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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제삼분 - 3.3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건방진방랑자 2022. 11.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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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諸法)이란, ‘()’이라 해서 무슨 대단한 달마진체(眞諦)’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나 유식(唯識)에서 칠십오법(七十五法), 백법(百法) 운운했듯이 그냥 모든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은 존재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법을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유위적 법(, 존재)이요, 하나는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무위적 존재다.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후자를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데, 유위법 속에는 또다시 크게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유법(心所有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4카테고리가 있다. 우리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때의 제행(諸行)의 행()‘saṃskāra’를 말하는데 이 행()은 곧 유위법(有爲法)의 통칭(通稱)인 것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제행諸行)’은 덧없다(무상無常)는 것이다. ‘덧없다하는 것은 불변(不變)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항상됨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諸法)의 법()은 제행(諸行)의 행()과는 달리,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말이다.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 없다.’ 이것이 곧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뜻인 것이다. 그런데 ()가 없다함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아(, ā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가 아니다. 는 넓은 의미에서의 ()’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다. ()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불타의 논리적 깨달음에 속하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내가 없다는 그런 상식적 논의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아()라는 것은 곧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래에(sub) 놓여진 것(stance)이다. 즉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 책상이 있다고 할 때 참으로 우리가 책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책상을 실체화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책상을 책상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책상의 자기동일체로서 책상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책상의 자기동일체를 바로 우리가 ()’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기 저 꽃은 예쁘다!’ 아주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저기 저 꽃이 있고, 그 있는(존재하는, 가 있는) 꽃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구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기 꽃이 있고 그 꽃은 아름다움을 소유한 상태로 있다? 과연 그런가! 내일 보면 어떨까? 시들어져 버렸다. 어저께는 어땠는가? 피지도 않았다. 그럼 이 순간에는 어떠한가? 과연 저기 저 꽃이 있는가? 그럼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나의 마음의 상태인가? 내가 저 꽃을 감지하는 순간의 나의 느낌인가? 그것은 실체성이 있는가? 과연 저 꽃은 아름다운가? 저기 저기 저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에 그 느낌의 대상으로서의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존재가 아닌 나의 느낌을 담아낸 어떤 물체의 조합이었다. 그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오온(五蘊)이라 부르고 그 조합을 가합(假合)이라고 부른다. 즉 그 꽃은 존재(存在)가 아닌 오온의 가합인 것이다.

 

다시 묻겠다! 제법(諸法)은 있는가? 모든 존재는 참으로 존재하는가? 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제법(諸法)은 무아(無我),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의 포효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없다! 그 나가 없다고 외치고 있는 붓다라는 아()조차가 허공(虛空)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큰 문제가 발생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면, 윤회(saṃsāra)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가 없는데 윤회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불교는 애초로부터 윤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윤회설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윤회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다. 윤회를 전제로 하지 않는 존재를 생각할 수도 없고, 윤회의 전제가 없는 불교는 생각할 수도 없다. 사실 윤회는 이론이기 전에 하나의 사실이요, 구원이기 전에 하나의 현실이다. 윤회는 모든 생명의 생사의 법칙이요, 순환의 대세다. 불교가 윤회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도라는 문화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윤회의 설정이 없이는 인간삶의 도덕성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선업(善業)에 대한 요구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윤회와 무아(無我)의 모순’, 이것은 불교사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상황이었다. 윤회와 무아 사이에 존()하는 갈등과 긴장은 불교사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였다. 실로 모든 불교의 종파(宗派)의 성립(成立)은 바로 이러한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성립한 지류적(支流的)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살론의 등장은, 아라한에게 파산을 선고하고 나온 새로운 대중운동의 출발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금강경본문에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사실 이것은 소승 아라한들의 멸절(滅絶)에의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보살들에게는 바로 이 멸절에의 동경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도 무아(無我). ()도 무아(無我). 생사(生死)에는 생사라고 하는 고유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반(涅槃, nirvāṇa)에도 열반이라고 하는 고유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윤회의 지멸(止滅)이 곧 열반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윤회는 삶의 현실이다. 그 삶을 벗어나는 죽음이 그 삶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들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 윤회의 현실이 곧 열반이라고 하는 생각의 회전이다. 이 생각의 회전은 또 무아의 부정의 부정, 부정의 끊임없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이 생사의 고리 밖에는 잡을 것이 없다. 열반이 자리잡을 수 있는 그 실체적 자리가 근원적으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이 사상은 곧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과감한 생각으로 비약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 그 자체가 죄가 아니요, 번뇌 그 자체가 중생구원의 자비(慈悲)로 화()하는 것이 곧 대승이다!

