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②
먼저 싸움이 벌어진 곳은 하늘이었다.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낸 지 얼마 되지 않은 726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왕궁 문에 있는 성상(聖像)을 철거하고 성상 숭배 금지령(iconoclasm)을 내렸다. 종교에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다니? 이 알쏭달쏭한 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도와 정치적인 의도가 복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이 익숙하지만, 다신교라면 모르되 원래 유일신 종교에서는 성상이 익숙한 게 아니었다. 신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담아내는 것이니 아무래도 불경스러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에서 성상이 발달한 이유는 헬레니즘의 전통 때문이었다【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받은 것은 불교였다. 불교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굳이 부처의 형상을 표현해야 할 때에는 발자국이나 빈 의자 등의 추상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성립하자 그 영향을 받아 비로소 인도의 불교도들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당시 인도에서 제작된 불상들에는 그리스 신상과 같은 모습을 취한 것들이 많았다. 이런 양식을 간다라 미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모습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이나 그림으로 담았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문화적 전통이 강했던 소아시아에서는 성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겨우 방어했을 뿐 옛 헬레니즘의 고토를 대부분 이슬람 세계에 넘겨준 것이다. 이에 따라 제국 내에는 반헬레니즘적 정서가 널리 퍼져나갔다.
이것이 성상 숭배 금지령의 종교적 측면이라면, 정치적 측면은 수도원과 관련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전부터 대지주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대지주들의 대부분이 바로 수도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주 업무’는 바로 성상 숭배가 아니던가? 따라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면 수도원 세력이 약화될 것이고, 잘하면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국고로 환수될 수도 있다. 이게 레오 3세의 속셈이었다.
요컨대 황제의 조치는 종교적으로 성상을 우상으로 격하하고, 정치적으로 수도원을 약화시키고, 경제적으로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수도원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세기 이상이나 성상을 둘러싼 종교적·정치적 논쟁에 빠지면서 국력을 탕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불똥은 엉뚱하게도 로마 가톨릭 교회로 튀었다.
▲ 동방교회의 성전 옛 서로마 제국에서는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들어섰으나, 비잔티움 교회에서는 그런 이민족과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았다(동방교회를 ‘정통’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사진은 동방교회의 성전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품인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1453년부터 1931년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인다. 주변의 기둥(미나레트)들은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세워졌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