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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4부,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4부,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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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장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

 

 

중세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교회다. 그만큼 중세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지대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학문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모든 영역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자적인 사법권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조직이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000년간 전개된 중세의 역사는 분권화를 향한 끊임없는 흐름이었다. 제국이라는 지역적 중심은 사라졌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가 잠시 제국 체제를 부활시키려 하나 곧 실패했고, 동유럽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 계속 존재하나 전성기인 11세기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사실상 왕국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계심에서 어떻게든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으려 한 로마 교황의 노력으로 10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했지만, 이 기묘한 이름만의 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제국 체제를 지닌 적이 없었다(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이 제국의 간판마저 내리게 되는 것은 훨씬 이후인 19세기 초의 일이다).

 

이처럼 분권화를 향하는 시대의 추세에 서유럽의 지역적 정체성과 통합성을 유지해준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교회의 힘이었다. 봉건 영주들이 서로 다투고 분열할 때도 그들의 장원에 있는 교회의 주교들은 한통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영주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세력이 막강한 영주는 자기 지역의 교회를 장악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 중세 전체를 통틀어 로마 교황이나 대주교들의 권력이 세속 군주들을 압도할 만큼 컸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봉건 군주들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강력한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정치권력은 아니지만 일종의 중앙집권적 성격이다). 분권화를 향한 세속 군주들의 움직임이 원심력이라면 교회는 구심력이었다. 중세가 서양 문명의 튼튼한 줄기로 자라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원심력과 구심력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수도사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액턴의 말이지만 중세 교회에도 해당한다. 권력의 정점에 이른 뒤부터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그 타락은 곧 중세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림은 가정에 초대받은 수도사가 바깥주인이 기도하는 틈을 타 안주인과 밀애를 나누는 장면이다.

 

 

정치 세력도 그렇듯이 교회도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던 만큼 제도권재야가 있었다. 제도권이 교회라면 재야는 수도원이다. 하지만 세속의 재야와 달리 수도원은 제도권의 교회처럼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았다. 클뤼니 수도원이 교황의 계보까지 이은 데서 알 수 있듯이(382쪽 참조) 교회와 수도원은 대립적인 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존재였다. 특히 수도원은 교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했다.

 

한때 교회 개혁의 기수였던 클뤼니 수도원이 쇠퇴하자 개혁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시토 수도회(Cistercian)였다. 11세기 말에 창설된 시토회는 금욕과 청빈의 생활을 강조하고, 수도회의 창시자인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갈 것을 가르쳤다. 여기까지는 여느 수도회의 성격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시토회는 기도에 못지않게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심지어 이들은 세속 군주들이 기부하는 토지마저 받지 않고 직접 황무지를 개간해 수도회의 재정을 꾸릴 정도였다. 영국 요크셔의 황무지를 광대한 방목지로 개간해 요크셔를 랭커셔의 면직물 산업에 맞서는 모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만든 것은 바로 시토회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요크셔의 중심 도시는 요크였고 랭커셔의 중심 도시는 랭커스터였으니, 시토회 수도사들이 요크셔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장미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절정기에 타락하기 시작한다고 했던가? 교회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하던 13세기 초 두 개의 중요한 수도회가 창설되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와 도미니쿠스 수도회(Dominican Order)가 그것이었다. 시토회에서 가르치는 청빈과 금욕은 이미 수도회의 기본이 되었으므로 이들 수도회는 아예 명칭부터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는 정식 명칭에 어울리게 프란체스코회는 일체의 재산과 소유를 포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회칙을 정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봉사와 포교 활동을 벌였다. 프란체스코회가 사회 개혁에 충실했다면, 도미니쿠스회는 그보다 더 종교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다. 이들은 민간에 퍼진 이단을 바로잡고 종교재판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중세의 빈민들은 이 두 수도회 덕분에 삶의 주름을 다소 펼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회는 그들의 육신을 편케 했고, 도미니쿠스회는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주었으니.

 

 

교회의 소금 중세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교회를 되살린 것은 수도회였다. 그림은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 치마부에가 그린 프란체스코의 초상이다. 치마부에는 프란체스코의 바로 한 세대 아래 사람이니까 그림에 나타나는 수수한 옷차림과 사려 깊은 표정은 실제의 인물과 닮았을 것이다.

