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수경생 촉경생정(情隨景生, 觸景生情)
기다리는 그대 오지 않는 봄날에
양재(楊載)는 『시법가수(詩法家數)』에서 “경(景)을 묘사함은 경(景) 가운데 뜻을 머금고, 일 가운데 경(景)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밀하고 청담(淸淡)해야지, 진부하거나 교묘함을 꺼린다. 뜻을 묘사함은 뜻 가운데 경(景)을 담고, 의론함을 밝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비경우(費經虞)는 『아론(雅論)』에서 “시는 정(情)을 일으킴을 귀히 여기나, 편편마다 정(情)을 마구 늘어놓으면 마침내 방탄(放誕)하게 된다. 시는 경(景)이 핍진함을 귀히 여기나, 작품마다 경(景)만을 펼쳐 놓으면 문득 조잡하고 천박해진다”고 했다.
岸有垂楊山有花 | 산에는 꽃 피고 언덕엔 수양버들 |
離懷悄悄獨長嗟 |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숨 내쉰다. |
强扶藜杖出門望 | 지팡이 굳이 짚고 문 나서 봐도 |
之子不來春日斜 |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저문다. |
송희갑(宋希甲)의 「춘일대인(春日待人)」이다. 봄이 왔다. 언덕 수양버들엔 파르라니 물이 오르고, 산에는 붉게 꽃이 피었다. 봄이 왔구나. 경물을 바라보던 시인은 물오른 버들가지와 붉게 핀 꽃을 보곤 먼 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사물에 정이 접촉하는 순간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움이 먼저였을까, 꽃을 보는 설레임이 먼저였을까?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봄을 앓아누웠던 몸을 추스려 대문께로 나선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딱히 누구랄 것도 없는 막막한 기다림이다. 그 심정 아랑곳 않고 봄날의 하루해는 뉘엿 기울고 있다. 그리움처럼 그림자가 길어진다.
위 시를 지은 송희갑(宋希甲)은 일찍이 권필(權韠)의 명성을 사모하여 강화까지 찾아가 10년을 기약하고 시공부를 시작했었다. 뒤에 스승이 전염병에 걸려 수십 일을 사경을 헤매일 때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다. 땔나무와 집안일도 그가 도맡아 했다. 충직한 그를 권필도 각별히 아꼈다.
권필이 한 번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천하를 봄이 넓지 못하면 시가 또한 국한되는 바가 된다. 나는 이미 할 수 없어 한스럽지만, 너의 근골(筋骨)로는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매우 엄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어두운 길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 있는 곳을 만나거든 수영을 하여 몰래 건넌 뒤라야 도달할 수 있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또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행만리로(行萬里路)의 강산지조(江山之助)가 있어야만 비로소 시가 얽매임 없이 통쾌해진다. 시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라면 불법월경도 마다할 것 없다고 스승은 제자를 부추기고, 순진한 제자는 좋은 시를 쓸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에 허구한 날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마침내 바다의 짠 기운에 기혈이 삭아 조요(早夭)하고 말았다. 송시열(宋時烈)의 「여남운경(與南雲卿)」이란 편지에 보이는 사연이다. 그깟 시가 무어라고 불법월경도 마다 않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애를 썼더란 말인가.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딱한 노릇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토록 도탑던 사제(師弟)의 정과 시를 향한 맹목적인 열의로 끈끈하던 그제가 그리운 오늘이다.
옛날 그곳에 오니 우울해지네
危磴臨江高復低 | 강가 비탈 가파라 높고 낮은데 |
行人過盡水禽啼 | 행인이 가고나자 물새가 우네. |
世間憂樂何時了 | 세간의 근심 슬픔 언제 다하리 |
匹馬重來意自迷 | 필마로 다시 오매 마음 심란타. |
이현(李袨)의 「과강천구장(過江川舊莊)」이란 작품이다. 가파르다 싶으면 문득 낮아지는 산비탈, 낯선 침입자가 다 지난 뒤에야 물새는 비로소 다시 운다. 이 모양을 보다가 시인은 갑자기 세간(世間)의 우락(憂樂)을 떠올렸다. 근심과 즐거움이라 했지만 낙(樂)은 그저 갖다 붙인 말일 뿐이다. 세상살이 지고 가는 근심이란 가파른가 싶으면 평탄해지는 비탈길과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 옆으로 시간의 강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예기치 않게 찾아드는 근심 걱정 앞에 조바심 하기는 예고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움츠리는 물새와 방불치 아니한가. 1.2구의 경은 사실 무심히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일 뿐이었는데, 시인은 여기에 3.4구의 정을 삼투함으로써 절묘한 의경을 창출하였다. 다시 제목을 환기하면 옛 놀던 자취는 그대로인데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나 홀로 쓸쓸하다. 경(景)이 먼저고 정(情)은 나중이다.