 

인간 붓다는 선포한다. 붓다인 그대 보살들이여! 그대들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마음가짐을 지닐지라: “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원이란 근원적으로 그 뭇 중생들에게 존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구원한 바가 없다. 나의 구원의 삶, 그 자체가 성립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항상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성경의 한 구절이 있다(복음서의 원형인 마가복음을 선택한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마가 15:33~34).

 

 

예수는 분명 그의 삶을 인간에 대한 구원의 삶으로 이해했다. 예수는 분명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고 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는 (Light)’이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진입한 빛이다. 그는 육체의 어둠 속으로 수육(受肉)한 구원의 빛이요 영혼이다. 그는 제자 앞에서 때로는 그 모습이 변형(Transfiguration)되어 해같이 찬란한 빛으로 되고 그의 옷조차 빛으로 화()한다(마태17:2, 마가9:2).

 

우리가 잘 아는 동화에 거지왕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우연히 얼굴이 똑같게 생긴 거지의 옷을 입게 되고, 거지로서 오인되어 경험하는 온갖 수난과 열락의 이야기! 예수의 상황도 이와 같다. 예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윤회(saṃsāra)의 어둠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천상(天上)의 빛이다. 항시 해탈(mokṣa)이 가능한 자유로운 빛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인간의 옷을 입었다. 거지왕자가 거지로 오인될 수밖에 없듯이, 예수는 윤회의 굴레 속의 사람으로 오인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내가 왕자라 하고 빛이라 할 수록 그는 조롱과 멸시와 핍박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의 삶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윤회의 굴레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가 그의 죽음을 예언하고, 그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은 바로 거지왕자가 이제 그 진짜 거지를 만나 다시 자기의 본모습인 왕자로 되돌아가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의 몸의 윤회의 어둠을 버리고 다시 빛의 세계로, 천상(天上)의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기나긴 오해와 박해와 수모의 시간들을 버리고 영광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기쁜 그 순간! 왕궁의 모든 찬란한 보화가 기다리고 있는 그 기쁜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회귀(回歸)의 기쁜 순간에 예수는 무어라 외쳤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이 구절에서 항상 눈물을 흘린다. 왜냐? 나는 한 인간의 소름끼치는, 절망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울부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그 어느 누구도 이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하는 자들이 없다. 성서의 기자들이 이것을 기록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서기자들의 위대한 대승정신인 것이다. 예수의 이 순간의 외침은 바로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러한 해석은 무서운 이단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한 사실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을 어찌 달리 해석할 방도가 있을까?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정녕코 나를 십자가에 죽이시려 하시나이까? 주여! 주여! 나는 하나의 인간이로소이다. 나는 거지가 되어 태양보다 더 찬란한 희비(喜悲)의 삶을 살았소이다. 날 그대로 두소서! 윤회(saṃsāra)의 어둠 속에 그대로 두소서! 어찌하여 날 죽이시나이까? 어찌하여 날 해탈(mokṣa)의 허공 속으로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인간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해탈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해탈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의 전면부정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또 무어라 외쳤던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23:34), 바로 이 알지 못함’, 이것은 곧 인간의 무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의 무여열반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간됨의 완성이었고, 신의 아들됨의 성취였다. 가만히 앉아 좌선(坐禪)한 채 입적(入寂)하는 붓다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인류의 무명의 굴레를 불사르는 속의 해탈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회가 곧 열반(涅槃, nirvāṇa)이라고 하는 대승적 삶의 승리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예수의 죽음ㆍ해탈의 순간에 외친 하나님의 아들됨의 부정의 지혜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제도 동일하다. 만약 인간 붓다가 브라만들에게 잡히여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면, 그 십자가에 못박힌 붓다의 최후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여열반의 죽음을 찬란한 삶으로 전환시킨 그 한마디였을 것이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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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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