 

 

 대학과 학문

 

 

탁발수도회는 중세 사람들에게 심신의 위안을 주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선물을 주었다. 바로 학문의 발달에 수도사들이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종교계의 재야였던 만큼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의 두 수도회는 종교의 개혁에만 공헌한 게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대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보나벤투라,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오컴 등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였으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중세 최대의 석학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년경~1274)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다. 사실 탁발수도회가 대학과 학문의 발달에 이바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대학은 수도원에서 창설했고, 당시의 학문이란 곧 신학이었으니까.

 

중세의 대학은 동직조합, 즉 길드(guild)에서 출발했다. 길드는 원래 수공업자들이 결성한 직업적 단체였다. 그 길드에서 내용을 빼고 형식만을 취해 수공업자를 교사와 학생으로 대체하면 대학이 된다. 즉 대학은 교사와 학생 간, 교사들 간, 학생들 간에 결성된 일종의 교육 조합으로 출발했던 것이다universitymaster 등 오늘날 대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길드에서 비롯된 게 많이 남아 있다. 또한 art라는 단어가 예술, 학문, 기술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게 된 것도 길드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지금도 같은 용어를 쓰지만, 당시 문학 학사는 bachelor of arts(BA)였고, 문학 석사는 master of arts(MA)였다. 그리고 수학, 천문학, 음악 등 오늘날 순수 학문에 해당하는 교양과목은 liberal arts라고 불렀다. 이 말은 지금 인문학을 뜻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실용성과 거리가 있는 학문, 기술(art)답지 않은 학문,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을 정부에서 설치하고 운영했지만, 서양 역사에서 대학은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설립한 게 아니라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알려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을 비롯해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등은 모두 당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자생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 곧 대학이었으므로 사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디냐라든가, ‘옥스퍼드 대학이 정확히 언제 생겨났는가하는 따위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점은 탄생 시기와 목적이 처음부터 분명한 동양의 대학(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과 구분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고대의 대학에 해당하는 국학과 태학, 고려와 조선의 국자감과 성균관 등은 모두 국가가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에 해당하며, 따라서 국가가 학교의 운영과 교육 내용까지도 일일이 정했고, 등록금과 학비도 물론 무료였다. 그러나 서양 중세의 대학은 교사와 학생 서로 간의 필요에 의해 설립된 사립대학이며, 교육 과정과 내용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했다(심지어 대학을 설립할 때 군주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일찍부터 관이 주도한 동양 사회와 민간이 주도한 서양 사회의 차이는 대학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대학의 수가 증가하자 대학의 종류도 늘었다. 개중에는 교육의 필요성 때문에 생겨났으나 고등교육기관에 걸맞은 시설을 갖추지는 못한 대학들도 생겨났다.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라면 무엇보다 학교 건물이다. 재정이 없거나 소규모로 운영되는 대학의 경우에는 따로 건물을 마련하지 않고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숙사 대학인 칼리지(college)인데, 13세기에 생긴 파리의 소르본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이 부설한 머턴 칼리지가 대표적이다(원래 칼리지는 학생들의 숙박 시설에서 연유했으나 오늘날에는 단과대학이라는 의미로 변경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체계적인 학문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자 갓 생겨난 대학은 순식간에 서유럽 여러 지역으로 널리 퍼졌다. 15세기까지 독일, 에스파냐, 포르투갈, 북유럽 등지에 일제히 대학이 탄생하면서 서유럽의 대학은 약 80개로 증가했다(그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대학이 인기를 끌자 군주나 도시 자치정부 들도 대학을 설립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들은 대학을 관료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간주하고 앞다투어 설립했다(이것들은 탄생에서나 목적에서나 관 주도의 동양식 대학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학의 발달을 군주들보다 더 반긴 것은 로마 교황청이었다. 대학에서 가장 중시한 과목은 바로 신학이었으니까.

