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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6. 시와 문자유희: 한시의 쌍관의 -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6. 시와 문자유희: 한시의 쌍관의 -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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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凌晨走馬入孤城 새벽녘 말을 달려 외론 성에 들어서니
籬落無人杏子成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
布穀不知王事急 나라 일이 급한 줄을 뻐꾹새는 모르고
傍林終日勸春耕 숲 곁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를 권하네.

 

고려 때 시인 정윤의(鄭允宜)서강성현사(書江城縣舍)란 작품이다. 새벽녘에 말을 달려 성에 들어서고 있으니, 그는 지금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외로운 성뿐이다.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싶어 울타리를 기웃거려 보아도 보이는 것은 주인 없는 마당에 잘 익어 매달린 살구 열매뿐이다. 그런데 뻐꾹새는 급한 나라 일도 알지 못한 채 철도 없이 숲가에서 봄 밭갈이를 어서 하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다.

 

포곡(布穀)은 뻐꾹새이다. 포곡(布穀)은 중국음으로는 뿌꾸우가 되니 뻐꾹의 음차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의미로 읽으면 씨 뿌려라가 되므로, 뻐꾹 뻐꾹 울어대는 그 소리는 곧 씨 뿌려라 씨 뿌려라 하고 들린다. 살구가 익었으니 계절은 여름이다. 그런데도 철없는 뻐꾹새는 씨 뿌리라고 야단이다. 뻐꾹새를 두고 철이 없다 함은 계절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 아니다. 봄이 다 가고 살구가 열매 맺도록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파종도 못한 채 잡초만 우거져 있는 들판을 바라보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고려 말 대몽항쟁기에 지어진 작품이다. 무심한 자연의 질서는 주인 없는 뜨락 나무 위에 먹음직한 살구 열매를 얹어 놓았지만 정작 이를 따서 먹을 사람은 없다. 급한 왕사(王事)를 전하려 피난을 떠나 텅 빈 성으로 밤새 말을 달려온 시인은 뻐꾹새 울음 속에 허탈한 한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布穀 布穀 뻐꾹 뻐꾹
布穀聲中春意足 뻐꾹새 울음 속에 봄은 무르익었는데
健兒南征村巷空 사내들은 전쟁 나가 시골 동네 텅 비었네.
落日唯聞寡妻哭 저물녘엔 들리느니 과부의 울음 소리
布穀啼 誰布穀 씨 뿌려라 울지만 누가 있어 씨 뿌리나
田園茫茫烟草綠 들판엔 아득하게 풀빛만 자옥해라.

 

권필(權韠)포곡(布穀)이란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이다. 때는 바야흐로 봄날, 뻐꾹새의 울음소리 속에 춘경(春耕)의 일손이 한창 바쁠 시절이다. 그러나 남정네들은 모두 남쪽 전장터로 징발되어 시골 동네는 텅 비고 말았다. 저물녘에 들려오는 과부의 울음소리는 이미 많은 남정네들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음을 알려준다. 뻐꾹새가 씨 뿌리라고 목청을 뽑을수록 그녀들의 기막힌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간다. 그렇게 또 봄이 가고, 파종조차 못한 들판엔 어느덧 잡초가 자옥히 푸르러 가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포곡(布穀)뻐꾹이라는 새 울음소리의 음차이면서 동시에 씨 뿌려라는 의미를 쌍관(雙關)하고 있다. 언젠가 학술 토론의 자리에서 이 작품을 두고 어떤 분이 씨 뿌려라과부와의 연관에 주목하여 남녀상열지사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내놓아 일좌(一座)의 경탄을 자아낸 일이 있었는데, 뻐꾹새의 울음소리 속에 담긴 의미는 이래저래 심장하기만 하다.

 

 

새가 새가 나러든다 복국조(復國鳥)가 나러든다

이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뎌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청산진일(靑山盡日) 피나도록 복국(復國) 복국(復國) 슯히 우니

지사혼(志士魂)이 네 아니냐

 

 

1908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실려 있는 의장청조(依杖聽鳥)가운데 한 수이다. 망한 나라의 뻐꾹새는 이제 더 이상 씨 뿌리라고 우는 것이 아니라 복국(復國)’ 나라 찾자고 울고 있는 것이다.

 

 

거무야 왕거무 거무야 네 줄을 길게 느려

 

날김생 길김생 날버러지 길버러지 모도 다 함부로 슬슬 억드라도 적막공산(寂寞空山) 고목상(古木上)에 홀노 안자 슬피 우난 져 복국조(復國鳥) 행혀나 얼글셰라

 

아모리 나도 지주(蜘蛛)일망뎡 만복경륜(滿腹經綸)이 아니 얼거.

