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개혁과 비판의 차이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을 때, 또한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조토가 새로운 사실성의 세계를 화폭에 구현하고 있을 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를 납치하고 아비뇽에 자기 마음에 맞는 새 교황청을 열었다. 이 아비뇽 사태는 당시 추락 일로에 있던 교황권이 몰락하는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가 출범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중세 사회에 통합성을 부여해온 로마 교황청은 이제 제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렇잖아도 교황청의 간섭을 싫어하던 서유럽의 군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실 끊어진 연처럼 일제히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자 했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예 접수하는 방법을 구사했고, 영국은 적국인 프랑스의 교황청을 거부하고 나섰으며, 독일은 북이탈리아 자치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교황청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신성이 세속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분열된 세속은 통합의 중심이자 상징인 신성을 마음대로 주물렀고, 마침내 분리시켜 버렸다.
1377년 교황청은 70년간의 오랜 아비뇽 시절을 끝내고 일단 로마로 복귀했으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우선 프랑스는 교황청을 휘하에 거느리던 맛을 잊지 못했다. 더욱이 교황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추기경들 중에는 프랑스계가 상당수 있었다.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프랑스계 추기경들과 로마계 추기경들은 교황 선출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칼싸움이 아니니 승자가 명확할 수 없고, 승자가 없으니 각자 자기 뜻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양측은 각자 한 명씩 교황을 선출했으니, 이제 교황은 두 명이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못 되어 교황청은 아비뇽과 로마 두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Schisma)이었다.
▲ 두 교황을 둘러싼 패싸움 아비뇽 시대에 한 번 크게 금이 간 교황의 권위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그림은 아비뇽과 로마에서 각각 교황을 세워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교황이 둘이므로 유럽의 군주들도 두 패로 나뉘어 패싸움을 벌였다. 영국ㆍ독일ㆍ헝가리는 로마 교황을, 프랑스 나폴리 스코틀랜드 카스티야ㆍ아라곤은 아비뇽 교황을 밀었다.
교황청이 두 곳이므로 서유럽 각국이 줄 서는 곳도 두 군데가 되었다. 프랑스는 당연히 아비뇽 교황청의 편이었고, 여기에 에스파냐의 왕국들이 가세했다. 아직 백년전쟁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영국은 프랑스의 반대편인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고 나섰고, 여기에 독일이 힘을 실어주었다(독일의 영방군주들은 제국이 약화되고 영방국가 체제가 되면서 더욱 로마 교황청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세속의 권력들이 달라붙었다면 혹시 스러져가던 교회의 권위와 권력이 되살아났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분열이 더 오래 지속되어 교회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1417년에 새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즉위하면서 교황청의 분열은 해소되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봉황이 꼬리를 잃으면 닭이 된다. 꼬리를 잃은 교회는 한때 봉황이었다는 기억만 믿고 형편없이 타락해갔다. 성직자들은 무너져가는 교회의 권위를 찾기보다 헌금함에 더 관심이 컸고, 성서보다 장부를 더 가까이 두었다. 중세에는 교회가 타락하면 그때마다 수도원이 일어나 해결해주었다. 수도원 운동은 그래도 교회 자체 내에 개혁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한 시대에는 수도원도 마찬가지로 부패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제기된다면 개혁이지만 밖에서라면 비판이 된다. 교회 바깥에서는 점차 교회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높아졌다.
▲ 마녀사냥 종교의 시대답지 않게 중세에는 온갖 주술과 미신도 성행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와 마녀다. 이들은 원래 민간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말하자면 무당이나 돌팔이 의사에 과했는데, 교회가 위기에 처한 15~16세기에는 부패한 교회를 변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히 여성은 악마와 계약하고 성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고 화영을 당했다. 그림은 1549년 테르담에서 ‘마녀여섯 자매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판은 학자들의 몫이다. 최초로 교회를 비판고 나선 사람들은 지식인들이었다. 대분열이 있기 전에 이미 퍼드 대학의 교수인 위클리프John Wyelife (1330년경~1384)는 권력을 가졌다면서도 세속의 재산에까지 탐욕을 부리는 교회이중성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렇게 제도권 교회를 통째로 거부고 나면 어디서 신앙의 근거를 찾을까? 그것은 바로 성서였다. 는 교회가 아니라 성서 안에 신앙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음을 민중 설교회에서 널리 설파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교황이 직접 그에게 징계를 내리려 했으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을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불렀다. 누가 누굴 파문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위클리프는 그래도 교황청의 관할권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의 인물이었지만【당시 영국의 왕과 귀족들은 왕권 강화와 교회 재산에 욕심이 있었으므로 위클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위클리프가 그런 과감한 교회 비판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정치적 지원을 받은 데다 영국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전통적으로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곧이어 대륙에서도 비슷한 비판자가 나왔다.