울적할 때 환하게 떠오르는 해
舟中晨起坐 相對是靑燈 | 새벽녘 배 위에 일어나서는 푸른 등불 마주 보며 앉아 있자니, |
鷄犬知村近 星河驗水澄 | 닭 울음에 개 짖어 마을 가깝고 은하수 비취니 물이 맑구나. |
隨身唯老病 屈指少親朋 | 늙음과 질병만이 이 몸 따르고 손꼽아도 친구는 몇이 안 되네. |
世事又撩我 東方紅日昇 | 세상 일로 마음은 심란만 한데 동녘에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
홍귀달(洪貴達)의 「광진주중조기(廣津舟中早起)」란 작품이다. 떠도는 것이 인생살이라지만 그는 무슨 일로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웠을까. 축축하고 서늘한 서리 새벽에 일어나니 밤은 아직도 깊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질까 싶어 등불과 마주 앉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가물거리는 등불을 보다가 시인은 허망한 느낌이 일었다. 2구의 ‘상대(相對)’란 말에 그 뼈저린 허전함을 담았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 덩달아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인가가 멀지 않음을 알겠다. 강물엔 은하수가 그대로 떠 있다. 참 맑은 물이다. 마을을 가까이 두고도 그는 배를 그리로 댈 생각 없이 새벽 맑은 강에 어린 별빛과 푸르스름한 등불만을 바라보며 오두마니 앉아 있다. 허균(許筠)은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처음 네 구를 두고 ‘추경심교(秋景甚巧)’ 즉 가을 경치 묘사가 기가 막히다는 평어(評語)를 남겼다.
가을 새벽의 해맑은 경(景)은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정(情)을 일으켰다. 돌아보면 이룬 것 없는 평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늙고 병든 고단한 몸뚱이뿐이다. 손꼽아 헤일 만한 벗도 없다. 가뜩이나 힘겨운데 세상일은 더하여 마음을 심란케 한다. 이때 동편 저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실망하지 말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위로하는 것 같다. 분명치 않게 몽롱하던 것들이 새벽 첫 빛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첫 4구를 경(景)으로 시상을 연 뒤, 다음 세 구로 정(情)을 받쳤다. 그리고는 끝구에서 다시 경(景)을 끌어와 의경을 반전하였으니, 앞뒤의 경으로 정을 감싸 안았다.
가녀린 꽃잎에 가닿은 마음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 간 밤 비 맞고서 꽃을 피우곤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누나. |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 슬프다 한해 봄날의 일이 비바람 가운데서 오고 가노매. |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이다. 1구와 2구는 다섯 글자가 정연한 대구를 이루었다. 꽃을 피운 것은 ‘작야우(昨夜雨)’이고, 꽃을 떨군 것은 ‘금조풍(今朝風)’이다. 간밤 비 맞고 핀 꽃이 아침 바람에 진흙탕 속에 잎을 떨구었으니, 겨우내 눈을 아끼고 망울을 부퍼 마침내 꽃피운 보람은 당초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시인은 이를 ‘가련(可憐)’이란 한 마디로 압축했고, 한 해 봄 일이 비바람 가운데 오간다 하여, 우리네 인생살이도 풍파 속에 덧없음을 보였다. 아름다운 자태를 선뵐 겨를도 없이, 가꾼 보람 허망하게 떨어진 꽃잎들이 세상에 어디 한 둘이겠는가? 바람은 언제나 딴 데서 불어오고 그 불공(不公)을 탓하기엔 꽃잎의 힘은 너무 가녀리다. 떨어진 꽃잎에 정(情)이 촉발되어 ‘일춘사(一春事)’가 ‘일생사(一生事)’로 확장되었다.
어둠이 찾아올 때 간절한 것
落葉鳴沙逕 寒流走亂山 | 낙엽이 답쌓인 명사(鳴沙) 길에서 찬 물은 어지런 산 달려가누나. |
獨行愁日暮 僧磬白雲間 | 나그넨 날 저묾이 근심겨운데 구름 저편 스님은 경쇠를 친다. |
백광훈(白光勳)의 「과보림사(過寶林寺)」이다. 가을의 찬 시내는 비죽 솟은 산들이 어지럽다고 쏜살같이 내달려 달아난다. 낙엽이 쌓인 모래사장은 모래의 사각이는 소리에 낙엽 밟는 소리를 곁들였다. 낙목귀근(落木歸根),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찾아 떠나가는데, 허허로운 가을 산길에 강물은 또 무엇이 바빠 저리 서두는가. 갈 데 없이 달려가는 시내를 바라보다 문득 나그네의 마음도 부산해진다. 하루해가 저무니 길 가는 나그네는 짙어오는 땅거미가 근심에 겹다. 오늘은 어디서 묵어갈 것인가. 반본환원(返本還元), 잎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듯 피곤한 몸을 길게 누일 안식의 자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때다. 두서없는 근심 속에 댕그렁 댕그렁 흰 구름 사이로 은은한 풍경소리를 들은 것은. 무얼 걱정하느냐고, 여기 절이 있다고, 와서 쉬어 가라고.
인용
1. 가장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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