 

 

1910712대한민보(大韓民報)에 실린 지주(蜘蛛), 즉 거미를 노래한 사설시조이다. 역시 뻐꾹새를 복국조(復國鳥)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반에서 뻐꾹새가 복국(復國)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가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한시에는 이렇듯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訓讀)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禽言體)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노고지리를 노고질(老姑疾)’로 표기하여 늙은 시어머니의 병환을 노래한다든지, 아예 부과자(負鍋者)’라 하여 노구[] 솥을 등에 질[] []’라고 풀기도 한다. 소쩍새는 솥적다고 정소(鼎小)’라 하고, 까마귀는 고악(姑惡)’이라 하여 시어머니를 향한 며느리의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쩍새의 다른 이름인 주걱새를 死去’(죽어)로 표기하여 나 죽겠네의 탄식을 털어 놓기도 한다. 모두 쌍관(雙關)의 묘미(妙味)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鼎小 鼎小 솥적 솥적
飯多炊不了 쌀이 많아 밥 지을 수 없다지만
今年米貴苦艱食 금년엔 쌀이 귀해 끼니 잇기 어려우니
不患鼎小患無粟 솥 작아 근심 없고 곡식 없어 근심일세.
但令盎中有餘粮 다만 동이 속에 남은 곡식 있어서
乘熱再炊猶可足 불 때어 두 끼만 먹어도 오히려 좋겠네.

 

장유(張維)정소(鼎小)란 작품이다. 소쩍새는 자꾸만 솥이 적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제로는 말할 수 없는 흉년이다. 곡식은 많은데 솥이 적어 하는 근심이라면 근심이랄 것도 없겠다. 뒤주를 박박 긁어도 남은 곡식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유득공(柳得恭)동금언(東禽言)4수 중 정소(鼎小)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鼎小鼎小 粟多鼎小 솥적 솥적 쌀은 많고 솥은 작네.
婦憂悄悄 아낙은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는데
夫來笑謂婦 낭군 와서 웃으며 아낙에게 하는 말이
朝朝夕夕 兩炊喫了 아침마다 저녁마다 가뜬가뜬 배 불리 먹어치웁시다.

 

봄부터 솥이 작다고 소쩍새가 울더니 대풍(大豊)이 들었다. 배불리 먹을 욕심에 쌀을 잔뜩 얹고 보니 솥이 작아 넘칠 판이다. 아까운 쌀밥이 넘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아낙은 안절부절 못하는데, 타작을 마친 낭군은 활짝 웃으며 아침에도 저녁에도 배불리 먹읍시다 한다. 참으로 흥겨운 정경이다. 이런 걱정이라면 아무리 해도 기쁠 것만 같다.

 

이러한 금언체(禽言體)의 문학 전통은 앞서 뻐꾹새가 복국조(復國鳥)로 되는 예에서도 보았듯이 개화기에 와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19206월 창간된 개벽(開闢)창간호에 실렸다가 압수 삭제된 시 금쌀악옥가루에서도 새울음 소리의 음차를 통한 시대 풍자를 읽을 수 있다.

 

 

북풍한설(北風寒雪) 가마귀 집 귀()한줄 깨닷고 가옥가옥(家屋家屋) 우누나

유소불굴(有巢不居) -가치 집 일홈을 부끄러 가치가치(可恥可恥) 짓누나

명월추당(明月秋堂) 귀뚜리 집 일흘가 저허서 실실실실(失失失失) 웨놋다 금쌀악

 

황혼남산(黃昏南山) 부흥이 사업(事業) 부흥(復興)하라고 부흥부흥(復興復興) 하누나

만산모야(晩山暮夜) 속독새 사업독촉(事業督促) 하여서 속속속속(速速速速) 웨이네

경칩(驚蟄) 맛난 개구리 사업(事業) 저다 하겠다 개개개(皆皆皆皆) 우놋다 옥가루

 

 

둥지를 짓지 않은 까마귀는 북풍한설을 만나고서야 집 귀한 줄 알고 가옥가옥(家屋家屋) 울고, 제가 지은 둥지를 남에게 빼앗긴 까치는 그것이 부끄러워 가치가치(可恥可恥) 하며 우짖는다는 것이다. 모두 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에 대한 암유이다. 그래서 남산의 부엉이도 다시 일어서자는 다짐으로 부흥부흥(復興復興) 울고, 속독새는 한 밤중에도 자지 않고 빨리빨리 잃은 국권을 회복하자고 속속속속(速速速速) 운다는 것이다. 경칩을 만나 몸을 푼 개구리마저도 그 사업에 저마다 참여하겠다고 개개개개(皆皆皆皆) 울어대니 진정 겨레의 독립은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전통은 장만영의 소쩍새로까지 이어진다.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 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 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인용

목차

1.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2. 장님의 단청 구경

3. 견우(牽牛)와 소도둑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5.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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