프라하 대학의 교수와 교회의 수석사제를 지낸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2년경~1415)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교회의 가르침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의 주장은 위클리프와 다를 바 없었으나 교황청에서는 후스를 더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다. 교황청의 앞마당인 보헤미아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뿐 아니라, 후스는 교황청의 주 수입원 중 하나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1412년 후스는 교황 요한네스 23세가 나폴리 토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돈을 내면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는 중세 초기부터 있었던 종교적 관습이었으나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폭넓게 이용되었다. 당시에는 전쟁에 나가면 죽을지 살지 모르는 데다 교회 권력이 절정기에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효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가 면죄부를 활동 자금이자 주요 치부 수단으로 삼으면서 면죄부의 효능은 사라졌다. 후스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나설 무렵에는 이미 일반 민중도 면죄부를 별로 믿지 않고 있었다】를 팔려 하자 민중을 동원하여 격렬히 반대했다. 격분한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심지어 그를 낳은 프라하 시까지도 파문해 문자 그대로 ‘저주받은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을 시켰다.
하지만 후스는 죽었어도 그의 망령은 계속 보헤미아를 떠돌았다. 후스를 추종하던 프라하의 시민들은 1419년 교회의 잔인한 처사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보헤미아의 농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는 곧장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는 여러 차례 기사단을 파견했는데, 그 이름은 또다시 ‘십자군’이다. 그들로서는 이단을 처단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농민군은 이름만의 십자군을 무찌르고 오히려 보헤미아를 넘어 독일 동부 지역까지 진출했다. 깜짝 놀란 교회 측은 태도를 바꾸어 화해에 나선 끝에 간신히 사태를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강경파인 독일의 룩셈부르크 왕조가 몰락하고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오랜만에 다시 합스부르크 왕조가 제위에 복귀하게 되었다.
▲ 신앙은 불에 타지 않는다 처음에 후스의 요구는 종교개혁이었으나 점차 정치적 요구로 바뀌었다. 결국 교황의 미움을 산 그는 그림에서처럼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만 불에 탄 것은 그의 육신뿐이었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순교로 여기고 오히려 그의 사후에 더욱 반역의 불길을 높이 피워 올렸다.
독일의 문제
바깥의 비판자를 처형해 급한 불은 껐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개혁이 필요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교황청의 추기경과 수백 명에 이르는 서유럽 각국의 주교, 수도원장, 신학자 들은 교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도원 운동이 구해주었던 것을 생각했다. 이제는 재야인 수도원도 ‘제도권’ 못지않게 타락했으니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중세에 수도원이 한 역할을 수행할 새로운 개혁 기구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런 문제를 놓고 계속 논의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개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종교회의, 즉 공의회를 상설 기구로 만들어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는 데 합의를 보았다. 공의회에서 공의회를 상설화하자는 희한한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교황에게 리더십을 빼앗기면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 후유증은 엉뚱하게 나타났다. 그 기회를 이용해 각국은 자국 내의 교회를 국가 차원에서 통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로지 교황만 있을 뿐 국적이 없던 교회들은 이제 새로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어온 교회의 통합성은 완전히 깨어지고 신성의 영역은 세속의 영역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교회의 고삐에서 풀려난 서유럽 각국은 일제히 왕권 강화에 나섰다. 그 결과가 바로 16세기부터 시작되는 절대주의였다.
