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상반됩니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거죠.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자기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리킬 따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 안의 생산적인 힘, 그것이 바로 실체지요. 자연은 이 생산적인 힘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 라이프니치 |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 | 개체의 본질은 실체다 |
개체는 실체의 변형된 모습으로 실체는 하나다 |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다 |
따라서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어떤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견해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셈입니다. 덕분에 거듭 쫓겨나서 고생을 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힘이란 뜻에서 그는 자연을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 ‘능산적 자연’이라고 흔히 번역합니다)이라고 합니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이라는 뜻이지요. 동시에 자연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체들, 양태라고 부르는 것들의 집합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당연히 양태들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양태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실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그는 또 자연을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 ‘소산적 자연’이라고 흔히 번역합니다)이라고 합니다.
결국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되는 자연’이란, 자연이 갖고 있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측면과 수동적이고 산출물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자연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란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의 결합체라는 말입니다.
자연에 공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연을 ‘생성’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요컨대 인간이나 자연이나 하등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자연이, 주체가 하는 대로 통제되고 내맡겨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관점은 자연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대상이며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에 의해 지배될 대상이라고 보는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며, 오히려 들뢰즈가 ‘자연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런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주체를 떼어내면서 함께 떼어냈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을 다시 자연에 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두 가지 속성 | |
산출하는 자연 natura naturans |
산출되는 자연 natura naturata |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 | 수동적이고 산출물적인 자연 |
生成(자연주의: 자연의 주체성ㆍ능동성 강조) |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