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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4. 무지개가 뜬 까닭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4. 무지개가 뜬 까닭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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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무지개가 뜬 까닭

 

 

한시에서 모호성은 흔히 문장 성분이 생략되어 그 여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한다. 다음은 이달(李達)제김양송화첩(題金養松畵帖)이란 작품이다.

 

一行二行雁 萬點千點山 한 줄 두 줄 기러기 만 점 천 점 산.
三江七澤外 洞庭瀟湘間 삼강(三江) 칠택(七澤) 밖 동정(洞庭) 소상(瀟湘) 사이.

 

한마디로 번역을 거부하는 시다. 말이 번역이지 글자를 그대로 옮기고 보면 아무런 서술어 없이 그저 명사를 토막토막 이어 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독자를 당혹하게 한다. 화면에는 아득한 점으로 한 줄인지 두 줄인지도 분명치 않게 기러기 떼가 날고 있고, 그 너머로 만점인지 천점인지 이루 헤일 수도 없는 산들이 연이어 있다. 그들이 날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삼강(三江)과 칠택(七澤)의 바깥인가, 아니면 동정호(洞庭湖)와 소상강(瀟湘江)의 사이인가? 이렇게 풀이해 놓고 단어 사이 빈칸에 감춰둔 서술어를 채우면 이쯤 될 것이다.

 

一行二行雁 萬點千點山 한 줄인지 두 줄인지 기러기 날고 만 점인지 천 점인지 산도 많구나.
三江七澤外 洞庭瀟湘間 삼강칠택(三江七澤) 그 너머 어딘가 싶고 동정호(洞庭湖)와 소상강(瀟湘江)의 사이 같기도.

 

제화시(題畵詩)는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화의(畵意)에 시인의 의경(意境)을 얹는 것이다. 어떤 그림이었을까. 우선 화면 한 구석에 기러기 떼가 한 줄인지 두 줄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 아래로는 구름 너머로 소실되는 끝없는 연봉(連峯)들이 펼쳐져 있다. 산들의 사이에는 강물도 흐르고 호수도 떠있다. 그러나 거기가 정작 삼강(三江)인지 칠택(七澤)인지 아니면 그 밖인지, 동정호(洞庭湖)인지 소상강(瀟湘江)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쉽게 말하면 위 시는 이놈의 그림이 도대체 어디를 그려 놓았는지 가늠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실경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묘한 맛이 있다.

 

동요에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란 노랫말을 떠올리는 시경(詩境)이다. 아득한 산과 강 저 멀리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 ‘()’()’, 그리고 ()’()’으로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배열에 재치를 부렸고, ()’()’의 변화를 얹어서 이래저래 숫자의 묘미를 한껏 살린 작품이다. ‘일행(一行)’이행(二行)’의 사이에, ‘만점(萬點)’천점(千點)’의 사이에 시인이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의 안목에 달린 문제다.

 

京洛旅遊客 雲山何處家 서울을 떠도는 저 나그네야 구름 산 어디메가 그대 집이뇨.
疎煙生竹徑 細雨落藤花 엷은 안개 대숲길에 피어나오고 보슬비 등꽃 위로 떨어집니다.

 

역시 이달(李達)차윤서중운(次尹恕中韻)이란 작품이다. 1.2구의 개방형 언사는 서울을 떠도는 나그네에게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어지는 3.4구는 ! 저희 집은요.”하고 대답해야 할 대목이어서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시인은 뚱딴지 같이 대숲에선 엷은 안개가 피어나고, 보라빛 등꽃 위로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린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그는 지금 제 고향은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랍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시는 옳게 읽히지 않는다.

 

 

一鷺踏柳根 一鷺立水中 백로 한 마리 버들 뿌리 밟고 서 있고 백로 한 마리 물속에 그냥 서 있네.
山腹深靑天黑色 짙푸른 산 허리 캄캄한 하늘
無數白鷺飛翻空 무수한 백로가 솟구쳐 난다.
頑童騎牛亂溪水 아이가 소를 타고 시내를 첨벙대자
隔溪飛上美人虹 시내 저편 무지개는 날아 오르고.