그러나 새로운 추세에 동참하지 못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바로 독일과 에스파냐였다(이탈리아는 남부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두 왕국, 중부의 교황령, 북부의 자치도시들로 분열되어 있어 독일만큼의 국가적 정체성도 없었으므로 논외다), 두 나라는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로마 교황청에 한사코 매달렸다. 대분열 시기에는 로마 교황청(독일)과 아비뇽 교황청(에스파냐)으로 나뉘어 대립한 두 나라가 어떻게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Ⅰ, 1459~1519)는 가문과 제국을 함께 부흥시키는 방책으로 통혼이라는 고전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통혼 정책은 룩셈부르크 왕가 때부터 독일 황제들이 즐겨 사용해오던 것이었는데(그 방법으로 보헤미아를 합병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아예 이것을 가장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삼았다.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통혼 정책으로 네덜란드로부터 알자스와 부르고뉴를 획득했고, 에스파냐와 보헤미아, 헝가리의 상속권도 확보했다. 또한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제위를 세습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의 은총을 받은 가문이라면서 ‘오스트리아 가문’이라 부르고 1453년 오스트리아 공령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후일 오스트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우선 그 자신은 부르고뉴의 상속녀 마리아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챙겼고, 마리아가 죽은 다음에는 밀라노 공국의 지배자인 스포르차 가문의 딸과 재혼했다. 또 자신의 딸과 아들은 에스파냐의 왕자와 공주, 손주들은 헝가리의 왕자와 공주에게 각각 결혼시켰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는 에스파냐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유럽 최대의 왕가로 떠올랐다. 막시밀리안 자신은 프랑스의 반발에 부딪쳐 통혼의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그의 손자로 다음 황제가 된 카를 5세(Karl Ⅴ, 1500~1558, 재위 1519~1556)는 독일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왕이라는 두 개의 공식 명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밖에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시칠리아, 네덜란드 등의 왕국과 공국 들을 거느리면서 ‘합스부르크 세계 제국’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다(에스파냐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이며, 재위 기간은 1516~1556년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떠오르자 가장 크게 반발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사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Ⅰ, 1494~1547, 재위 1515~1547)는 막시밀리안이 죽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위 세습을 막기 위해 황제 선거에 출마했다가 카를 5세에게 밀려 낙선한 바 있었다. 일곱 명의 독일 선제후들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횡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프랑스의 왕에게 제위를 허락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왕이 독일 황제 선출에 뛰어들 만큼 당시 유럽 왕실의 통혼 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카를 5세는 선거에서 이겼으나 여전히 프랑스가 두려웠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름만 그럴듯할 뿐 제국에 어울리는 중앙집권력은 없었다(합스부르크 제국이란 물론 편의적인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연장이다). 따라서 그가 전통적인 연대 세력인 교황에게 접근한 것은 당연했다.
▲ 고래 싸움의 새우 문화와 정치는 비례하지 않는 걸까? 르네상스를 꽃피웠음에도 북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무주공산처럼 남아 있었다. 급기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는 교황 선거전의 연장전을 북이탈리아에서 치르기까지 했다. 그림은 1527년 프랑스군과 합스부르크군이 피렌체에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변수가 있었다. 황제의 의도는 그랬어도 독일 영방국가 군주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영방국가들에 대해 지니는 영향력은 휘하의 왕국이나 공국 들에 비해 훨씬 뒤처지는 수준이었다. 영방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방국가의 군주들 중에서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들이 있었으니 당시 독일 지역의 정치적 지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위를 세습하게 되자 선제후들의 위상은 애매해졌다. 무엇보다 금인칙서 이래 행사해오던 황제 선출권이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은 프랑스 못지않게 영방국가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결정타를 가한 것이 바로 카를 5세의 친교황 정책이었다.
