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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4.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4.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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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

 

 

硏石猶在 峴山已頹 연석(硏石)은 그대로인데 현산(峴山)은 이미 무너져 버렸네.
姜女己去 孟子不來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는 오질 않네.

 

소동파(蘇東坡)가 자신의 벼루 뚜껑에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다. 현산(峴山)의 돌을 캐어 벼루를 만들었다. 하도 많이 캐고 보니 현산(峴山)은 모두 닳아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캐낸 벼루 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가 더 이상 오질 않는다는 말은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에서 원급강녀(爰及姜女)’라 한 구절을 가지고 응용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보아도 ()’에서 ()’가 떠나니 ()’만 남고, ‘()’에서 ()’가 오지 않으니 ()’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별반 특별한 지시적 의미는 없고, 다만 각 구의 첫 글자에 감추어 둔 비밀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그럴듯한 당의(糖衣)를 입혀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그 비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앞서 장두체(藏頭體)에서는 글자의 아래 위 반토막을 내어 그 다음 구절에 응용하였는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첫 구의 좌우 반 토막에서 앞쪽을 떼고, 둘째 구에서는 뒷쪽을 떼어, 이를 다시 한데 붙여 한 글자로 만들고, 34구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해서 다시 한 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에서 ()’을 떼고, ‘()’에서 ()’을 떼어 이를 합하면 ()’이 된다. ()’에서 ()’을 잘라 ()’에서 뗀 ()’과 합하여 ()’를 만든다. 이 두 글자를 합하면 연개(硯盖)’ 벼루 뚜껑이 된다. 그래서 동파(東坡)는 시치미를 뚝 떼고 위 네 구절을 벼루 뚜껑에 새겨 둔 것이다.

 

硏石猶在 峴山已頹 연석(硏石)에 석()이 오히려 있고 현산(峴山)에 산()은 이미 무너졌네.
姜女己去 孟子不來 ()에서 녀()를 제거하고 맹()에서 자()가 오지 않네.

 

이합체(離合體)란 이와 같이 각 구절의 첫 자에서 반토막씩 잘라 둘을 합쳐서 한 글자를 만들어,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의 조합으로 제목을 삼는 형식의 시체(詩體)이다. 말 그대로 글자가 일단 떨어졌다가[] 뒤에 다시 합쳐지는[] 방식을 말한다. 이합체(離合體)는 앞서본 장두체(藏頭體)와 유사하지만, 작시에 있어 더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몹시 까다로운 형식이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변이형태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는데, 후대로 갈수록 제한이 까다로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장두체(藏頭體)와 이합체(離合體)는 모두 앞에서 본 파자(破字) 놀이의 발상 위에 더 까다로운 제한을 얹어 만든 문자유희이다.

 

 

이제 본격적인 완성된 형태의 이합체(離合體) ()를 한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조선 중기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작품이다.

 

徂年糬已改 且可閑逍遙 흘러가는 세월 문득 이 몸 바꾸어 장차 한가로이 노닐만 해라.
聽取天幡鳴 耳邊喧調刀 천지의 소리를 귀여겨 들으니 귓가엔 떠들썩 칼 고르는 소리로다.
干時良已晩 二毛紛飄蕭 시대에 쓰임 구하려도 이미 늦었고 반쯤 센 터럭만 어지러이 흩날리네.
沓沓名利子 白日誇蟬貂 욕심 많은 저 명리(名利)의 사람은 밝은 해에 가벼운 갖옷 뽐내네.
弛置樂自便 也復觀漁樵 멋대로 놓아두니 즐거워 편안한데 다시 몸소 고기 잡고 나무를 하네.
倀鬼役於虎 人或遭昏妖 박귀(璞鬼)가 범에게 부림 당하듯 사람도 간혹 요귀를 만난다네.
結髮喜玄覽 吉凶窮長消 머리 묶고 즐거이 사물을 살펴보면 길하고 흉한 분별 모두 스러지리.
椎樸謝外飾 木朽安可彫 순박하게 겉치장도 마다하나니 나무가 썩으면 무엇을 새기랴.
擧世好趨競 與我不相要 온 세상은 쫓아 다툼 좋아 하여서 나와는 서로 맞지를 않네.
詩書資發塚 言語徒譊譊 시서(詩書)는 배워봤자 무덤 파는 구실되고 언어도 한갖 싸움을 낼 뿐.
固窮不失道 古人已寂廖 진실로 궁해도 도()는 잃지 않으리라 옛사람 이미 아득하지만.
惑哉內熱子 心裏長如焦 어리석다 마음을 졸이는 사람 마음 속 언제나 애가 타리니.