 

박지원(朴趾源)도중사청(道中乍晴)이란 작품이다. 길을 가다가 잠깐 날이 개이고 무지개 뜨는 광경의 묘사이다. 두 마리 백로의 돌올한 묘사로 시상(詩想)을 열었다. 물가에도 백로, 물속에도 백로다. 산허리는 짙푸른데 하늘은 검은빛으로 잔뜩 흐렸다. 잔뜩 흐린 하늘과 푸르다 못해 검은 산빛은 조그만 백로의 흰 깃을 파묻을 듯 압도한다.

 

그러자 갑자기 한두 마리가 아닌 무수한 백로들이 허공을 번드치며 솟아오른다. 어둡던 하늘이, 우중충하던 산 허리가 온통 흰빛으로 차오른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는 소를 타고 시냇물을 첨벙대며 건너간다. 고요하고 팽팽하던 긴장은 일순에 깨지고, 시내 건너 저편으론 예쁜 무지개가 곱게 걸렸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가에 백로가 서 있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어두운데 철없는[]’ 꼬마 녀석이 소를 타고 시내를 첨벙대는 바람에 이 고요가 깨져 버렸다. 백로는 난데없는 침입자에 놀라 일제히 허공으로 번드쳐 날아올랐던 것이다. 검푸른 하늘로 날아오른 백로는 찌푸렸던 하늘을 환하게 했고, 그래서 강 저편에서는 무지개가 찬란히 걸린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백로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때와 맞추어 고개 들어 눈에 들어온 먼 하늘이 개어오기 시작했던 것일 뿐이다.

 

소 탄 아이의 첨벙대는 물장난이 백로를 놀라 깨웠고, 백로의 비상이 다시 날을 개이게 했으니, 무지개는 그 대답인 셈이다. 고요하던 풍경이 아연 생기를 되찾았다. 백로가 솟아올라 환해진 만큼 날이 잠깐 개었다는 발상이 바로 시다. 아이의 첨벙대는 물장난이 결국은 무지개를 띄웠으니, 자연이 인간과 만나 하나로 교감하는 현장이다. 왕국유(王國維)의 말을 빌면 불격(不隔), 즉 틈이 없다.

 

北岳高戌削 南山松黑色 북악은 창끝처럼 높이 솟았고 남산의 소나무는 검게 변했네.
隼過林木肅 鶴鳴昊天碧 송골매 지나가자 숲이 겁먹고 학 울음에 저 하늘은 새파래지네.

 

시의 제목은 극한(極寒)이다. 역시 박지원(朴趾源)의 작품이다. 어지간히 추운 날씨였던 모양이다. 멀리로 북악산(北岳山)은 매운 날씨에 창끝을 세운 듯 삐죽삐죽 솟아 있고, 맞은편 남산(南山)의 소나무는 파랗게 질리다 못해 숫제 검은 빛을 띠었다. 안 그래도 추워 움츠린 판에 송골매 한 마리가 숲 위를 선회하자 숲은 병아리 떼처럼 아연 움츠린다. 팽팽하다. 그 팽팽한 긴장을 깨뜨리며 학은 청아한 목을 빼어 허공을 운다. 그 소리에 하늘은 얼음장에 챙하고 금이 가듯 더 푸르러진다. 턱이 덜덜 떨리는 추위이다.

 

스무 글자 어디에도 춥다는 말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그저 경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제목마저 없었다면 무슨 이런 시가 있느냐고 했을 법하다. 시인은 제목에서 몹시 추운 날씨라고 분위기를 잡아 놓고서, 정작 시 속에서는 추위에 대한 묘사를 예상하던 독자의 기대를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여기에서 의미의 단절이 생긴다. 단절을 채워 제목과 본문을 잇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 것이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붓이 아닌가. 미당이 동천(冬天)에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 위에 올려다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무서운 매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빗기어 가네.”라 했는데, 어쩌면 시인의 솜씨가 이렇듯 암합(暗合)하고 있는가.

 

 

 

 

인용

목차

1.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2. 오랑캐 땅의 화초

3. 개가 짖는 이유

4. 무지개가 뜬 까닭

5. 백발삼천장

6. 뱃 속 아이의 정체

7. 문에 기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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