‘교황청의 젖소’인 것도 모자라서 교황의 발까지 씻어주려는 건가? 때는 바야흐로 도약의 시대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을 마치고 서둘러 국력 강화에 나섰고, 심지어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에스파냐에서도 대서양 항로의 개척이 결실을 보기 시작하면서 만년 후진국의 탈을 벗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잖아도 독일 지역의 경제를 좀먹는 근원인 교황청에게로 복귀한 것은 영방군주들의 반발을 넘어 분노를 샀다. 그러나 더 큰 반발과 분노는 지배층보다 피지배층이 품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강력한 정치권력이 없는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도 자치도시의 바람이 불어 경제 번영의 시대를 맞고 있는데, 유독 독일 지역만이 중세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중세의 농노들, 즉 일반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과 폐해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바로 교황청에 ‘우유’를 대는 당사자가 아닌가?
합스부르크 영토를 제외한 독일 지역에서는 모순의 집적이 점차 거대하고 파괴적인 바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중세적인 지역의 가장 중세적인 요소에 대한 반대, 즉 종교개혁이었다.
▲ 누더기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영토가 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한 누더기 제국이었다. 지도는 카를 5세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에스파냐, 플랑드르, 이탈리아, 중부 유럽 등지에 널리 분산된 것을 보여준다. 급기야 카를 5세는 독일 지역을 포기하고 황제 대신 에스파냐 왕을 택했다.
루터의 허상과 실상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교황 레오 10세가 발급한 면죄부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당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은 게시판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니 루터가 그곳에 대자보를 붙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황의 면죄부가 독일에서 팔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면죄부는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급한 것이었다. 대성당 신축은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계획한 것인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설계를 맡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독일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무렵 마인츠 대주교로 임명된 알브레히트는 초입세(annates: 성직자가 임명된 첫해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를 낼 돈이 부족하자 독일의 대상인인 후거에게서 돈을 빌렸고 이 돈을 갚기 위해 교황의 허가를 얻어 면죄부를 가져다 팔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중앙집권적 왕국의 면모를 가졌던 프랑스에 비해, 독일 지역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좋은 면죄부 ‘시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테첼 같은 수도사는 영업사원처럼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의 행위는 당시 관례에 따른 것일 뿐이었으나 그 파장은 그의 원래 의도를 넘어 교황에게까지 전해졌다. 여기에는 구텐베르크 이후로 독일에서 크게 발달한 인쇄술 덕분에 그의 반박문이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진 탓이 컸다(또한 이 무렵은 성서가 대량 인쇄되어 서민들에게까지 전해짐으로써 성서로 돌아가라던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이 실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듬해 교황이 파견한 종교 심문단은 루터에게 반박문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루터는 이를 거부했다. 뒤이어 루터는 교황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교황 측의 더 큰 분노를 샀고 교황이 보낸 파문 협박장까지 불태워버리는 용기를 보였다. 신성의 징계를 무시하자 이번에는 세속의 징계가 떨어졌다. 교황의 세속적 대리인이 된 카를 5세가 그에게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루터는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으나, 바로 그 순간 그가 그토록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한 ‘배후’가 드러났다. 선제후들 중 서열 1위에 해당하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 1463~1525,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와는 다른 인물이다)가 그를 자기 소유의 발트부르크성에 피신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설립자이자 루터를 교수로 발탁한 장본인이었다. 그때부터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명에 따라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사건의 전모를 추측할 수 있다. 루터가 반박문을 내건 행위가 프리드리히와 처음부터 공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프리드리히가 루터의 배후에서 그를 지지한 것만은 분명하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현공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뛰어난 인물이고 학문에도 밝은 데다 뒤러를 비롯해 북방 르네상스를 개척한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비록 종교적으로는 루터에 비해 온건한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선제후이자 강력한 영방국가의 군주라는 그의 신분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독일 지역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이미 종교의 측면에서 한배를 타고 있었다【그 하나의 예로, 루터는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독일의 귀족들은 독일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라고 호소했다. 이는 곧 영방군주들에게 로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라는 뜻이다. 당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미 교회를 일국적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루터의 주장은 시대의 추세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혹시 작센 선제후가 ‘루터의 입을 빌려’ 선언한 것은 아니었을까? 1505년 스물두 살의 루터는 들판에서 천둥과 번개를 만나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계시를 얻고 신학에의 길을 걸었다고 전한다. 