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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10. 문에 기댄 사람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10. 문에 기댄 사람은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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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문에 기댄 사람은

 

 

이러한 외에 고사(故事)를 모르고 축자역(逐字譯)을 하는 데서 오는 오역(誤譯)은 연구자들 사이에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다.

 

권필(權韠)이 중국 사신을 접빈(接賓)하러 의주(義州)에 갔다가 겨울을 나며 몇 달을 머물 때에 형 권겹(權韐)이 멀리 그곳까지 아우를 찾아 왔다. 감격의 상봉을 한 형제가 겨우 감정을 추스린 뒤 아우는 이렇게 그 심경을 읊었다.

 

京口分離後 音書久杳茫 서울서 손 나누고 헤어진 뒤로 오래도록 소식도 아득했었네.
相思今幾月 玆會却殊方 서로를 그리기 몇 달이던가 더욱이 낯선 땅서 이리 만났네.
雪裡生春色 天涯似故鄕 눈 속에도 봄 빛은 피어나거니 하늘 가도 고향인양 포근하구나.
仍懷倚門望 喜極輒悲傷 인하여 문 기대어 바라보자니 기쁨은 스러지고 구슬퍼지네.

 

필자의 번역이지만, 7구만은 한 연구서의 번역을 좇은 것이다. 이 시의 묘처는 78구에 있는데 이렇게 번역해서는 전혀 의미가 살지 않을 뿐 아니라 엉뚱한 소리가 되고 만다. 형제가 오랜만에, 그것도 일생에 한 번 갈까말까 한 북쪽 변방 의주에서 만나고 보니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았으랴.

 

7구의 의문망(倚門望)’은 고사가 있는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요치(婟齒)의 난에 왕손가(王孫賈)가 제() 민왕(箒王)을 따르다 왕의 소재를 잃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오면 나는 대문에 기대어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 문에 기대어 기다렸다. 네가 이제 임금을 섬기다가 임금이 도망가셨는데 그 곳을 알지 못하니 네가 어찌하여 돌아왔느냐.”고 하여 자식을 다시 내몰았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어버이날 노래 2절에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서는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이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그러니까 위 시의 7구는 문득 문기대어 기다리실 어머니를 생각하니의 뜻이 된다. 우리 형제가 먼 변방에서 이리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으나, 멀리 서울에서 우리 형제 걱정에 매일 대문간에 기대어 서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그만 기쁘던 마음은 간데없고 구슬픈 생각에 목이 메인다는 이야기다. 그저 위와 같이 번역해서야 도무지 시의 맛을 알 수가 없다. 대개 이런 오류는 기존의 번역서나 연구서에서 이루 헤일 수 없이 많다. 필자 또한 낯 뜨거운 오역으로 송연(悚然)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모두 한문이 갖는 언어의 함축과 시인이 행간에 감춰둔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때로 무정견(無定見), 몰안목(沒眼目)으로 인한 오독(誤讀)은 읽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요즘 시집에 혹처럼 붙어 다니는 해설에서도 이런 오독(誤讀)과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해설일수록 주례사에 가까운 덕담이나, 개인적 친분관계를 수다스럽게 늘어놓기 일쑤이다. 꼼꼼한 독시(讀詩)의 과정 없이 무성의한 치레나 선입견에 의한 오독(誤讀)으로 일관하는 이런 해설은 오히려 독자의 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해설자의 명망이 시인의 레벨을 결정지워 주는 것이 아닐진대 이런 해설이 꼭 필요한지 의아할 때가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迷路) 위에 숨겨 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誤讀)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또 코드를 찾아 나서고.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용

목차

1.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2. 오랑캐 땅의 화초

3. 개가 짖는 이유

4. 무지개가 뜬 까닭

5. 백발삼천장

6. 뱃 속 아이의 정체

7. 문에 기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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