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쒀서 개 준 혁명③
이순신은 권력을 꿈꾸지 못했고 주변의 모함을 받았지만, 나폴레옹은 권력을 꿈꾸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계기로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소극적 방어에서 적극적 침략으로 궤도를 선회한다. 자신감을 찾은 총재정부는 이참에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대서양 항로가 개척된 이래로 많이 위축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지중해 무역은 중요했다. 총재정부가 노린 곳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이집트였다. 1798년 정부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삼아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의 모든 행동은 유럽 전체에 ‘경보’를 발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동부 지중해 진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러시아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이 일제히 영국 측에 가담해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교 국가 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은 그 무렵이면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총재정부로서 더 중요한 사실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는 점이다. 1년이 넘도록 이집트에서 영국군과 악전고투를 벌인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했다【이집트 원정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98년 8월 나폴레옹은 나일 강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점차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단신 귀국을 결정한 것이니 ‘영웅’ 나폴레옹의 모습은 아니다. 나일 강 전투에서 영국 측 지휘관은 바로 호레이쇼 넬슨이었는데, 7년 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은 또다시 넬슨에게 패해 실각하고 만다】. 그를 환영한 것은 그의 명성을 이용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세력과 그들이 모아둔 군대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파리에 온 나폴레옹은 11월 9일 자코뱅파의 준동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했다. 그 이튿날 그는 정부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한 뒤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정부를 새로 열었다. 1799년 11월 9일은 공화력으로 안개의 달, 즉 브뤼메르 18일이었기에 이 사건을 브뤼메르 쿠데타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은 이미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사실상 끝난 것이었지만, 그나마 혁명의 흔적이라도 유지하던 총재정부마저 무너짐으로써 혁명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혁명 세력이 목표로 했고 또 한동안 실현한 공화제가 끝장났기 때문이다【흔히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인권의 신장이라든가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유럽에 확산시켰다는 등으로 말하지만, 그건 후대의 역사가들이 살을 덧붙여 말하는 것일 뿐이고 실은 그보다 단순했다. 혁명의 목표는, 국내적으로는 공화제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한동안 뒤처진 프랑스를 유럽 국제사회의 핵심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나폴레옹이 한때나마 실현하지만 공화제는 나폴레옹이 무너뜨렸으므로,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죽을 쒀서 나폴레옹에게 준 격이 되어 버렸다.
▲ 이집트 원정의 성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는 군대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도 수행했다. 왼쪽은 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이고, 오른쪽은 이집트 유적을 조사하는 프랑스 학자들이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 로제타석은 프랑스로 운송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으로 넘겨져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이후 유럽에는 이집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이는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서양의 동양 연구)으로 이어진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