여기까지는 사실이겠지만, 그 후 그의 신학적 지식이 발전하게 된 데는 프리드리히와의 교감이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95개 조 반박문도 역시 프리드리히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루터는 발트부르크 성에 은신하면서 성서의 번역과 저작 활동에 종사했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바람은 그때부터 더욱 거세어졌다. 영방군주들은 즉시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확연히 갈라져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다툼을 중단시키는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불어왔다. 독일 지역 곳곳에서 민중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분명히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바람을 타고 일어났으면서도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루터의 사상을 나름대로 변형시켜 해석했는데, 루터의 사상 가운데 성서 중심주의, 평등주의, 제도권 교회의 부정에 관해서는 의견이 같았으나 핵심적 부분이라 할 영방군주들과 공동으로 행동하자는 데서는 견해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루터와 같은 신학자나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1524년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의 슈틸링겐 백작령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을 기화로 독일 전역은 삽시간에 농민전쟁의 물결로 뒤덮였다. 이 물결은 라인란트·슈바벤 프랑켄 등 남부를 휩쓸었고, 이듬해에는 북독일까지 확산되었다. 농민들의 요구 사항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인두세와 상속세 등 각종 봉건적 세금 부담을 경감하라는 것이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독일 지역에 만연한 봉건적 유제들을 철폐하라는 것이었다. 일부 농민들은 그리스도교 형제단을 결성하거나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를 폐지하라고 주장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종교적 측면보다 봉건 체제를 타파하려는 혁명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농민전쟁은 종교개혁과 시기적으로 맞물릴 뿐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곳곳에서 반란의 불길이 치솟자 영방군주들은 당황했다.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나뉘어 있는 군주들, 그들에게 이미 전국적 명사가 된 루터가 농민들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면 군주들 간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농민들의 주장을 단호히 반대하고 군주들에게 농민전쟁을 가혹하게 진압하라고 권고했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군주들에게 독일을 교황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호소한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루터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종교개혁가일 뿐 사회운동가는 아니었으니까.
대개의 농민운동이 그렇듯이 농민전쟁도 비록 규모는 컸으나 조직적이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군주들은 루터파와 반루터파를 가리지 않고 서로 공동전선을 이루어 연합군을 조직하고, 루터의 권고대로 가혹하고 끔찍하게 농민전쟁을 진압했다. 2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무려 10만 명가량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보다 처지가 더 악화되었다. 농민전쟁은 오히려 영방국가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주었을 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아직 민중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다.
▲ 배짱의 배후에는 1521년에 루터(가운데)가 카를 5세(오른쪽) 앞에서 자기 변론을 하는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추방령을 받았으나 제후와 주교, 시민 들까지 모여 있는 가운데서 당당하게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그의 배짱은 놀랍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작센 선제후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농민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루터파 군주들은 반루터파 군주들과 약간 다른 행동을 취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그들은 루터의 가르침대로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프랑스와 영국에서처럼 국가 체제 안으로 포함시켰다. 때마침 카를 5세가 독일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작업은 더 쉬웠다. 카를 5세는 1521년 루터를 추방한 직후 에스파냐로 가서 10년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 왕의 명함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외가인 에스파냐에 더 애착을 가졌다(그러나 그가 에스파냐에 오래 머문 이유는 당시 오스만 제국이 동방 진출에 나서 오스트리아까지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05쪽 참조).
독일(오스트리아)로 돌아온 카를 5세의 눈에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행동이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그는 즉각 의회를 소집해 그들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루터파 군주들은 카를 5세에게 강력히 저항하며 항의서를 제출했다. 여기서 ‘항의하는 사람’, 즉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 나온 프로테스탄티즘(신교)은 훗날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종파가 된다.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황제파와 루터파는 실력대결에 들어갔다. 1546년 양측은 본격적인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루터파 군주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파에 맞섰으나 아직 물리력에서는 한 수 아래였다. 이듬해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대승을 거두자 갓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곧 사어가 될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센 군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스부르크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한 그가 황제파에서 이탈한 것이다. 영향력 있는 영방이 빠져나가자 양측은 대뜸 호각을 이루었다. 결국 지루하게 끌던 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절충적으로 마무리된다.
