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들의 총파업②
하지만 로마의 평민들은 법전을 만들라는 요구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원전 494년 그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저항운동을 구사한다. 바로 ‘철수’다. 로마의 평민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로마 시를 빠져나가는, 문자 그대로의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라면 파업에 비해 뭔가 소극적인 저항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철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민 총파업’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기술자, 농민, 상인 등이 전부 파업에 동참하면 나라 전체가 즉각 마비될 것이다. 따라서 철수는 가장 적극적인 투쟁 방식이었다. 더구나 로마 시를 나온 평민들은 성스러운 언덕에 모여 있었으므로 정부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해서 해산할 수도 없었다. 하기야, 억지로 진압하려 해도 안 되었을 것이다. 병사도 대부분이 평민이었으니까.
투쟁의 대가는 아주 컸다. 평민들은 철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조직인 평민회와 평민의 대변인인 호민관(tribunus)이라는 관직을 얻어냈다. 특히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했다. 호민관은 평민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행정·사법·군사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력과 발언권을 누렸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바로 그들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는 드라콘이라는 귀족이 법전을 만들어 베푸는 식이었으나 로마에서는 평민들이 투쟁한 결과로 법전을 얻어낸 것이다.
드라콘의 법전이 아테네의 아고라에 공시되었듯이, 기원전 451년에 12표법은 청동판으로 만들어져서 로마 광장에 공시되었다. 그 힘은 드라콘의 법전보다 더욱 강했다. 당시 로마의 청소년들은 12표법의 조항들을 외우고 다녔고, 일부 조항들은 이후 비잔티움 시대까지도 적용되었다(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12표법의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법전의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소송, 가족, 상거래 등 당시 생활상의 필요와 관련된 사항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문법전이 마련됨으로써 귀족들의 주먹구구식 법 적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런 진보의 속도가 지속되었더라면 로마의 공화정은 얼마 안 가 근대적인 공화정과 비슷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민들이 주도하는 거센 신분 투쟁의 고삐가 늦추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왔다. 그것은 바로 로마 전체의 존폐와 관련된 중대한 위협, 로마인들로서는 최초로 겪는 대규모의 외침(外侵)이었다. 위기를 맞은 로마에 다행스런 점은 신분 투쟁의 결과로 군대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었다. 로마의 평민들은 그리스로부터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을 도입하고 상비군적 성격을 가지는 시민군을 구성했다. 갓 태어나 이제 막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로마를 위기에 빠뜨린 외부의 적은 누구였을까?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