 

사실 대학이 생기기 이전부터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나름대로 교육기관을 운영해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스콜라(schola)라고 불렀다스콜라에서 스쿨(school, 학교)이라는 말이 나왔다. 스콜라는 원래 샤를마뉴가 제국 곳곳에 세운 신학원의 교수를 뜻하는 ‘doctores scholastici’에서 비롯되었다. 샤를마뉴가 중세의 건설자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스콜라에서는 당연히 신학 연구를 전문적으로 했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자 중심이었으며, 오늘날에 그런 역할을 차지하는 철학은 당시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었다(고대 그리스에 철학이 이미 탄생하지 않았다면 중세에는 철학이라는 이름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콜라에서 이루어진 중세 신학, 곧 중세 철학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의 원류, 그러니까 중세 초반의 철학은 교부(敎父)철학이었다. 교부철학은 로마 시대인 2~3세기에 생겨난 신학이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연혁이 짧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면 그리스 철학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플라톤 철학을 원용해 교부철학을 완성했다(교부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이바지한 로마 말기에서 중세 초기의 신학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교부의 저작은 성서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졌다).

 

완성은 곧 정체를 낳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성을 이룬 이후로 철학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이 시기는 로마 문명과 게르만 문명이 합쳐 새로운 중세의 그리스도교 문명을 이루어가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종교회의가 모든 철학적 논의를 대신했다. 어찌 보면 철학의 후퇴일 수도 있지만, 신학이 곧 철학이라고 본다면 철학의 발전이 반드시 정체되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의 대학생들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학은 중세 후기 수도회 운동의 소산으로 생겨났으므로 대학생들의 옷차림도 수도사 복장이다. 대학이 점차 발달하면서 교과 과정도 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다가 실로 오랜만에 11세기 말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영국의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신학상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문을 열었다. 그의 고민은 인간 이성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였다. 사실 이것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쉽게 말하면 신을 무조건 믿을 것이냐, 알고 믿을 것이냐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을 이성의 차원에서 논하는 자세였으니 당대의 주교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안셀무스만큼 아우구스티누스에 통달하고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안셀무스는 자신이 던진 난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해 보여주었다. 그의 결론은 신앙이 지식보다 먼저이며 신앙을 깊게 하기 위해 지식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교부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론이었으나 안셀무스의 생각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결론은 결국 신앙으로 회귀했지만, 이제 신앙을 말하는 데도 이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새삼 부각된 것이다.

 

이렇게 종교를 이성으로,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스콜라 철학의 자세는 곧이어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12세기 초에 제기된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의 대립인데, 흔히 보편논쟁이라고 불린다. 실재론은 실체나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책상의 실체, 삼각형의 실체가 개별 책상이나 삼각형과 별도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유명론은 실체라는 것은 이름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논쟁이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내세웠던 이데아 개념을 둘러싼 논쟁과 닮은 게 아니던가? 세상 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이데아다. 플라톤 철학은 이런 내용이었다. 이것을 인정하면 실재론이고 부정하면 유명론이다.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렇게 그의 철학적 쟁점이 200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새로 제기된다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의 문제를 달리 해결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문제가 제기된 양태가 닮은 꼴이라면 답을 내는 과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은 누가 맡았을까?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바탕으로 교부철학을 완성한 이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것은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였다. 그리스도교권처럼 학문적 배타성이 없었던 이슬람 세계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편견 없이 풍부하게 연구되었다. 특히 신학과 친화력이 있는 플라톤의 사상에 비해 과학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이슬람 신학과 별로 상충하지 않았다. 이 연구 성과가 에스파냐를 거쳐 서유럽에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신학자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는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보편논쟁을 해결했다. 그의 결론은,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만 개별적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보편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며, 개별자는 보편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무라는 실체가 존재해야만 내 집 마당의 감나무가 존재할 수 있지만, 나무의 실체는 별도로 존재한다기보다 바로 내 집 마당의 감나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론과 유명론의 절묘한 절충인데, 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와 형상의 관계(154쪽 참조)를 연장하고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었다면 서양 철학이 가능했을까?