▲ 항의하는 자들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독일의 군주들도 가톨릭과 루터파로 양분되었다. 그림은 1529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의회 장면이다. 여기에는 황제 카를 5세와 많은 제후, 주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카를은 루터파 군주들을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교파를 지칭하는 이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항의의 보람은 있었다. 루터파는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교파로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종교의 선택권은 지배자, 즉 군주에게만 있었고, 군주가 선택한 종교는 그 영방국가 내에서 무조건적으로 관철되었다. 그렇다면 군주가 선택한 종교를 거부하는 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있는 남독일은 가톨릭으로 남았고, 북독일의 영방국가들은 대부분 루터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인정을 받은 것은 루터파 하나뿐이었다. 다른 교파들이 모두 제외되었다는 것은 계속 불씨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종교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전례를 낳았다. 그래서 곧이어 유럽 전역에 종교전쟁의 회오리를 부르게 된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가톨릭에 유리한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종교전쟁의 마무리이자 그 절정인 30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분란의 도화선이 된다】.
루터파 이외에 다른 교파라면 무엇일까? 루터가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지 불과 수십 년 동안 유럽 각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가 생겨났다. 일찍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이단 문제를 논의하던 325년 이래로 가장 다양한 교과(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이단)가 득시글거렸다. 1000여 년 전 첫 공의회는 처음 교리를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던 만큼 쉽게 ‘이단’을 규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 로마 가톨릭에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으로 몰면 오히려 ‘정통’이 위태로워질 참이었다. 이단이라기보다는 신흥 교파라고 보아야 했다. 그 신흥 교파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신조어의 내용을 채우게 된다.
종교개혁의 불씨는 루터가 피워 올렸지만, 공교롭게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신교 개혁가들은 대부분 루터와 견해가 크게 달랐다. 사실 그것은 당연했다. 루터는 가톨릭의 부패가 현실의 정치 발전(특히 독일 지역의 정치)을 저해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종교개혁가라기보다는 정치개혁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루터를 계승한 개혁가들은 정치적 이념보다 종교적 측면을 더 중시했다. 그중 한 사람이 스위스의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했다【츠빙글리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루터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1516년부터 독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516년이라면 루터가 반박문 사건을 일으키기 1년 전이므로 그의 주장은 앞뒤가 들어맞는다. 이는 곧 당시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유럽 도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피워 올린 사람을 루터 하나로 국한하는 게 잘못임을 말해주기도 한다(더구나 루터가 처음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루터보다 훨씬 성서주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심지어 교회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체성사도 폐지할 것을 주장했으니, 순전히 종교적인 측면에 서 보면 로마 가톨릭에 루터보다 더 ‘심각한 이단’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루터처럼 강력한 군주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데도 교회에서 그를 어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츠빙글리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개 토론회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영방군주의 비호를 받았고 영방국가 중심의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츠빙글리는 자치도시의 시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츠빙글리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이렇게 시민적 토대 위에서 신학자와 성직자, 일반 시민 들까지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개혁 토론회를 열었기에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다른 지역의 도시들에서도 그의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진정한 종교개혁의 창시자는 루터가 아니라 츠빙글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츠빙글리에 뒤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나선 인물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의 견해에 가까웠지만, 도시 당국의 지지를 받은 츠빙글리와는 달리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종교개혁을 주창했다(루터와 츠빙글리는 일종의 ‘국가 교회’를 지지했다는 점에서는 닮은 점이 있다). 개인적 배경에서도 그럴 만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면서도 프랑수아 1세의 반동 정책을 피해 제네바로 망명한 뒤 종교개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칼뱅의 새로운 교리에서 핵심을 이룬 것은 도덕과 규율이었다. 그는 가톨릭이 부패한 이유가 상층(교회)에서는 도덕이, 하층(시민)에서는 규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도덕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타락한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훈련과 교육을 통해 거듭나게 해야 한다. 이를 전담하는 교회 기구로서 칼뱅은 장로제를 제안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중요한 교회 기구가 되어 있다. 또한 시민들의 규율을 회복시키려면 금욕적이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강조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중세의 수도원 운동에서 늘 주장해오던 금욕적 생활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중세에는 신앙이 곧 생활이었으므로 종교적 ‘명령’이 통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아무런 대가나 혜택이 없는데 스스로 금욕이라는 고통을 사서 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칼뱅은 그 ‘혜택’을 만든다. 참된 신앙생활은 신에게서 구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다. 물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칼뱅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다. 그는 현세에서의 생활에 이미 신의 뜻과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이미 신이 예정해놓았다. 이것이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예정설이다.
