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과의 일문일답
나는 원전의 의미도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매우 평이하고 편안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으로서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라는 책을 만났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의 『금강경 강해』 속에서 무비스님의 책에 많은 도움을 입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 놓았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으로 무비스님의 신상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해인사강원을 나왔고, 구한말 대유 최익현의 학맥을 이은 한학자였으며 대학승이었던 탄허스님(呑虛, 1913~1983)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분이라는 정도의 간단한 이력만 알고 있었다. 나는 무비스님이 만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만날려면 많은 시간을 일부러 소요해야 하는데 여기 보드가야에서 한 호텔에 묵고 있는 터에 모르는 체 지나친다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편에서 먼저 청을 넣었다. 무비스님은 그렇지 않아도 날 찾아뵈려던 참이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아침식사 후에 우리는 우연한, 그리고 반가운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아~ 저는 선생님의 학문을 매우 흠모하고 산 사람입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나온 이래 선생님의 저술을 단 한 권도 안 빼놓고 다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절 모르실지 모르지만 전 선생님을 너무 잘 알지요.”
나는 무비스님이 얼굴이 갸름하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매우 이지적인 모습의 스님일 것이라고만 암암리 상상해왔다. 경전번역을 잘 하시는 분들에 대한 통념적 상상일 것이다. 지나치게 스마트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무비스님은 나의 상상과는 달리 거대한 체구에 아주 우람차고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승이라기보다는 매우 실천적인 도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날 만나자마자, 아무 것도 재는 것 없이 그냥 솔직하게 나의 학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그러한 자세에 나는 감복했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에서 8ㆍ90년대에 나의 글을 접한 사람들이 정직하게 나의 글에 대한 영향이나 그 글에 대한 객관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급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분명 나의 글을 읽고, 그 글의 양식으로 자라난 학인들도 그들의 논문에 정직하게 내 글 한번 인용하는 예를 본 적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내 글에서 정신적인 양식은 얻을지언정 그것을 공표하면 첫째, 자기존재가 나에게 예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둘째, 주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논란이나 공격의 타케트가 되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은 항상 책상 밑에 몰래 숨겨두는 ‘토라노 마키’(虎の卷)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나는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요즈음은 자비롭게 바라본다. 오죽 내가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으면 그러하랴! 모두가 내 업이려니, 내가 거두고 가마. 나는 내 인생을 나의 현존으로 종지부 찍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것을 내 무덤 속에 한줌의 흙으로 파묻고 말 것이다. 난 제자도 없고 후대에 이름이 남기를 원치도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너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방이 나를 평가해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날 수가 없다. 나는 항상 어떻게 하면 김용옥이 이 사회에서 괴멸되는 꼴을 볼까하는 것을 꼰아보는 인간들로만 둘러싸여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나의 인간 역정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환상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이 사회에서 얻은 고질이다. 나의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비스님 같은 분을 뵈오면 나는 너무도 감격해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무척 후회를 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내 『금강경 강해』 속에서 무비스님 책에 관해 보다 더 잘 써드릴 것을…
“전 선생님께서 『금강경 강해』 속에서 절 야단치시는 것도 잘 듣고 반성을 했습니다.”
좀 가슴 한 구뎅이가 폭 쑤셨다.
“사실 제가 『금강경』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게 된 것은 탄허스님의 영향도 크지만, 선생님의 글에서 얻는 영감이 적지 않습니다. 번역에 대한 선생님의 채찍과 격려야말로 아마 우리나라 8. 90년대 한국의 학풍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번역에 뜻을 둔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선생님께서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하나의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아이쿠, 좀 더 잘 써드릴 것을!
“이런 말하면 선생님께서 좋아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선생님의 그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한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침묵이 흘렀다. 내가 대답할 문제는 아니었다.
“『석도화론』이라는 책입니다. 천하의 명저이지요.”
난, 그 순간 언젠가 법정스님께서 나의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석도화론』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냈다. 석도는 청초(淸初)의 대화가이자 화상(和尙, 스님)이었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불교를 비불자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주신 최고의 포교사이십니다. 우리나라의 지식대중이 불교에 관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중한 루트가 선생님의 글과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제가 조계종 교육원장직을 맡고 있습니다만, 우리 교육원의 업무는 선생님이 다 맡아주시고 있는 셈이지요. 핫핫하……”
난 갑자기 일류 포교사가 된 느낌이었다.
“인도여행을 하셨으니까, 저는 믿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도 꿈도 꿀 수 없는 아주 새로운 인도여행기를 쓰실 것이라고, 누구나 쓰는 그런 기행문이 아닌…… 혜초가 못다한 꿈을 이루어 주십시오.”
스님께서는 정다웁게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리고 다음 순례지로 떠나기 위해 로비에 가득 모인 청림회 회원들에게 간단한 법어를 해달라고 청했다. 나는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살아있는 불타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역설했다. 지나치는 풀 한 포기에서도 부처님의 체취를 발견하기를 빈다고 하고 합장을 했다. 그들이 탄 뻐스는 떠났다. 난 무비스님께서 창가에 앉아 계신 모습이 멀어지고 또 멀어질 때까지 수자타호텔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일은 이제 머리를 깎는 일이다. 난 내 머리를 항상 손수 깎는다. 이부갈이로 깎다보니 좀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아예 박박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면도도 하고 구리무도 바르고, 정결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도올서원 제자이며, 디자이너인 승해군이 달라이라마 알현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준 검은 면의 도포를 단정하게 입었다. 그리고 구두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남군ㆍ이군과 함께 티벹궁 앞에 1시 정각에 섰다. 복잡한 수속이 시작되었다. 몸과 짐의 철저한 검색과정을 거쳐야 했다. 너무 뒤져 싸니까 우리의 호위를 맡고 있던 미스터 타클라가 짜증을 냈다. 귀인들을 너무 홀대한다는 느낌으로 호위병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달라이라마의 수비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티벹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검색한 것도 티벹인들이 아니라 인도인이었다. 망명정부의 한 고달픈 측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노예왕조의 꾸듭 웃딘 아이바크를 계승한 제2대 왕 일투트 미쉬(lltutmish, r, 1211~1236)의 묘이다. 이 사람이 꾸듭 미나르의 주인이며, 인도에 처음으로 델리 술탄제도를 확립시킨 장본인이다. 징기스칸의 남침을 저지시켰으며, 인도의 전통적 행정과 터키의 군사제도, 꾸란의 법제를 결합시켰다. 이 묘는 무굴제국 훨씬 이전의 인도 이슬람 묘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후마 윤의 묘나 따즈 마할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상의 묘는 가묘이다. 항상 그 지하실에 진짜 묘가 따로 있다. 이 사진은 돔 아래 홀에 놓여있는 가묘와 지하의 진묘로 내려가는 통로를 동시에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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