으뜸가는 무예를 자랑하는 전사였으니 필리프로서는 맞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패배와 발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패하고 도망치는 영국 왕 존의 모습이다. 왼쪽에 말에서 떨어진 인물은 필리프인데, 영국에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대한 것은 존에게 큰 불행이었으나 영국 전체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귀족들이 패배한 존을 압박해 마그나카르타를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뛰어난 전사라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왕이 되는 건 아니다. 리처드는 인품도 훌륭했고 정치적 자질도 탁월한 인물이었으나 불과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한 데다 대부분 국외에 있었던 탓에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동생 존의 폭정으로 로빈 후드가 의적이 된 것은 의도치 않은 결과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한 존은 형의 영웅적 자질을 전혀 닮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책략에는 형보다 한 수 위였다. 1200년 그는 앙주 부근 푸아투의 한 지방인 앙굴렘을 소유하기 위해 그 상속녀인 이사벨라와 결혼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그녀의 약혼자였던 드 뤼지냥에게 아무런 보상도 지불하지 않은 게 빌미가 되었다. 드 뤼지냥은 즉각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에게 탄원했다.

 

필리프로서는 없는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든 격이다. 그는 상급 군주의 자격으로 존을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갈 바보는 없다. 존이 이를 거부하자 필리프는 2단계 조치로 넘어간다. 존이 왕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봉건적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영국 왕보다 지위상 상급 군주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필리프의 이런 태도는 어디까지나 구실이었을 뿐이다. 이 구실을 이용해 필리프는 앙주를 몰수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존은 조카인 독일 황제 오토 4세와 연합해 프랑스를 공격하나 패하고 만다.

 

앙주가 프랑스 영토가 됨으로써 노르망디도 자연히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는 아키텐 일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엄청난 손실에 영국의 봉건 귀족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1215년에 존은 결국 그들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귀족의 요구 사항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카르타 Magna Carta(대헌장)마그나카르타는 전문(前文)63개조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본적인 그 내용은 국왕이 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하고, 모든 자유인은 국왕이 아닌 법의 지배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국왕보다 법이 우위에 있다고 밝힌 점 때문에 마그나카르타는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출범을 알리는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지만, 여기에는 조금 과장이 있다. 영국의 귀족들이 마그나카르타를 성립시킨 것은 민주주의를 의도했다기보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그나카르타는 오히려 봉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노력의 표출이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봉건제가 지나쳐서 생기는 폐단보다는 봉건제도가 모자란 데 따르는 폐해가 더 컸던 것이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13세기 말에는 드디어 유럽 최초의 의회가 영국에서 탄생하게 된다. 마그나카르타로 영국의 왕은 강력했던 왕권을 잃었지만 거꾸로 영국인들은 서유럽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도약할 계기를 얻은 것이다.

 

 

의회의 먼 기원 로빈 후드에게 농락당한 영국 왕 존이 귀족들에게도 농락당한 결과로 맺은 마그나 카르타다. 이것을 기원으로 수십 년 뒤 영국에는 세계 최초의 의회가 성립하지만(그래서 오늘날 영국인들은 ‘700년 의회의 역사를 자랑한다), 실은 대륙의 봉건제가 인위적으로 이식된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유럽의 그늘: 독일과 이탈리아

 

 

십자군 전쟁이 진행된 11~13세기는 서유럽의 원형이 생겨난 시대다서유럽 세계가 형성되는 계기는 얼추 세 가지로 잡을 수 있다. 앞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서유럽의 원시적 형태가 생겨난 것이 1차 계기라면, 십자군 시대는 2차 계기가 된다. 마지막 3차 계기는 근대 유럽을 낳은 17세기 30년 전쟁부터 20세기 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란기다. 이 무렵 서유럽 세계는 지역 전체적으로는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각국 내부에서는 중앙집권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서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갈등과 반목 속에서 초기 국민국가로 성장해갔다. 편입생과 재학생이 꾸준히 학업에 열중하는 것은 휴학생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뒤늦게 배움의 필요성을 깨달은 이 휴학생은 바로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10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으로 서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독일은 이후 오히려 교황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처지라는 점 때문에 독자적인 행보에 제약이 많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세 가지 특징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제국이었으나 정작으로 독일에 주어진 것은 신성과 로마뿐이었다. 신성의 영역만 관장해야 할 로마의 교황이 독일 국내의 정치에 사사건건 간섭했으니까. 오토 1세를 배출한 작센 왕조가 11세기 초반에 왕통이 끊어지고 새로 잘리어(saler) 왕조가 들어섰어도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름만 황제일 뿐 잘리어 왕조의 황제들은 여전히 독일 지역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적어도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의 심정은 그랬다.

