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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수양록, 상병 - 02.04.06(토) 진지 공사와 진심 없는 말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군대 수양록, 상병 - 02.04.06(토) 진지 공사와 진심 없는 말

건방진방랑자 2022. 7. 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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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공사와 진심 없는 말

 

0246() 폭우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진 진지 공사 기간이다. 폐바 첫 진지 공사이기에 대단히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여기 FEBAGOP와는 달리 빡세다는 진지 공사였기에 걱정이 절로 들더라. 지금에서야 느끼는 거지만 GOP 진지 공사는 진지 개척이 아니라 진지 청소 정도의 작업이니 그만큼 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FEBA의 진지공사는 진지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고 밤까지 진행되기에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역시 우리들의 예상대로 빡센 일주일이었다. 5시에 일어나 8시정도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저녁 6시에 접어 들어서야 끝나는 일정이다. 내리쬐는 뜨뜻한 햇살을 등지고서, 또는 앞대고서 그 무수한 땀방울들을 흘려가며 대지의 끊임 없는 생명력에 맞서 새로운 방벽을 구축해야 한다. 거의 매일 매일을 토굴만 했기에(난 사실 삽질을 잘하지도 못하지만, 또한 삽질만큼 힘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르는 조나 견치석조犬齒石組는 오히려 짬짬이 쉴 시간이라도 있으니깐) 어깨, 오른쪽 손. 허리 그 모든 게 아파서 죽을 뻔했다. 막노동판과 똑같은 느낌으로 작업을 하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점은 오대기였다. 저번 주엔 어쩌다 한 번씩 상황이 걸렸기에 나름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 주엔 전혀 달랐다. 실제 상황에 대한 오대기도 걸려서 저번 주처럼 그냥 모였다가 확인한 후에 헤어지는 그런 약식화된 오대기가 아니라, 모여서 선상고지까지 수색해야 하는 그런 FM 오대기였으니 말이다. 정말 힘들다 못해 짜증이 났다. 거기에 짜증을 폭발시킨 일은 연이틀 간 밤에 두 번이나 오대기가 걸렸다는 것이다. 잘 자고 있는데 한 번 걸렸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새벽 4시 정도 되어서 걸린 오대기는 아니다 싶을 정도의 오대기였고 거기다 수색까지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진지 공사로 엄청 피곤하고 힘든 데, 무슨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어젠 더욱 가관이었다. 비록 새벽 12시 반 정도에 한 번 밖에 안 걸렸지만 오대기가 걸려서 나가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도대체 지금 이렇게까지 오대기를 건 일직사관은 누구일까?’ 자못 궁금했고 미워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수 더 떠서 수색까지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에 쫄딱 젖어가면서 수색을 했고 철수 명령이 떨어져서 집합해 있었다. 그랬더니, 일직 사령님이 진지공사 기간이라 너희들 다 힘든 거 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하나 마나한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난 그 말에 혐오스러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든 걸 다 안다면 이런 상황을 안 만들면 그만인 것을. 안다면서 오대기를 부른 걸로도 부족해 쫄딱 젖도록 수색까지 시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 언제부턴가 말로 표현되는 것들에 대해 증오감이 싹트게 되었다. 말과 말로만 표현되는 진심없는 현실에 기가 질린 것이다. 이 놈의 군대란 곳은 말 하나가 단순한 말이 아닌 법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말처럼 쉬운 게 어디 있던가? 말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몸소 해보면 말과 행동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도 나온 거겠지. 특히 지휘관들이 이곳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깨끗히 치워라라거나 오늘 작업 진도는 이런 것들까지 하는 것이니까, 꼭 오늘 마무리 지어라라거나 하는 말처럼 실제적인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희망사항을 마치 실제의 계획인양 하는 말들 말이다. 이런 말들은 실제적인 일뿐 아니라 관념적인 일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난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라든가 넌 지금 이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지하는 남은 다 파악해버렸다는 듯이 하는 말투가 그것이다. 말이 주는 허무맹랑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므로 말의 위엄과 말의 신뢰감을 높여주기 위해서는 진심을 담아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한다. 그럴 때에야 일직사령관의 저 말도 진심어린 말이 될 수 있겠지.

 

말이 삼천포로 빠졌지만 진지 공사는 이런저런 이유도 정말 힘들었다. 특히 45일은 식물일이란 공휴일이었다. 그런데 나가서 평소와 똑같이 작업을 해야 없다(원랜 오늘도 작업을 해야 했지만 밖에 비가 부슬부슬 끊임없이 내리는 관계로 모처럼 이렇게 푹 쉬고 있다). 이처럼 진지 공사 기간엔 애석하게도 휴식이 전혀 없단다. 어젠 그래도 그나마 굴토를 하지 않고 흙주물럭을 만들었기에 그나마 나왔다. 그렇게만 월을 패리면 진지 공사도 쉬울 텐데, 오늘 비가 와서 이렇게 쉬긴 하지만 다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주엔 더욱 힘든 진지 공사가 되려나? 괜한 기우(杞憂)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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