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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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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바로 여기까지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이와 같이의 내용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즉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한 것이다. 바로 이 3절의 내용이야말로 대승정신의 출발이며, 바로 금강경』」벼락경이 될 수밖에 없는 전율의 출발인 것이다. 벼락같이 내려친 대승(大乘)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붓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파(說破)하려 하고 있는가?

 

우선 외면적으로 이 불타의 한마디는, 비록 외면적으로는 보살을 주어로 하고 있지만, 불타가 추구해온 자비(慈悲)의 삶에 대한 전면부정이다. 이것은 모든 전도주의(Evangelism), 모든 구원주의(Saviorism, Soteriology)에 대한 전면 파업이다!

 

나는 윤회의 굴레를 계속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중생들을 구원할려고 하였다. 아니! 나는 구원하였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같이 위로하고 애통해 하고,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가르치고 또 동고동락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윤회의 굴레의 아픔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멸도(滅度)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나 붓다의 실존적 깨달음은 멸도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 자비행에 있지 아니하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멸도의 길을 열어준, 열음의 혜택을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로 나는 아무도 멸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구원을 받아야 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비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죽도록 열심히 산 나의 번거로운 삶의 수고는 헛짓이었나? 그렇다! 그것은 나의 인식 속에서 전면 부정되어야 할 사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붓다 자신의 자비로운 삶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붓다는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를 생각할 때, 아니, 불교를 잉태한 인도문명을 생각할 때, 단 한마디의 말을 떠올린다. 그것은 윤회의 공포(the Horror of Transmigration)’! 이것은 비단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윤회는 인도 문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의 기본틀이다. 윤회 없는 삶이란 없다. 윤회란 한마디로 내 삶의 행위가 행위 자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 되어 시간 속에서 영속된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또 하나의 윤회의 삶을 의미한다. 그 또 하나의 삶으로의 태어남은 또 하나의 죽음(재사再死)을 전제로 할 것이다. 그 또 하나의 죽음은 다시 또 이생으로의 환귀를 의미할 것인가? 하여튼 이런 생각은 공포스러운 생각이다. 나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나의 삶이 삶이 아니다. 이 생사(生死)의 끊임없는 고리를 이어가는 업은 나의 삶의 도덕적인 행위다.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낳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낳는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윤회는 하나의 사실이다. 시간 속의 존재의 사실이다. 그리고 윤회만을 엄격히 생각한다면 윤회 속에는 인간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 윤회의 영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업()의 존재(存在)이기 때문이다.

 

이 윤회는 인간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윤회는 숙명론(fatalism)이나 종말론(eschatology)이 아니다. 기독교처럼 복락의 천국론(天國論, Kingdom of Heaven)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이후무종(以後無終)의 영속(永續)일 뿐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비극!

 

해탈이란 바로 이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브라만계급으로부터 모든 카스트의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공통(共通), 윤회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의 복음이었다. (, karman)윤회(saṃsāra)해탈(mokṣa), 이 세 가지는 인도문명의 기본골격이었다. 그러나 윤회로부터의 해탈, 그 복음의 소식은 붓다의 시대를 벗어날수록 특정한 수도인(修道人)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아라한들의 고행(苦行)에 가리어 버렸다. 뭇 중생들은 오직 해탈의 가능성이 없는 윤회의 굴레를 굴리고 있었을 뿐이다.

 

윤회의 주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다. 그것은 행위. 그런데 여기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윤회를 일으키는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 윤회의 주체는 업이다. 그러면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런데 불타는 무엇을 말했든가? 불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은 무엇이었든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이었든가? 일체개고(一切皆苦)? 아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아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아니다! 사실 이러한 얘기들은 붓다가 아니래도 당대의 모든 현자(賢者)들이 상투적으로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덧없고, 오직 열반(涅槃, nirvāṇa)만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이런 얘기들은 당대의 현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는 말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 할 정종법인(正宗法印)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삼법인(三法印)이 아니요,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일법인(一法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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