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佛言: “善哉! 善哉! 須菩堤!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如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얼마나 강력하고 단호한 붓다의 말씀인가? 좋다! 좋다! 나는 네 말대로 못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여금체청(汝今諦聽)’에서 ‘여(汝)’는 ‘너’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근감을 나타내는 ‘너’이다. 여기서 본동사는 ‘청(聽)’이다. 중국어에는 재미있게도 능동태와 수동태가 아예 글자가 다르게 표현된다. ‘청(聽)’은 능동적으로 내가 들을 때만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하여 ‘문(聞)’은 ‘듣는다’가 아니라 ‘들린다’이다. 유명한 노자의 말에 도(道)를 가리켜 ‘청지불문(聽之不聞,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도덕경』 제14장)’이라 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정확히 번역하면, ‘내 귀에 이와 같이 들리었다’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들린 대로 들은 것이다. 거기에는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청(聽)은 다르다. 이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 내가 애써 힘써 주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내가 능동적으로 발심하여 들어야 한다. 진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으려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는 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확인하고 있다.
청(聽) | 능동태 | 듣는다 |
문(聞) | 수동태 | 들린다 |
‘너 이제 들으라!’ 어떻게 듣는가? 그 ‘어떻게’를 나타내주는 부사가 곧 ‘체(諦)’인 것이다. 여기서 ‘체(諦)’는 ‘자세히’ ‘명료하게’의 뜻이다. 그리고 ‘진실하게’의 뜻도 들어 있다.
‘여금체청(汝今諦聽)!’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중당(中唐)의 대중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거이는 명(名)이고, 낙천(樂天)은 자(字)이다. 당나라의 시인으로서 평이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다】의 「예상우의가(霓裳羽衣歌)」에 ‘응시체청수미족(凝視諦聽殊未足)’이란 말이 있듯이 이 ‘체청(諦聽)’이란 표현은 일반 문헌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다. 중국소설 『홍루몽(紅樓夢)』에서도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스님들이 이것을 ‘眞諦’를 ‘진제’라 발음하는 관례에 따라 획일적으로 ‘제청’이라 발음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체청’으로 읽어야 한다. 체념(諦念), 체관(諦觀), 요체(要諦) 등의 경우처럼, 이 때는 일반 어법에 따라 ‘체청’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라집(羅什)이 여기 ‘체(諦)’ 글자를 선택한 이유는 불교적인 진체(眞諦)의 의미가 분명 숨어있다. 다시 말해서 듣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들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또 다시 반복하여 선포한다. 이것은 분명 붓다의 케리그마(κῆρυγμα, 설교)이다. “반ᄃᆞ기 너 위ᄒᆞ야 닐오리라!”(세조역).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이러한 강렬한 어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라집(羅什)의 탁월한 연출이다. 이 문자 속에는 인간 붓다의 실존적 ‘결단(Entscheidung)’이 숨어있다. 반드시 내 너 위하여 이르리라! 반야와 비반야의 갈림길, 고비길, 그 결정적인 순간의 선포인 것이다.
여기서 ‘너’는 누구인가? 물론 외면적으로는 수보리 존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다. 수보리는 수없는 뭇 보살들, 진리를 갈구하는 선남선녀의 피끓는 젊은 생령들을 대변하는 지시체일 뿐이다. 내 너 위하여 이르리라, 반드시! 반드시 너 위하여 이르노니 반드시 너 ‘자세히’(깨달을 때까지) 들어야 한다. 이 ‘들음’의 과정이 바로 『금강경』이라는 노래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붓다는 수보리의 질문을 반복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여기에는 붓다의 신중함, 즉 주저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엄중한 사태에 대한 붓다의 경고다. 이 경고는 상대방에게 마음의 준비의 시간을 허락한다. 붓다는 상대방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질문을 반복해서 대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는 운하(云何, 어떻게)를 여시(如是, 이와 같이)로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이미 해답은 주어진 것이다. 이미 선포는 끝나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한마디로!
그러나 우리는 이 ‘이와 같이’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붓다는 그러한 갈구하는 심령을 확인한다. 이와 같이 살 것이다. 부처님! 제발, 이와 같이, 이와 같이, 그 이와 같이를 더 말씀해주십시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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