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②
트라야누스의 제위는 그와 동향 사람인 하드리아누스(Pablius Aelius Hadrianus, 76~138)가 이었다. 트라야누스가 행정관의 풍모를 지녔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서민적 풍모에 가까웠다. 그는 군대와 함께할 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먹고 잤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대내 정책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대외적 정책은 정반대로 바꾸었다. 즉 속주의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더 이상의 정복 활동은 하지 않았다(그는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많이 속주를 순방한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였다. 삼킬 수 없는 것은 모조리 버린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파르티아 정벌은 완전히 포기했다. 또한 브리타니아 섬을 전부 손에 넣겠다는 해묵은 꿈도 버렸다. 그는 기존의 브리타니아 속주(지금의 잉글랜드)만을 온전히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와의 경계선에 길이 120킬로미터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당시 브리타니아 남부에서 쫓겨난 켈트족은 북부 칼레도니아와 아일랜드로 이주해 있었다). 이것을 하드리아누스 장성이라 부르는데, 오랜 기간 동안 석재가 다른 건축물에 이용되어 지금은 높이가 1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는 온화한 성품에다 대부호이면서도 근검절약에 힘쓴 황제였으나 다른 4현제‘에 비해 업적은 다소 처진다. 그러나 23년의 치세 동안 덩치 큰 제국을 무사히 이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선정을 펼쳤다는 이야기다. 전임 황제처럼 안토니누스도 브리타니아에 장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70킬로미터로 더 짧았지만 위치는 10킬로미터나 더 북쪽이었다. 이 안토니누스 장성 덕분에 브리타니아 속주의 영토는 섬의 8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로마는 끝내 섬 전체를 식민지화하지는 못했다. 황제가 죽었을 때 원로원은 그의 높은 덕을 기려 ‘경건(Pius)’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뒤에 붙여주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칭송하며 기념비와 신전을 건축했다.
▲ 영국의 ‘만리장성’ 트라야누스의 정복 사업은 하드리아누스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브리타니아의 절반을 정복하여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다란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이 아니었다면 이후 영국의 중세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장성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길이도 훨씬 짧고 높이도 4.5미터로 만리장성의 절반 정도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