 

재기를 꿈꾸던 하인리히 4세에게 좌절을 안겨준 사람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였다. 그는 아버지가 거의 꿈을 이루었을 무렵, 교황과 결탁해 아버지를 축출하고 1105년에 황제가 되었다. 이후 그는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과 타협을 보고 종교 문제를 매듭짓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런 타협이 좋지 않았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루이 6세가 교황과 타협을 이룬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오히려 봉건 귀족들의 발언권만 강화시켜준 결과가 되었다(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독일의 귀족들이 프랑스의 귀족들에 비해 신앙심이 높았던 탓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교황이 배경에 불과했으나 독일에서는 교황이 거의 실세였던 것이다. 그런 탓에 보름스 협약 이후 하인리히 5세는 독일 귀족들의 반발을 받아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나, 독일을 위해서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을 것이다.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잘리어 왕조는 이름처럼 대가 잘리었으며,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하나같이 왕권을 강화하고 초기 국민국가를 이루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분권화의 길로 나아갔다(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아내 마틸드는 그가 죽는 바람에 팔자를 고쳤지만).

 

 

신성과 세속의 균형 이 그림은 보름스 협약의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신이며, 그 양쪽으로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다. 요컨대 교황과 황제는 신 앞에서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렇게 신성과 세속이 균형을 이루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세속 군주들이 교회마저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잘리어 왕조의 뒤를 이은 것은 슈바벤에 근거지를 둔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였다. 전 왕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황제 프리드리히 1(재위 1152~1190)는 교황과 다투기 전에 먼저 독일 내의 귀족들부터 교통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백 번 옳은 노선이었다. 그는 강력한 맞수인 벨펜 가문에 남독일의 바이에른을 양도하고, 그 대신 중소 귀족들을 하나씩 제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북으로는 덴마크, 동으로는 폴란드, 헝가리의 봉건 귀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남으로는 부르군트(지금의 오스트리아 동부)가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토 1세 이래로 처음 군주다운 군주가 출현한 것이었다.

 

부르군트를 손에 넣은 프리드리히는 곧바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를 노렸다. 롬바르디아는 독일의 황제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곳, 일찍이 샤를마뉴와 오토 1세 등 역사상의 대제들도 롬바르드 왕을 칭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롬바르디아는 상징적으로 대제의 관문이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교황령의 북쪽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롬바르디아를 점령한 것은 불가피하게 교황과의 충돌을 빚었다. 어차피 독일 황제와 교황은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나 당시는 교황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절정에 달했을 무렵이다(13세기 무렵 교황청의 수입은 서유럽 모든 군주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그전까지 기세 좋게 나아갔던 황제군은 그만 교황군에게 호되게 쓴맛을 보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좌절하지 않았다. 강하면 우회하라. 그는 교황령을 피해 이탈리아 남쪽으로 진출한 뒤 맏아들을 시칠리아의 상속녀와 결혼시킴으로써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다지금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일부이지만 역사는 이탈리아와 사뭇 다르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예로부터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리스 시대에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식민시들이 발달해 있었으며, 포에니 전쟁 중에는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의 쟁탈지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최초의 속주였다가 로마가 멸망하고 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332쪽 참조). 또한 9세기부터는 이슬람이 섬 전체를 지배했으며, 11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콘키스타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여기에서도 국토회복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주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1130년 시칠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 왕국을 세웠다. 그러던 중 불과 한 세대 만에 다시 프리드리히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시칠리아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유럽 강국들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중반에야 이탈리아로 편입된다. 이런 수난의 역사가 시칠리아를 마피아의 고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비록 숙적(교황)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충분한 전과를 올리고 독일로 귀환한 프리드리히는 밀린 숙제를 해결했다. 바로 벨펜 가문으로부터 바이에른을 빼앗은 것이다. 이로써 그는 그때까지 독일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독일을 만들었다. 그런 그가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 3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 객지에서 죽은 것(395쪽 참조)은 어쩌면 독일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연장을 얻는 법인데, 그럴 만한 힘과 자격을 갖춘 프리드리히가 죽으면서 독일의 중앙집권화는 아예 차갑게 식어버렸던 것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위해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또 한 명의 뛰어난 군주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2(재위 1215~1250)는 아버지 하인리히 6세가 죽을 때 겨우 네 살이었다. 호엔슈타우펜의 숙적인 벨펜 가문에서는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오토 4세가 제위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어린 프리드리히는 할 수 없이 외가인 시칠리아로 가서 소년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는 얼마 못 가 숙부(영국 왕 존)를 잘못 둔 죄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제위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존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국 귀족들 앞에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던 그해(1215)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지원으로 오토를 몰아내고, 호엔슈타우펜의 대를 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제위에 오르는 데는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도움도 컸지만, 젊은 프리드리히는 역대 교황들 중 최대의 야심가이자 최강의 권력을 자랑하던 인노켄티우스를 대단치 않게 여겼다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이 종교적 권위를 지니려면 세속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긴 인물이었다. 쉽게 말하면 현실 정치에서도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사이가 좋았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는 결혼 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간섭했으며, 캔터베리 주교 임명 문제로 그의 명령을 거역한 영국의 존은 힘으로 굴복시켰다. 또한 1215년에는 라테란 공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의 고삐를 다시금 죄었다. 그러나 아무리 교황권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세였어도 서유럽의 분권화를 향하는 시대의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친가는 교황과 경쟁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었고, 그의 외가는 이슬람 문화에 젖어 있는 시칠리아였던 것이다.