 

 

이렇게 전개된 스콜라 철학의 성과들을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다앞서(146쪽의 주)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와 중국에서 각각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의 뿌리가 형성되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아퀴나스가 등장한 시기도 마치 우연이 아닌 것처럼 동양 사상의 발전 시기와 겹친다. 아퀴나스보다 약간 앞서는 시기에 중국 송나라(남송)에서는 주희(朱熹, 朱子, 1130~1200)가 그때까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사서(四書)를 유학의 기본 교과서로 확정했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교 철학의 새로운 단계를 이룬 인물로 평가되듯이, 주희 역시 유학이 발생한 이래 최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서양의 대표 사상인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대표 사상인 유학이 거의 동시에 재무장을 이룬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방대한 저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ne)은 교부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나아가 이슬람 철학과 유대 철학까지 총동원해 그때까지의 신학적·철학적 논의를 문제 제기와 쟁점 토론의 형식으로 총정리하고 있다. 토론 형식을 취한 것은 그가 당시 태동하던 대학(파리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토마스의 사상도 다분히 절충적이다. 그전까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도 쟁점에 포함된다. 그는 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갔는데, 모든 것을 통합해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가 앞섰으니 아무래도 약간의 억지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자연의 진리(과학)와 초자연의 진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아직 신의 경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다.

 

종교를 근간으로 삼은 해결책이지만 어쨌든 토마스의 노력 덕분에 세속 학문의 길이 열렸다. 토마스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신학으로, 자연에 관한 학문을 자연신학으로 분류했는데, 자연신학이 곧 신학에서 벗어난 학문의 영역이다. 이로써 중세 내내 신성의 영역에 완전히 짓눌려 있던 세속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이성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곧이어 닥쳐올 인간 이성의 해방, 르네상스를 예고한다. 하지만 토마스의 시대에는 이미 세속 군주들이 교회의 품을 떠나고 있었으니, 사상이 현실을 이끌었는지 현실이 사상의 변화를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유럽의 주희 공교롭게도 13세기는 기원전 5세기에 이어 또 한 차례 동양과 서양에서 함께 학문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중국에서 주희가 유학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했다면, 유럽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림은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에 있는 작품인데, 한가운데 높이 앉은 인물이 아퀴나스다.

 

 

 중세 경제를 굴린 도시

 

 

대학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도시가 발달한 덕분이기도 했다. 도시가 없었다면 교사와 학생의 조합이 생겨날 수 없으므로 대학의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런데 도시는 인류 문명이 탄생할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닌가?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예리코는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만 해도 1500년 전에 생겼으니, 도시라면 중세에 새로 생긴 게 결코 아니다.

 

하지만 중세의 도시는 다르다. 중세에는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도시도 있었지만, 중세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상공업 도시다. 서양 고대의 도시나 동양의 도시는 대부분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세워졌다. 그에 비해 서양 중세의 도시는 처음부터 민간의 상공업 활동을 위해 탄생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시민의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물론 중세의 도시들 중에는 전통적인 도시처럼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도 있었다. 영주의 장원이 있는 성채도시나 교구 획정에 따라 생겨난 주교도시가 그런 것들인데, 이것들이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사회가 안정기와 성숙기에 들어갈 무렵인 10세기부터는 점차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상인과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도시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중세 도시를 생산자 도시라고 부른다. 성채도시와 주교도시는 경제적으로 소비도시였을 뿐이니까.

 

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한 법이다. 초기의 생산자 도시는 영주의 성곽이 있는 주변에 터를 잡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영주의 장원을 벗어나면 곧장 황무지이므로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다(앞서 말한 시토회 수도사들의 황무지 개간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이든 처음 만들기가 어렵지, 일단 만든 다음에는 쉽다. 선구적인 개척자들로 도시의 원형이 조그맣게 형성되고 나면 그 소문을 듣고 주변의 상인과 수공업자가 점차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도시의 재정이 증대하자 시민들은 직접 성을 쌓고 자체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다(한자동맹의 도시들처럼 자체 군대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도시는 종전처럼 영주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차츰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미천한 것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봉건 영주들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자 대뜸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놔둘 이, 지배할 것이냐? 그대로 놔둔다면 영주가 사는 행정의 중심 도시보다 규모가 커질지도 모른다. 반면 도시를 손에 넣는다면 거기서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선택에서 전자를 택할 바보는 없다. 영주들은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 도시에 검은 마수를 뻗쳤다.

