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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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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②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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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새 왕조를 개창한 왕답지 않게 제임스 1세는 초장부터 반동적으로 나아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원수(엘리자베스)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데다, 그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에 가깝고 대륙 문화를 숭상하는 스코틀랜드 왕실 출신이었다. 위그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시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절대왕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 프랑스를 본받자! 사실 영국이 프랑스를 본받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경제력에서는 결코 프랑스에 뒤지지 않았던 영국의 위치를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있던 시절에 자신이 쓴 글을 통치 이념으로 삼기로 했다. 자유 왕국의 진정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그 글은 후대에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라고 알려지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실 그로서는 그저 프랑스의 왕권을 모방하려 했을 뿐이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사정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의회였다. 프랑스의 의회인 삼부회는 제도로만 남아 있을 뿐(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까지)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영국의 의회는 13세기 말 모델 의회이래 꾸준히 발전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왕들도 의회를 무시하기는커녕 국정의 대소사에 의회의 의견을 구했으며, 최소한 무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임스의 결정적인 실책은 수구적인 신교 박해였다. 전유럽을 휩쓸면서 프랑스에서 위그노라는 강력한 정치 세력을 이루기도 한 칼뱅주의는 영국에도 널리 퍼졌다. 특히 영국의 칼뱅교도들은 이름부터 청교도(Puritan)라고 부를 만큼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교회 개혁과 성서 중심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97쪽의 주 참조), 영국 국교회는 껍데기를 보면 종교개혁을 통해 성립한 신교였으나 알맹이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제임스는 영국적 가톨릭에 해당하는 국교회를 강화하는 한편 청교도에 대한 강력한 탄압에 나섰다.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라는 그의 주장은 대륙에서도 사라진 케케묵은 논리였다. 하긴, 왕권을 신이 부여했다는 그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면 교회를 강화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그의 탄압에 시달린 청교도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그랬듯이 국외로 종교적 망명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덕분에 얼마 뒤인 1620년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해 오늘날 미국의 기원을 이루게 되지만, 등 떠밀려 먼 타향으로 간 그들이나 국내에 남은 청교도들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산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이 포크스 데이 영국 국교회의 탄압을 받은 것은 신교의 청교도만이 아니라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세력은 1605115일 의회 개회일에 화약을 폭발시켜 국왕과 왕당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것을 화약 음모 사건이라 부르는데, 결국 미수로 끝나고 주동자인 가이 포크스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는 115일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부르며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의회민주주의를 처음 도입한 국가에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던 제임스의 무사함을 지금까지도 경축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인용

목차

동양사

한국사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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