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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2장 폴리스의 시대, 폴리스의 형질 변경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2장 폴리스의 시대, 폴리스의 형질 변경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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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스의 형질 변경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관계가 마냥 목가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투키디데스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에 전쟁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폴리스와 달리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정치적인 문제보다 경제적인 문제로 다투었다. 폴리스에 중요한 것은 영토 확장보다 무역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경제생활의 변화는 곧장 폴리스 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장악한 초기의 폴리스 체제는 애초부터 그리스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스는 농경에 의존하는 지역이 아니라 무역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에서는 농경과 목축이 어느 정도 발달했으나 이내 그리스 경제는 무역 지향적으로 궤도를 선회했다.

 

여기에 큰 자극을 준 것이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이었다. 처음부터 해상무역에만 집중한 이 식민시들은 지중해 동부의 무역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쪽으로 진출해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들은 지중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더 서쪽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지브롤터 해협에까지 이른 이들은 이 해협의 아프리카 쪽에 있는 바위산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지금과 같은 지브롤터라는 이름은 8세기 초반 이슬람이 에스파냐를 정복했을 때 생겼다. 당시 이슬람군의 지휘관인 타리크가 교두보로 삼았던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조그만 산은 그의 이름을 따서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언덕)라고 불렸는데, 이 말에서 지브롤터라는 지명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이오니아 식민시가 건설한 다른 식민시들이 생겨났는데, 현재 프랑스의 마르세유(마실리아), 이탈리아의 나폴리(네아폴리스), 터키의 이스탄불(비잔티움) 등이 바로 그 무렵에 식민시로 출발한 도시들이다. 1차 식민시(이오니아의 폴리스)2차 식민시(지중해 중서부의 폴리스) 들은 말이 식민시였을 뿐 실제로는 모시(母市)로부터 정치적·경제적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체였다식민이라는 말도 동서양의 역사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의 경우 식민이라고 하면 정치적 지배를 연상하지만,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 뿐 원래 식민은 단순히 사람들의 이주를 뜻하는 개념이다. 한자어 식민(植民)도 그렇고 영어의 colony도 그렇다. 식민이 예속의 의미라면 지금 독일의 쾰른은 도시 명칭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고대에 로마의 식민시로 탄생한 쾰른은 식민지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에서 나왔으니까.

 

 

그리스의 수출품 그리스 땅에 이 혹투성이의 못생긴 올리브 나무가 아니라 날씬하고 매끈한 밀이나 쌀이 자랐다면 그리스 문명은 없었을 것이다. 곡식을 재배할 만한 토지와 토질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탓에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포도와 올리브유를 가지고 지중해 무역에 나서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이 성장하지 못하고 그리스 민주정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무렵에는 문자, 종교와 더불어 오리엔트가 유럽에 준 마지막 선물인 화폐가 그리스에 전해졌다. 오리엔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화폐를 사용해왔는데, 이것이 리디아를 통해 그리스에 전해진 것이다. 오리엔트에서는 일찍부터 세금과 공납을 화폐로 받는 제도가 있었으나 화폐가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오리엔트보다 그리스에서였다. 넓은 지중해 세계에 걸친 무역 활동을 위해서는 화폐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변화는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그리스 내의 산업 구조가 크게 변했다. 예전에는 주로 소비를 위한 것이었던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이 이제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바뀌었다. ‘수출 입국정책에 힘입어 그리스의 주요 농산물이었던 포도와 올리브도 수출용 생산 시스템으로 재편되었다. 대규모 과수 재배를 통해 포도와 올리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유로 가공해 해외로 수출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 특산품인 도자기와 무기도 수출을 겨냥해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의 어느 방패 제조업자는 수백 명의 일꾼과 노예를 투입해 전문적 생산을 했다고한다. 이렇듯 농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산업 생산 시스템이 재편됨에 따라 조선업과 직물업, 금속 세공업 등의 연관 산업들도 크게 발달했다.

 

만약 당시에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했더라면 자본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폴리스는 예전과 같은 체제로는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떵떵거리던 시절은 지났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에는 2000년 뒤에나 봄직한 자본주의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론, 그리고 (유럽의 경우에도) 고대와 중세에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에는 근대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독특한 에토스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의 에토스,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도 역시 역사의 산물이므로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곧 폴리스의 형질 변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평민들이었다.

 

 

지중해 경제권 화폐는 문자, 종교와 더불어 문명의 씨앗(오리엔트)이 뿌리(그리스)에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사진은 지중해의 그리스 식민시들이 만들어 사용한 화폐들이다. 당시 화폐의 도안은 주로 앞면에는 지배자의 얼굴을 새겼고, 뒷면에는 화폐의 가치를 동물의 수로 나타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폴리스의 형질 변경

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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