 

늘그막의 심경을 술회한 전 24구의 긴 시이다. 어지러운 세상, 사람들은 그저 번드르한 갖옷만을 뽐내고,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귀신에게 씌운 듯 잊은 지 오래다. 맹자(孟子)』 「진심(盡心)에서는 군자의 삶의 자세를 궁해도 의()를 잃지 않고, 현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공연한 허욕에 사로잡혀 속만 태우고 있질 않은가. 위 시는 이렇듯 고요히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담담한 시선이 독자를 명징한 일깨움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

 

이제 각 구절들 속에 감추어진 비밀, 즉 이합(離合)의 퍼즐을 풀어보기로 하자. 퍼즐의 열쇠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각 구절의 첫 자에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각 구절의 첫 자만을 네 구씩 나누어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徂且聽耳 干二沓白 弛也璞人 結吉椎木 擧與詩言 固古惑心

 

 

이제 각 네 글자의 묶음을 찬찬히 살펴보자. 앞서 이합체(離合體)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보면 첫 구 ()’에서 앞쪽 ()’만을 취하고, 남은 ()’2구의 첫 자로 쓴다. 다시 3()’에서 뒤쪽 ()’을 취하고 남은 ()’4구의 첫자가 된다. 그래서 떼어낸 두 글자 ()’()’을 합치면 ()’자가 된다. 같은 원리로 5구에서 8구의 조합에서 ()’를 얻을 수 있고, 9구에서 12구까지로 ()’자가 만들어진다. 13구에서 16구까지는 ()’자를, 17구에서 20구까지는 ()’자를 만들 수 있다. 21구에서 24구까지에서 ()’자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는 덕수(德水) 장유(張維) 지국(持國)’이라는 여섯 글자이다. 덕수(德水)는 장유(張維)의 본관이고, 지국(持國)은 그의 자()이니, 결국 위 시에 감추어둔 이합자(離合字)가 지시하는 바는 즉 시인 자신인 셈이다. 시인이 말하려 한 것도 바로 의 처세관에 대한 피력이었다.

 

이렇듯 정격의 이합체(離合體) ()1구 첫 글자의 앞쪽 반과, 3구 첫 글자의 뒤쪽 반을 떼어 합하고, 떼고 남은 나머지 반은 각각 24구의 첫 글자로 써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 규칙이다. 이 퍼즐을 풀어 얻은 글자가 바로 그 시의 제목이 된다. 얼마나 놀라운 언어의 유희인가. 말하자면 이합체(離合體) 한시는 각 구의 첫 글자를 거의 미리 정해 놓고 시를 짓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언어 운용상의 제한과 어려움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위 장유(張維)의 시를 보면 표면적으로는 그런 제한을 받은 흔적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이밖에도 기묘한 잡체시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시들 속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마치 떡 주무르듯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옛 시인들의 풍류가 거나하다. 장난은 장난이되 격조를 잃지는 않았던 것이 잡체시를 지었던 고인들의 마음가짐이었다. 이런 창작을 접하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이같이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프로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오늘날에 있어 잡체시의 의미는 무엇일까? 부단한 언어의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織造)가 보여주는 현란한 아름다움, 잡체시는 단순히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오늘의 시단에 던지고 있는 듯도 싶다. 또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형태시들이 기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상은 이렇듯 돌고 도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

목차

1. 빈 칸 채우기, 수시ㆍ팔음가ㆍ약명체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3. 파자놀음과 석자시

4. 이합체와 문자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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