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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2. 눈물이 석 줄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7.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 2. 눈물이 석 줄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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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눈물이 석 줄

 

 

한시의 어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처럼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모순되고 복잡한 양태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규정하는 제반 사회조건에 길들여져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희극적 양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결과 시는 진지성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희작화(戱作化)의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전의 시화(詩話)에도 희작의 양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부터 김삿갓의 시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 파격의 희작시들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집단적 양상을 띄고 등장하는 것은 주목되는 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희작시의 작가들이 창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시정신은 탈중심주의, 탈이데올로기의 현대 해체시가 표방하고 있는 세계와 긴밀하게 맞닿아 았다. 비시적(非詩的) 대상의 시화를 통해 이미 용도 폐기되어버린 공허한 언어의 일상성을 파괴하고 당대 현실의 삶에 뿌리 내림으로써 이들은 구체성과 정직성을 획득하고 있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전통적 시양식에 대한 전면적이고 과격한 파괴를 통해 관습적 시관에 도전장을 던졌다면, 김삿갓을 비롯한 일군의 시인들은 전통 한시의 기교 지상주의적 관념 시단에 대해 비아냥거림과 조소의 태도를 통해 야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어수신화(禦睡新話)란 책에 실려 있는 17자시는 바로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이 책에는 졸음을 단번에 씻어가 줄 수 있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말하자면 당대의 개그 소화집(笑話集)인 셈이다. 17자 시는 세 수의 연작이다.

 

어느 해 가뭄이 몹시 심했다. 원님이 단을 쌓아 놓고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 재()를 올리는 곳이 기생집 근처였다. 말이 기우제이지, 원님은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한 선비가 그 꼴을 보고 시를 지었다.

 

太守親祈雨 精誠貫人骨 원님이 몸소 비를 비는데 그정성 뼈에 사무치더라.
夜半推窓看 明月 한밤중에 창을 열고 내다보니 밝은 달.

 

정성을 다해 드려도 시원찮을 기우제를 온통 잿밥에 마음이 쏠려 지냈으니, 기우제에 대한 하늘의 응답은 명월(明月)이었다. 원님이 이를 듣고 대로하여 선비를 매질하였다. 곤장을 실컷 맞고 나온 선비가 또 가만 있지 못하고, 근질대는 입을 놀렸겠다.

 

作詩十七字 受笞二十八 열 일곱자의 시를 지었다가 곤장 스물 여덟 대를 맞았네.
若作萬言疏 必殺 만약 만언의 상소를 지었더라면 죽었을 거야.

 

원님은 한층 격노하여 그를 멀리 귀양 보냈다. 떠나는 날 그 외삼촌이 술과 안주를 차려 전송을 해 주었다. 그 정성이 느꺼워 선비는 다시 붓을 들었다.

 

斜陽楓岸路 舅氏送我情 저물녁 단풍든 언덕 길에서 나를 전송하던 외삼촌의 마음.
相垂離別淚 三行 서로 떨구는 이별의 눈물은 석 줄.

 

두 사람이 석 줄의 눈물을 흘렸다 함은 무슨 뜻인가? 선비의 장인이 애꾸였던 것이다. 일종의 말장난인데, 4구를 다섯 자로 맞추지 못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시의 형식성을 파괴했다. 단 두 글자를 도드라지게 배치해서 마지막 반전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17자 시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의 작품이 아닌 중국 명나라 때 무명씨의 작이다. 추수섭필(秋水涉筆)에 이 시가 실려 있다. 대개 두 가지 줄거리를 가진 5수의 열일곱 자 시를 하나의 서사로 꾸며 어수신화에 변개(變改) 수용했다. 글자의 출입도 상당하다.

 

 

조선후기 어수신화(禦睡新話)란 책에는 16자 시도 실려 있다.

 

月上柳梢頭 人約黃昏後 달님이 버들가지 끝에 떠오니 해진 뒤에 만나기로 약속합시다.
父母俱睡熟 偸 부모님 모두 곤히 잠들면 몰래.

 

아쉬운 데이트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 가버려 어느덧 달이 늘어진 버들잎 새로 떠올랐다. 그러나 뜨거운 청춘 남녀는 그것으로 만남을 끝내기엔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들통 나지 않게 한밤중에 다시 만나 밀회를 나누자는 약속을 주고받는 것이다.

 

意在不言中 低頭丢眼風 마음은 말없는 가운데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웃음 짓네.
今日來不得 紅 오늘 오지 못하게 되면 난 몰라.

 

다정한 님의 소곤거림에 그녀는 더욱 두근대는 가슴을 달랠 길 없었다. 혹시 부모님이 늦게 주무셔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면 어떻게 하나. 벌써 그녀의 두 볼은 붉게 물들고 말았다.

 

대개 이런 시들은 형식미의 굳건함을 고수하던 전통 한시에 대해 풍자와 해학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의 희화화 뿐 아니라 형식도 더불어 와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2. 눈물이 석 줄

3. 김삿갓은 없다

4.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5. 한시 최후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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