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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2. 오랑캐 땅의 화초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2. 오랑캐 땅의 화초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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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랑캐 땅의 화초

 

 

이렇듯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Ambiguity)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애매와 모호가 아니라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모호성의 문제가 시학(詩學)의 관심사가 된 것은 영국의 언어학자 윌리엄 엠슨(William Empson, 1906~1984)모호성의 일곱 가지 유형이란 논문에서 시에서 모호성이 발생하는 7가지 유형을 소개하면서부터다. ‘ambiguity’라는 말은 두 길로 몰고 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시의 어휘나 구절들은 대개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 어려운 포용력과 융통성을 지닌 문맥을 형성한다. 특히 한시 언어에 있어 이러한 점은 놀라울 정도로 잘 발휘된다. 한편의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시킨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 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 왕소군(王昭君)은 절세의 미녀였다. 원제는 궁녀가 많아 일일이 얼굴을 볼 수 없었으므로, 화공을 시켜 그녀들의 얼굴을 그려 바치게 하고는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낙점하였다. 궁녀들은 당시 궁중화가였던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면서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그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도도했던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으므로, 이에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몹시 추하게 그려 임금에게 보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에게는 한 번도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 나라는 역대로 흉노문제로 늘 골치를 썩였는데, 그때 마침 흉노왕 호한야(胡韓邪)가 한나라의 미녀로 왕비 삼을 것을 청하므로, 원제는 못생긴 왕소군(王昭君)을 그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막상 왕소군이 장차 오랑캐 땅으로 떠나려는 즈음, 왕이 그녀를 보니 여러 궁녀들 가운데 제일가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쓰지 않아 추하게 그려진 사정을 뒤늦게 안 왕은, 격노하여 모연수를 죽여 버렸다. 마침내 그녀는 쓸쓸히 흉노 땅에 들어가 마음에도 없는 오랑캐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가슴 아프고 슬픈 이야기는 역대 시인들에게 회자되어, 이백(李白)왕소군(王昭君)이란 시에서 그녀의 떠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왕소군 옥안장에 치마자락 스치며 말에 오르자 붉은 빰엔 눈물지네.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오늘 한나라 궁녀의 몸이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의 신세라.

 

졸지에 흉노의 땅에 와 흉노왕의 왕비가 된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답답함 속에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봄을 맞았다. 그 느낌을 옛 시인은 시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달력은 꽃 피는 시절이 벌써 지났건만 삭막한 북방에는 꽃이 피질 않으니 봄은 봄이로되 봄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 시를 달리 새겨 다음과 같이 보기도 한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오랑캐 땅이라고 한들 왜 화초가 없겠는가. 다만 마음을 부치지 못하는 이역 땅에서 꽃을 대하니, 봄은 왔어도 봄날의 설레임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 어떻게 읽는 것이 옳을까? 아마도 후자로 읽는 것이 기막힌 그녀의 심정을 더 잘 나타낼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구절은 80년 봄 당시, 모 정치가가 군부의 서슬 푸른 위세를 빗대어 말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던 사연 많은 구절이다. 뒷날 그녀는 죽어 흉노의 땅에 묻히었는데, 겨울이 되어 흉노 땅의 풀이 모두 시들었어도 그녀 무덤의 풀만은 늘 푸르렀다 하여 그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일이다. 어떤 원님이 향시(鄕試)를 보는데, 시제(詩題)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로 내걸었다. 응시한 자들은 모두 왕소군(王昭君)의 고사를 들어 장광설을 늘어놓았는데, 막상 장원에 뽑힌 작품은 덩그러니 제목인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를 네 번 반복해서 쓴 한 서생의 작품이었다.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 하나 오랑캐 땅엔들 화초가 없을까?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만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도다.

 

어떤가? 같은 글자의 풀이가 모두 제각금이다. 한문 해석의 모호성을 말할 때 인용하곤 하는 이야기이다. 위 시는 흔히 김삿갓의 시로 둔갑하여 알려져 있다.

 

 

 

 

인용

목차

1.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2. 오랑캐 땅의 화초

3. 개가 짖는 이유

4. 무지개가 뜬 까닭

5. 백발삼천장

6. 뱃 속 아이의 정체

7. 문에 기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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