이제 천국에 가기 위해 기존의 교회를 통하지 않아도 된다. 칼뱅의 사상은 강력한 힘과 매력이 내포되어 있는 만큼 순식간에 폭넓은 지지 세력을 얻었다. 유럽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제네바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심지어 칼뱅을 ‘프로테스탄티즘의 교황’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가 거둔 성공은 루터나 츠빙글리처럼 정치 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지 않았기에 더욱 가치가 컸다. 특히 그의 예정설은 신흥 시민층과 상인들을 위주로 하는 중산층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가르쳤지만(그러면서도 사제들은 부자였다), 칼뱅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칼뱅의 가르침을 믿는 시민층은 머잖아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다. 장차 그들은 인류 역사상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체제, 자본주의 사회를 낳게 된다【19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칼뱅의 이 예정설이 자본주의를 낳은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칼뱅 자신은 세속적인 성공(이를테면 돈을 많이 번다든가, 기업을 일으켜 성공한다든가)을 중시하지 않았으나, 그의 예정설은 세속적인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타락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것은 물론 예외가 되겠지만, 도덕적인 방법으로 세속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오히려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당시 도시의 상인들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성공’이 얼마나 가능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넘어 종교전쟁이라는 험한 싸움이었다.
▲ 믿음의 척도는 성공 칼뱅의 교리는 가톨릭에서 경멸을 받은 상인들의 입지를 크게 강화해주었다. 세속에서의 성공이 바로 신의 낙점을 받았다는 징표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림은 플랑드르 화가 쿠엔틴 마시스의 작품인데, 장사로 번 돈의 무게를 달고 있는 상인 부부의 모습이다.
기묘한 종교개혁
대륙을 휩쓴 종교개혁의 바람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영국을 대륙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것은 강이 아니라 바다이듯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 전혀 다르게, 아주 기묘한 동기에서 시작되어 기묘한 과정을 거쳐 기묘한 결과를 낳게 된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의 문을 연 헨리 7세는 새 왕조의 개창자라는 자격으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대륙보다 먼저 절대주의가 발달했다). 그가 닦아놓은 기반은 그의 차남으로 왕위를 계승한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 재위 1509~1547)의 시대에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권력에서는 대륙의 어느 군주도 부럽지 않았던 헨리 8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형이 일찍 죽어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왕자 시절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수인 캐서린과 약혼했고, 왕위에 오른 직후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그의 형 아서가 결혼 생활 1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진정한 이유는 캐서린의 친정이 당시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 최고의 부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였기 때문일것이다. 아버지 헨리 7세도 에스파냐 왕실의 며느리를 원했을 테고, 헨리 8세 본인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나이도 여섯 살이나 연상인 데다 미모도 아니라는 것은 괜찮았다. 문제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다(실은 두 아들을 포함해 여섯 아이를 낳았으나 딸 하나만 살아남고 다 어릴 때 죽었다). 다른 시대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유럽 각국에서 왕권이 강화되고 있던 16세기였다.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나 에라스뮈스 등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폭넓은 교제를 통해 첨단의 학문과 소양을 기른 데다 거칠고 호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캐서린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한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에스파냐와의 돈독한 관계가 필요했으므로 헨리 8세는 개인적 불만을 눌러 참았다(프랑스는 백년전쟁 이후 스코틀랜드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면서 영국을 괴롭히고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뒤늦게 유럽 그리스도 교권에 합류한 탓에, 또 사활이 걸린 대서양 항로 개척을 위해 로마 교황청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스파냐 왕실을 처가로 둔 만큼 헨리 8세는 대륙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루터파에 단호히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는 책까지 직접 써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얻었다.