 

시민들은 물론 영주의 정치적 지배와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으나 영주의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하나는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유를 사는 것, 다른 하나는 힘으로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물론 평화로운 제3의 길도 있었다. 시민과 영주가 서로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평화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이다. 영주의 정치적 권력이 비교적 약한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제3의 길이 대체로 통했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이탈리아에서도 로마 부근의 주교도시들에서는 주교와 시민층의 투쟁이 격렬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납고 힘센 영주라 해도 시대의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3세기 무렵에 이르면 대부분의 도시들이 영주에게서 상당한 폭의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농촌에서는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일단 도시로 나오면 신분상의 제약 같은 것은 없었다(자기의 미천한 신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익명의 자유도 컸을 것이다). 정치권력에서 해방된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평등성에 기반을 둔 행정 체제와 사법권을 확립했으며, 심지어 중세 최대의 권력체인 교회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장원마다 관습이자 의무로 세워졌던 교회는,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세우는 말든 하기 나름이었다. 시민들이 내는 세금은 곧 시민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었으므로 납세의 의무는 시 당국에서 구호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다이 점에서 서양의 도시는 동양의 도시와 다르다. 동양의 도시는 주로 중앙권력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중심의 기능을 수행했으나, 서양의 도시는 (영주의 장원이 도시로 발전한 경우를 빼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었고, 주로 경제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그런 탓에 세금의 의미도 크게 다르다. 서양의 시민들은 납세를 의무인 동시에 권리로 여겼으나, 동양의 시민들은 나라님의 땅을 갈아먹고 사는 한 세금은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식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동양의 시민들은 세금을 의무로만 여길 뿐 권리로서 생각하지는 않는 게 보통이다.

 

중세 도시의 규모는 아직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인구를 보면 5000명 정도가 보통이었고 그 이하인 경우도 많았다. 가장 큰 도시라야 인구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 14세기 무렵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들은 베네치아·파리·팔레르모 피렌체·제노바 밀라노 바르셀로나·쾰른 런던 등으로 인구 5~10만 명가량이었고, 볼로냐·파도바·뉘른베르크ㆍ스트라스부르 뤼베크·루앙·브뤼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대도시들의 면모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 도시들은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공통점을 찾으면 알 수 있다. 우선 정치권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이 지역들은 프랑스와 영국, 독일처럼 강력한 왕국이 들어선 것도 아니었고, 에스파냐처럼 소규모 왕국들로 나뉘어 있지도 않았으며, 자체적으로 통일 왕국이 생기기에도 부적당했으므로 시민들의 자치도시가 형성되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해상무역의 요지였다는 점이다. 북이탈리아는 지중해에 접해 있고 플랑드르는 북해와 면해 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은 서유럽 해상무역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여기에 한 가지 선물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의 부산물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 무역을 서유럽이 장악하게 되면서 특히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플랑드르에서는 항구도시들이 한자동맹을 결성해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공국들, 스칸디나비아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번영의 정도는 비슷했을지라도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역사적 비중에서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에 미치지 못했다. 이슬람과 비잔티움 제국을 제치고 지중해 무역을 독점한 북이탈리아 상인들은 그 재력을 밑천으로 아무도 꿈꾸지 못한 세계사적 과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서양 역사의 꽃이라 할 르네상스.

 

 

활기찬 도시 생활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의 신분제 굴레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 도시의 행정과 운영을 담당해 자치도시를 이루었다(그들은 세금을 내는 게 결코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자신들을 위해 쓰이는 돈이니까), 우리는 20세기에서야 지방자치제를 도입하게 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그림은 자치도시의 시장 풍경인데, 약국, 양복점, 이발소 등의 모습이 보인다.

 

 

 서유럽 왕가의 기원

 

 

1

프랑스, 독일, 영국의 교과서에는 마르텔의 이름을 샤를, 카를, 찰스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말이므로 우리로서는 아무렇게나 써도 좋다. 마르텔은 쇠망치라는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그는 메로빙거 왕조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동부, 독일 서부 등 서유럽의 요지를 통일했으며, 더 중요한 성과로 732년 프랑스 중서부 투르, 푸아티에까지 진출한 이슬람군을 막아내 유럽 문명을 수호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궁재(재상)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음덕으로 정식 왕조를 열게 된다.

 

 

2

아버지처럼 그도 처음에는 궁재로 출발했으나 곧 자신이 옹립한 허수아비 메로빙거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신성의 권력이외에 실세가 필요했던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는 피핀의 왕위 찬탈을 승인했는데, 로마 가톨릭을 위해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핀은 정복지에 로마 가톨릭을 포교했고, 후임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롬바르디아를 정복해 기증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교황령을 이룬다.

