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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정경론 - 3. 이정입경 경종정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정경론 - 3. 이정입경 경종정출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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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정입경 경종정출(移情入景, 景從情出)

 

 

술 취해 수창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는 방식

 

심웅(沈雄)고금사화(古今詞話)에서 ()은 경() 때문에 그윽해지니 정()이 두드러지면 의경이 노출되고, ()은 정()으로 인해 아름다운데 경()만 있게 되면 엉기어 막히고 만다고 하였고, 왕창령(王昌齡)시격(詩格)에서 시가 뜻만 말해 버린다면 맑지 않아 맛이 없고, ()만 말해도 또한 맛이 없다. 일이란 모름지기 경()과 의()가 서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좋다.”고 하였다.

 

昨日南山飮 君詩醉未酬 간밤 남산서 술 마시다가 술 취해 그대 시에 화답 못했네.
覺來花在手 蛺蝶伴人愁 깨고 보니 손에는 꽃이 있구나 나비만이 나마냥 근심 겹구나.

 

다시 백광훈(白光勳)의 시 기량천유(寄梁天維)한 수를 더 보기로 하자. 술을 깨고 보니 간밤 늦도록 술 마신 생각, 옆에는 벗의 시가 덩그라니 놓여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술을 못 이겨 드러누운 나를 두고 벗은 그만 살그머니 돌아갔구나. 벗의 시에 수창(酬唱)치도 못하고 취해 누운 미안한 마음으로 시상을 먼저 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는 꽃가지가 쥐어 있다. 어찌된 걸까. 벗이 내 손에 쥐어주고 간 것일까. 꺾인 꽃가지의 향기를 탐해 나비는 내 손 주위를 어정거려 보지만 뿌리를 떠난 꽃은 벌써 시들하다. 섭섭한 친구, 그렇게 가버리기는. 나비가 시든 꽃잎에 묻어가는 봄을 서운해 하듯, 지난밤의 흐뭇함이 못내 아쉽다. 덜 깬 술을 도리질하며 벗이 남긴 시에 차운하여 돌아간 벗에게 부친다.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본다. 먼저 정()을 드러낸 뒤, 시든 꽃 주위를 서성이는 나비에게 그 정을 투사하여 물아(物我)가 하나 되게 착색하였다.

 

 

 

한가로운 늘그막 일상을 담다

 

爭名爭利意何如 명예 이익 다퉈보니 어떠하던가
投老山林計未疎 늙어 산림(山林) 깃드니 뜻 성글지 않도다.
雀噪荒堦人斷絶 거친 뜰 참새 짖고 사람은 없어
竹窓斜日臥看書 대창 빗긴 해에 누워 책을 보노라.

 

이민성(李民宬)재거즉사(齋居卽事)이다. 명리(名利)를 다투는 싸움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늙은 몸을 산림에 투탁하니 이 흡족치 아니한가. 1.2구를 정으로 먼저 열었다. 종일 가도 사람의 기척이 없고 보니 참새는 섬돌까지 와서 짹짹대며 한바탕 운동회를 열었다. 죽창(竹窓)에 해가 빗기니 또 하루해가 간다. 날이 가건 달이 가건 주인은 누워 책을 본다. 기약을 두지 않은 독서(讀書)이니 그저 간서(看書)’라 했다.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펼쳐 있으니까 본다는 뜻이다. 속세의 아웅다웅하던 삶이란 인적 끊긴 마당에서 찧고 까부는 참새떼와 무에 다른가. 명리(名利)를 향한 마음도 죽창(竹窓)에 빗겨드는 서양(斜陽)인양 시들하다.

 

 

 

비 내릴 때의 연잎에 빗대 인간의 욕망을 얘기하다

 

貯椒八百斛 千載笑其愚 팔백 곡 후추를 쌓아 두다니 어리석음 천년 두고 비웃는 도다.
如何碧玉斗 竟日量明珠 어이하여 벽옥으로 됫박을 삼아 종일토록 명주 구슬 되고 또 되나.