 

따라서 1227년 십자군 전쟁을 중단했다는 이유로 교황(그레고리우스 9)에게 파문을 당한 사건은 프리드리히에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자극을 주었다(교황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파문은 이미 낡은 무기였다). 그는 이듬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군 왕국을 접수하고 성지를 사유화해버렸다. 여기에 교황이 중부 이탈리아를 침략한 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그곳을 잃으면 외가이자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로 가는 길도 잃게 된다. 분노한 프리드리히는 교황군을 격파하고 중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합쳐 통일 왕국으로 재편했다(로마가 멸망한 이후 800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격리되어 있었으니, 프리드리히의 조치가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다른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이름의 할아버지(프리드리히 1)처럼 프리드리

2세도 혹시 샤를마뉴-오토로 이어지는 대제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독일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면 그의 정책은 당연히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일개 왕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다(제국은 애초부터 없었는데도), 제국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은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정부에는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직속 관할 하에 있는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정치와 경제를 모두 직접 통제하는 한편, 독일 귀족들에게는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독립과 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앞서 샤를마뉴나 오토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전통이 미약한 제국은 강력한 군주들이 연속으로 등장해야만 제국의 골격을 유지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1250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죽으면서 황제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제위를 물려받은 콘라트 4세는 교황은 물론 독일의 귀족들과도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칠리아로 들어가 시칠리아의 왕에 만족했으나 그마저도 몇 년 못 가 죽고 말았다. 이로써 100여 년을 존속하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끝났다. 독일의 귀족들은 시대를 역행해 분권화의 길로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 자치권을 부여받은 터이므로 아예 이 기회에 각자 자신의 영지를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전까지 독일 지역 전체의 관심사를 함께 논의해야 할 경우 느슨하게나마 공동 운명체의 의식을 가졌던 귀족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리하여 독일은 본격적인 영방국가(領邦國家) 체제로 접어들었다그러나 독일은 시대를 역행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하는 서유럽 세계에서 독일은 이탈리아와 더불어 서유럽의 그늘을 이루었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이 모두 국민국가를 이룬 뒤에도 분열 상태로 존속하다가 19세기 후반에야 통일을 이루고 처음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앞으로도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자주 나오겠지만, 19세기까지 그 이름들은 국호가 아니라 지역명일 뿐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한 이후 약 20년 동안 독일은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대공위(大空位, Interregnum) 시대를 맞게 된다. 물론 공위라고 해서 실제로 황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황가가 없이 다시 옛날처럼 귀족들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간 데다 황제도 이름만 내걸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심지어 1257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기 꼭두각시 후보들을 내세웠다. 교황 지지파는 영국 왕 헨리 3세의 동생인 리처드를 독일 황제로 밀었고, 다른 귀족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0세를 황제로 선출한 것이다(서유럽 왕가들은 일찍부터 통혼을 통해 서로 얽히고설킨 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졸지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은 막상 자신이 황제로 있는 나라에는 거의 가보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된 독일 귀족들은 1273년 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아 합스부르크(Habsburg) 왕조의 문을 열었다(그러나 이때 왕조가 시작된 것일 뿐이고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황위를 세습하게 되는 것은 15세기 중반부터다).