 

 

3

800년 로마의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석한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게서 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이로써 서로마의 멸망 이후 350년간 단절되었던 로마 황제가 프랑크족의 혈통으로 부활했다. 이는 곧 로마-게르만 문명, 중세의 시작을 알린다. 내친 김에 샤를마뉴는 당시 비잔티움의 여제인 이레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이 성사되었더라면 실제로 옛 로마 제국이 부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혼 계획은 보수적인 비잔티움 관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는 두 개의 제국과 두 명의 황제로 출발했다. 오늘날 서유럽과 동유럽의 문명적 차이를 낳은 기원이기도 하다.

 

 

4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 루이는 아버지의 종교를 더 발전시켰으나 아버지의 제국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 상속한 것이다. 여기에 재혼으로 얻은 넷째 아들마저 후계 다툼에 뛰어들면서 상속은 더 복잡해졌다. 결국 루이가 죽고 얼마 뒤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제국이 최종 분할되면서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기원이 싹텄다.

 

 

5

그는 불운한 맏이였다. 영토 분할을 주도해 아버지에게는 이겼으나 동생들에게는 지고 말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두 동생에게 알짜배기 영토를 빼앗기고 보잘것없는 영토와 이름뿐인 제위만 겨우 상속했으며, 그의 아들 로테르 2세는 그 제위마저 삼촌(루이)에게 빼앗겼다.

 

 

6

피핀은 형보다 더 불운했다. 영토 분할이 완료되기 몇 년 전에 죽었다. 결국 동생들에게, 특히 막내인 샤를에게 좋은 일만 한 셈이다.

 

 

7

큰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작은형은 죽었으니 이제 셋째 루이가 이다. 그러나 형들 때문에 동프랑크의 오지를 상속받은 그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막내와 힘을 합쳐 얼마 되지도 않는 큰형의 영토까지 분할하고 조카의 제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의 혈통은 오래 계승되지 못했고 그의 영토에는 작센 왕조가 들어섰다. 이 점은 후대에 중세 독일에 기나긴 질곡으로 작용한다. 그가 물려받은 제위 때문에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고, 그의 적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독일에는 여러 공국이 분할 지배하는 분권의 전통이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8

형제 중 막내인 데다 어머니도 달랐던 샤를은 젊어서부터 머리가 벗겨진 듯하다. 스무 살에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할 때부터 대머리라는 별명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머리털에 힘이 실린 삼손보다 운이 좋았다. 둘째 형 피핀이 죽는 바람에 서프랑크를 차지했고, 셋째 형 루이의 제안에 따라 큰형의 영토까지 분할받은 것이다. 게다가 루이가 죽은 뒤부터는 잠시나마 제위까지 차지했다(서로마 황제의 제위는 이후 내내 서프랑크에 있다가 962년 오토 1세가 독일로 가져가게 된다). 더구나 그는 자손 복도 많았다. 형들의 자손은 모두 얼마 못 가 끊겼으나 그의 왕위는 10세기 후반 카페 왕조가 홍기할 때까지 100년 이상 세습되었다.

 

 

 합스부르크와 서유럽 왕가

 

 

위 그림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동안 복잡한 혼맥을 통해 형성되는 서유럽 왕가를 보여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비롯해 에스파냐(합스부르크, 부르봉), 영국(튜더, 스튜어트), 프랑스(부르봉)의 여러 왕실이 어지러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통혼으로 부르고뉴와 밀라노 일대의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으며, 이사벨 부부는 에스파냐를 통합했다.

 

이 결과를 송두리째 상속받은 사람이 바로 카를 5세다. 그러나 그는 당대에만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했고, 결국 동생(페르디난트 1)에게 오스트리아를, 아들(벨리페 2)에게 에스파냐를 물려주고 물러난다. 한편 이사벨 부부의 또 다른 딸 캐서린은 영국 튜더 왕가로 시집가 스튜어트 왕조까지 이어지는 혈통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18세기 초반에는 에스파나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왕실들이 모두 사돈의 팔촌으로 엮이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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