▲ 헨리 8세의 여섯 아내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궁색할 듯싶다. 무려 여섯 왕비를 둔 데다가 그것도 형수였던 첫 번째 왕비를 빼면 불과 2, 3년을 살지 못하고 계속 이혼하거나 아내를 처형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영국의 록그룹 예스의 키보드 연주자 릭 웨이크먼이 1972년에 발표한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라는 솔로 앨범의 재킷이다. 오른쪽의 두 왕비는 릭 웨이크먼이 가리고 있다.
하지만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끝내 그의 결혼 생활을 종국으로 몰았다. 그는 아들을 얻어야 했고, 아내는 이미 마흔이 넘었다. 일단 헨리는 아내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교회법에 따르면 살아 있는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는 교활하게도 형수와의 결혼 자체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교황청에 탄원했다. 물론 캐서린은 이혼할 마음이 없었고, 교황청도 이혼을 허락할 마음이 없었다.
법이 허락하지 않으면 법을 바꿀 수밖에 없다. 헨리는 1531년에 캐서린과 이혼하고 이듬해에 앤 불린이라는 궁녀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당시 영국 사교계에서 인기가 높았다)【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유토피아」의 작가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자 대법관직을 사임하면서 항의를 표시했다. 평등과 사유재산 폐지라는 진보적인 사상을 주장한 그로서도 헨리의 행동에는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헨리의 눈 밖에 난 그는 2년 뒤 헨리의 왕위 계승법에 선서하기를 거부했다가 런던탑에 투옥된 다음 처형되고 만다】. 이제 이혼을 법으로 정당화할 차례다. 하지만 교황은 그의 이혼과 재혼을 승인해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교리로도 불가능한 데다 에스파냐 왕실의 반발도 걱정이었다. 게다가 1516년부터는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로스 1세가 에스파냐의 왕으로 있었다. 그는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카를 5세, 교황청의 최대 후원자가 아니던가?
사실 교황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이나 승인을 필요없게 만드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니까. 1534년 그는 의회에서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통과시켰다. 무엇의 수장이라는 걸까? 바로 종교의 수장이다. 그는 영국 교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는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대륙에서 일고 있던 국가 교회 체제의 절정이었고, 비잔티움 제국이 무너진 이후 사라진 황제-교황 체제의 부활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영국 국교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우리 사회에는 대한성공회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어 있다【이런 탄생의 배경을 가진 만큼 영국 국교회는 종교나 신앙 문제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의 개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도 영국 국교회는 한동안 중심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1553년 캐서린의 딸로 왕위에 오른 메리 여왕이 영국 국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귀시켰다가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또다시 분리시켰다. 이후부터는 영국 국교회가 계속 독자적으로 존속하게 되지만, 애초부터 가톨릭과 종교적 차이는 없었으므로 영국 국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 교파 가운데 가장 가톨릭적인 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때에 따라 구교와 다른 신교를 모두 탄압했다(사실 영국 국교회는 어찌 보면 근대의 문턱에 어울리지 않게 고대적 ‘제정일치’로 복귀하려는 것이었으며, 영국이기에 가능한 기묘한 종교개혁이었다). 이런 문제점은 나중에 청교도 박해로 이어지고, 아메리카에 청교도들 이 이주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교황청에서 종교적으로 분리된 이상 두려울 게 없다. 헨리는 후속 조치로 영국에서 거두어가는 교황청의 수입을 차단하고, 수도원을 모두 해산한 다음, 그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마음껏 호기를 부린 것과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앤 불린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궁실 내의 알력으로 결혼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내를 처형했으며, 이후 네 번이나 더 결혼했다가 실패했다(앤 다음에 결혼한 제인 시모어에게서 아들 하나를 겨우 낳았다). 하지만 불린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은 얼마 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1533~1603, 재위 1558~1603)로 왕위에 올라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헨리 8세의 과감한 결정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국 역사에 지극히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종교개혁은 영국에서처럼 국왕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듯이, 대륙의 종교 문제는 중세에 서유럽 문명의 오지였던 영국에 비해 훨씬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대륙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회오리가 종교전쟁으로 번지면서 근대 유럽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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