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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2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2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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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 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기심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약무색, 약유상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령입무여열반이멸도지.

 

 

소유(所有)’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있는 바의 뜻인데, 백화문에서는 이 자체로 일체라는 뜻이 된다. 다음에 일체(一切)’라는 것이 다시 나오므로, 나는 이것을 존재하는으로 번역하였다. ‘소유일체중생(所有一切衆生)’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뜻이다. 그런데 중생(衆生)이란 무엇인가?

 

여기 중생(衆生)’이란 ‘sattva’의 번역인데, 현장(玄奘)유정(有情)’으로 번역했던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이 ‘sattva’가 계속 문제되는 이유는 바로 보살의 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흔히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인간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윤회의 범위를 생각할 때, 중생은 인간에만 국한될 수는 없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며, 요새 말로는 생물(生物)’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물(生物) 중에서도 식물은 제외되는 것 같으며 동물(動物)만을 지칭하는 것 같다우리말의 짐승중생(衆生)’에서 전화(轉化)된 것이다.

 

유정(有情)’()’은 곧 마음의 작용이며 감정내지 의식작용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는 지각(sensation)’을 가리킬 수도 있다. 중생(衆生)은 원래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행능정생이정중생(幸能正生以正衆生, 다행스럽게도 그 삶을 바르게 함으로써 뭇 생명을 바르게 한다)’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보통 이를 뭇 사람으로 번역하지만, 장자(莊子)사상의 근본 취지로 볼 때는 중생(衆生)’이 꼭 인간이나 동물에만 국한된다고만 해석할 수도 없다. 하여튼 중생(衆生)’은 불성(佛性)을 지니는 것이며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정(無情=비정非情)과 구분되는 유정(有情)이다. 유정(有情)함령(含靈)’ ‘함식(含識)’이라고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고도의 의식이나 영혼을 구유하는 존재(存在)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이 중생(衆生) 사뜨바9종류로 분류하여 말한다. 그런데 이 구류중생(九類衆生)은 크게 세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첫 카테고리는 태어나는 방식(mode of conception)에 관한 분류로 처음 4종류가 들어간다.

1)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2) 태생(胎生)은 자궁의 태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3) 습생(濕生)은 물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물고기나 모기 등의 곤충류가 이에 속한다.

4) 화생(化生)은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와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로서 다음의 두 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색(有色)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이며,

2) 무색(無色)은 형태가 없는 신들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지각의 유무로 분류되는 것으로서 마지막 3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상(有想)은 오관(五官)의 지각을 가진 존재(all organisms with sense-organs)이며,

2) 무상(無想)은 물리적 오관(五官)의 지각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이다.

3)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 가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고의 신들이다.

 

뭇 보살 마하살들은 이 모든 아홉 종류의 중생들이, 그들의 무명으로 인하여 윤회의 바퀴를 돌고있는 불쌍한 현실을 공감하여, 이들을 모두 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하려 한다는 것이다.

 

멸도(滅度)’()’불을 끈다는 의미요, ‘()’건네다’(), 즉 제도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즉 구원한다는 뜻이다. ()이란 이다. 무엇을 끄는가? 그것은 불을 끄는 것이다. 불이란 무엇인가? 우리 존재는 불로 훨훨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ㆍ갈애의 불이요, 곧 연기의 불이요, 곧 윤회의 불이다.

 

그 불을 끈 상태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반(涅槃)’은 곧 ‘nirvāṇa’의 음역인데 니원(泥洹)’이라고 음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은 바로 불의 꺼짐이다.

그런데 이 꺼진 상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가 유여열반이요, 그 하나가 무여열반이다. 1) 유여열반(有餘涅槃)이란 문자 그대로 남음()이 있는() 열반(꺼짐)이다. 무엇이 남아있는가? 열반에 들긴 했는데, 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오온(五蘊)의 집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유정(有情)이요, 생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장작의 불이 꺼지긴 했는데 장작이 숯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완전한 꺼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숯도 남지않고 재조차 남지않고 완전히 연소되어 꺼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남김이 없는 열반(꺼짐) 무여열반(the Nirvāṇa without substratum)’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온(五蘊)이 사라지고 열반만 남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사실 죽음이다. 존재에 있어서 완전한 열반은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입멸(入滅), 사거(死去),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입적(入寂)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럼 불교는 죽음의 예찬의 종교인가? 그렇다! 다음의 두 싯귀를 보라!

 

乾坤一戱場
건곤일희장
건곤은 하나의 연극무대
人生一悲劇
인생일비극
인생은 하나의 비극일뿐 - 황똥메이(方東美) -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장한 듯이 무대위서 떠들지만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 맥베스 -
Signifying nothing.

 

나는 불교를 생각할 때, 비극을 생각한다. 나는 불타를 생각할 때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을 생각한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련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이련만, 그토록 그토록 울부짖으며 우리는 매달려야 하는가?

 

보살은 말한다: “난생이건 태생이건, 습생이건 화생이건, 유색이건 무색이건, 유상이건 무상이건 비유상비무상이건, 이들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를 내가 무여열반에 들게 함으로써 멸도하리라!” 그러면 보살은 살인자인가? 그럼 불타는 살생자인가? 살아있는 모든 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자이기라도 하단 말이냐??

 

사실, 문맥으로 보면, 이 나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할 수 있는 불교학자는 없다. 그들의 답변은 이렇게 궁색해질 것이다. 여기서의 무여열반이란 열반의 소승적 철저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일 뿐이다. ‘무여열반이란 생명의 불이 꺼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죽음이다. 나 도올에게도 죽음에의 갈망이 있다. 순간 순간 죽음이라는 미지의 환상이 엄습한다. 인간 존재는 사실 타나토스(Thanatos)적 본능 속에서 산다. 그것은 에로스(Eros)와 동시적인 강렬한 본능이다. 소승적 수도승(修道僧)들은 분명, 멸절(滅絶)의 철저성을 강조했고, 그 강조는 분명 번뇌의 온상인 육체의 멸절에까지 이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진정한 해탈은 죽음에서 비로소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성철당의 돈오돈수도 결국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는 침묵할 뿐인 것이다.

 

판본의 문제인데 우리 해인사판에는 가끔 ()’()’로 되어 있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无想)’의 경우처럼. 판본을 중시하여 판본모습 그대로 배인(排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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