 

 

예루살렘의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서 파문을 당하자 오히려 성지로 달려가 예루살렘 왕국을 독차지해버렸다.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셀주크 제국의 술탄 카밀과 평화조약을 맺고 악수하는 장면이다. 이교도와 강화하는 데 교황의 승인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프리드리히에게 교황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스칸디나비아

 

 

11~13세기 무렵 독일과 이탈리아가 서유럽 대학의 복학생이라면, 스칸디나비아는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입시 준비생쯤 된다. 아무리 지역적으로 서유럽의 북방에 치우쳐 있다지만 노르만 민족이동이 일어난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는데 어찌 된 일일까?

 

사실 스칸디나비아는 노르만의 이동으로 오히려 피해를 본 셈이었다. 지역 전체가 서유럽 세계로 편입된 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만 서유럽과 러시아로 이동해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향을 떠난 그들은 고향과 서유럽 선진 문명권을 이어준 게 아니라 아예 타향에서 딴살림을 차려버렸다. 따라서 남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선진 문명의 빛을 끌어들여야 했다.

 

서유럽은 스칸디나비아에 자립이 가능할 만한 넉넉한 밑천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였다. 노르만의 민족이동이 끝나갈 무렵인 10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도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 전염성이 강한 종교답게 그리스도교는 토착 종교들을 하나씩 차례로 물리치고 마침내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리스도교가 도입됨으로써 스칸디나비아는 서유럽 대학의 입시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경험이 거의 없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아직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에는 일렀다. 이곳에는 봉건제도 없었고, 영주도, 기사도 없었다. 그 덕분에 십자군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사실은 참여할 의지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종교 이외에 서유럽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온몸으로 현실 정치의 혹독한 경험을 쌓아야 했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 지역의 역사는 극심한 내란과 왕위 쟁탈전으로 얼룩졌다. 가장 먼저 나라의 꼴을 갖춘 것은 서유럽과 조금이라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덴마크였다(이후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순서로 스칸디나비아 3국이 성립한다), 10세기 후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덴마크의 왕가는 노르만 이동의 끝물 시기에 잉글랜드로 진출했는데, 이것은 앞서 살펴본 영국 중세사의 도입부에 해당한다(357쪽 참조).

 

 

1016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된 크누드는 곧이어 덴마크 왕도 겸했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의 왕으로도 추대되었다(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왕의 명함을 가진 인물이다). 이렇게 해서 스칸디나비아 제국(북해 제국이라고도 한다)이 수립되었다.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세 왕국을 아우른 것이었으므로 제국은 제국이지만, 이름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당대 유럽의 유일한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은커녕 서유럽 일개 왕국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비해 손색이 없는 것은 왕권이 극도로 불안정하다는 점뿐이었다. 크누드는 법전까지 새로 만들고 세 왕국을 오가면서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지리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체계상으로도 제각각이어서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스웨덴 지역까지 아우르며 영토적으로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수십 년 동안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157년 발데마르 1(valdemar , 재위 1157~1182)가 왕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으나(이때부터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했으니 그전까지는 아직 왕국의 수준도 못 되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제국이 덴마크(노르웨이 포함)와 스웨덴의 두 나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진보였다. 원시 제국이 해체되고 본격적인 왕국의 시대가 된 거니까. 그 와중에도 영토적 팽창은 계속되어,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발트 해 연안의 슬라브인들을 복속시키고 북유럽을 완전히 장악했다.

 

서유럽이 초기 국민국가를 이루어가는 13세기에 스칸디나비아 3국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공조 체제를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기른 힘을 바탕으로 이들은 14세기부터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하게 된다. 특히 19세기 초반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되는 노르웨이에 비해 스웨덴은 일찍부터 독립국을 이루어 근대 유럽을 탄생시킨 17세기의 30년 전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바이킹의 후예 유럽 세계에 가장 늦게 합류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가장 먼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보인 민족이었다. 일찍이 그린란드를 발견한 것도 그들이었으니 신대륙에 처음 간 유럽인도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림은 16세기 초반 스웨덴의 지도 제작자가 그린 해도다. 해류가 급하거나 암초가 있는 지역을 그는 괴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괴물 주의 표시를 해놓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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