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욕망 : 도둑 맞은 편지
이상의 이야기를 포의 소설 『도둑 맞은 편지』를 통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라캉의 저작집이자 활동의 ‘기록’(écrit)인 『에크리』Écris는 바로 이 소설에 대한 세미나로 시작하지요. 아시다시피 그 소설의 주 스토리는 왕비가 왕이 있는 자리에서 왕이 봐선 안 될 중요한 편지를 장관에게 도둑맞음으로써 시작하지요. 경시청장이 탐정 뒤팽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비가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왕이 갑자기 들어오고, 왕비는 약간 당황하지만 그걸 책상 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서처럼 그냥 펼쳐두지요. 물론 왕은 그 편지를 못 봅니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왔던 눈치 빠른 장관은 비슷한 문서를 하나 책상에 펼쳐두고 설명하는 체 하다가 그걸 두고 대신 왕비의 편지를 가져가지요. 그렇지만 왕비가 그걸 저지할 순 없는 상황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장관은 왕비를 이용해 권력을 키웁니다. 왕비의 요청으로 이 편지를 찾기 위해 경찰이 개입하여 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지지만 편지를 찾지 못하고, 결국 탐정 뒤팽에게 사건을 의뢰합니다. 결과는 뒤팽이 그 편지를 찾아주고 현상금을 받는 거지요.
여기서 왕은 눈이 있으되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 눈치도 못 챕니다. 반면 왕비는 장관이 뻔뻔스레 편지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도 전혀 저지하지 못합니다. 장관은 왕비에게 편지를 가져간다는 것을 오히려 분명하게 알리고, 그걸 자신이 갖고 있음을 아는 왕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합니다.
우선 편지가 ‘letter’라는 점을 주목합시다. 이 단어는 문자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지요. 라캉이 보기에 이 letter는 언어적으로 짜여진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 각지는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편지에 대한 각자의 관계로 인해,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왕, 편지를 못 보리라 생각하는 왕비, 하지만 그걸 알아보고 유유히 가져가는 장관의 위치가 정의됩니다. 각자가 서 있는 지점은 letter에 의해, letter에 대한 각자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외부에 있는 이 관계가 바로 타자며, 그걸 전달하는 편지는 ‘타자의 담론’인 것이죠. 이는, 못 찾는 경찰과 그걸 못 찾으리라 생각하는 장관, 하지만 그걸 유유히 찾아내 가져가는 뒤팽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이 관계들이 우연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임을 보여줍니다.
▲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
그래서 우리는 나의 행동거지가 타인의 눈에 드러나는 공간과 달리 그것을 프라이버시의 형태로 감추고 은폐할 수 있는 ‘사적 공간’에서 쉽사리 편안해진다. 더구나 ‘아이’도 ‘가족’도 없는 나만의 방이라면, 혹은 옷을 벗어버리고 욕망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도 좋은 내밀한 공간이라면, 하지만 푸코는 집요하게 거기서도 타인의 시선이, 그 시선을 대신하는 나의 시선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 시선의 주인공은 탑 위의 감시자가 아니라 의사다. 17세기에 기독교는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행위, 느낌까지 말하도록 했던 ‘고해’라는 장치를 통해, 신부의 시선으로 침실 안에서 자신의 신체를 보게 했다.
그런데 그 시선이 19세기에 이르면 의사의 시선으로 대체된다. 이를 위해 19세기 의사들은 어린이의 자위가 얼마나 육체와 정신에 해악을 끼치는지를 주장하고, 여성의 성욕은 자궁의 경련에 기인하는 히스테리(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한다)의 일종임을 ‘증명’하며, 다양한 변태적 욕망과 도착적 행위들을 찾아내서 일종의 ‘정신병’으로 규정한다. 독일 의사 크라프트-에빙이 쓴 『성의 정신병리학』은 1870년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성욕이 너무 빈번히 느껴질 때면 “이거 병이라던데…” 하며 자신의 신체를 보게 되고, 배우자가 ‘이상한’ 체위를 하자고 하면 “저거 병이라던데…” 하며 그의 신체와 욕망을 보게 된다. 이로써 “건강을 염려하는” 의사의 시선이 내밀한 침실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에곤 쉴레(Egon Schiele)가 그린 위 그림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에서 모델은 화가의 시선을 위해 포즈를 취하며, 화가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저 화가를 의사로 바꾸기만 한다면, 그 시선 안에서 옷을 벗고 서 있는 모델이 바로 침실 안의 우리 자신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왕비가 편지가 도난당하는 걸 보고도 아무 말 못한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편지의 부재를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장관이 그 편지를 눈에 보이게 도둑질 한 것 역시, 자신이 왕비의 약점을 쥐고 있는 존재며 왕비가 되찾고자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용해 장관은 왕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별짓 다해가며 장관의 집을 뒤지고 편지를 찾는 것은 왕비가 욕망하는 것을 자신이 가져다 줌으로써 왕비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자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갖고자 하며, 타자의 욕망의 대상임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letter는 ‘남근’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점에서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디즈니랜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되는 보드리야르는 감옥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기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마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 허구적 환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저기 따로 있는 것처럼, 그는 걸프전이 터졌을 때도 그것을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했다가 많은 진지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아마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조작되는 무기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란 그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가 말한 것은 차라리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걸프전은 마치 전세계가 항상-이미 미국이 벌이는 잠재적 전쟁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기 따로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걸프만에 퍼부어지는 미사일을 보면서, 우리가 거기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않았는가! 제7함대의 미사일과 폭격기는 언제든 어디로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도,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시뮬레이션이란 개념 또한 시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대상을 보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종류의 시선의 이름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 시선의 ‘주인’, 그 시선의 발원지는 누구일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