 

최해(崔瀣)우하(雨荷)이다. 당나라 때 원재(元載)는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아 축재하였다. 죽은 뒤 창고를 뒤져 보니 후추가 팔백 곡에 종유(鐘乳)가 오백 량이나 나왔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몰수하였다. 얼마나 살겠다고 후추를 팔백 곡이나 쌓아 두었더란 말인가? 하기야 이즈음 나라꼴이 멀리 당나라 때를 탓할 겨를도 없지만 말이다.

 

처음 1.2구에서 원재(元載)의 고사를 엉뚱하게 들이민 것은 34구를 이끌기 위해서이다. 그 원재를 능가하는 탐욕이 지금 시인의 마당에 있는 것이다. 벽옥으로 만든 됫박으로 하루 종일 명주(明珠)를 채웠다간 들이붓고 채웠다간 들이붓기를 계속하는 탐욕. ‘벽옥두(碧玉斗)’는 다름 아닌 푸른 연잎이다. 무수한 빗방울이 맑은 구슬로 되어 넓고 푸른 연잎 가운데로 덱데구르 굴러 떨어진다. 한참을 모아 묵직해지면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이 기우뚱 연못 위로 말구슬을 쏟아 붓는다. 구슬을 되는 됫박은 하나 둘이 아니다. 수면 위로 나온 연잎마다 서로 뒤질세라 됫박질이 한창이다. 종일 비는 내리고 이제 연못은 그렇게 주워 담은 구슬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천공(天公)의 탐욕은 비가 그치기 전에는 좀체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원재가 무색한 아름다운 탐욕이 아닌가.

 

 

명주(明珠) 사만곡(四萬斛)을 연잎에 다 받아서

담는 듯 되는 듯 어디로 보내는다

헌사한 물방울란 어위 계워 하는다

 

 

위는 정철(鄭澈)의 시조다. 그는 분명히 최해(崔瀣)의 위 시를 보았을 것이다.

 

 

 

동화 같은 겨울밤의 풍경

 

天寒宿古店 歸客夜心孤 찬 날씨에 해묵은 주막에 드니 나그네 밤 마음 외로웁구나.
滅燭窓明雪 燃茶枕近爐 불 꺼도 영창엔 눈빛이 밝고 베갯머리 화로에선 차가 끓는다.
深更知櫪馬 細事聞鄕奴 마구간 말소리에 밤 깊음 알고 이런 저런 일들은 향노(鄕奴)게 듣네.
月落鷄鳴後 悠悠又上途 달 지고 첫닭이 소리쳐 운 뒤 다시금 유유히 길에 오른다.

 

신광수(申光洙)숙미륵당(宿彌勒堂)이란 작품이다. 북풍한설(北風寒雪)과 함께 한 하루 노정을 마치고 저물녘 꽁꽁 언 몸으로 옛 주막을 찾아 들었다. 이윽고 밤이 오고, 허기를 채운 뒤 여관방에 앉았자니 을씨년스런 마음 가눌 길 없다. 외롭다는 느낌이 절절하게 밀려든다. 잠을 청하려 등불을 끈다. 그러나 외로움은 꺼진 등불과 함께 사위어지지 않고, 창밖에 달빛 받아 환한 눈빛으로 도로 환해진다. 윗목 화로의 주전자에선 그리움처럼 모락모락 김이 솟고. 발갛게 불씨를 간직한 방안의 화로, 하얗게 비치는 창밖의 눈빛,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마구간의 말도 연신 발을 구른다. 녀석은 지금 추운 것이다. 배고프니 여물을 더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게다. 그는 아예 잠 잘 일을 접어두고 향노(鄕奴)를 불러다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세상일이야 언제나 그렇지. 두런두런 거리는 중에 새벽달이 지고 이웃 닭은 아침을 운다. 안장을 조여매고 다시 길을 떠난다. 여명은 아직도 트지 않았다. 처음 12구의 정()이 독한 고독의 그림자를 이어지는 경() 속에 배어들게 하여, 동화 같은 겨울밤을 애잔하게 물들였다.

 

 

 

 

인용

목차

1. 가장자리가 없다

2. 정수경생 촉경생정(情隨景生, 觸景生情)

3. 이정입경 경종정출(移情入景, 景從情出)

4.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

5. 지수술경 정의자출(只須述景, 情意自出)

6. 즉정견경 정의핍진(卽情見景, 情意逼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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