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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3. 개가 짖는 이유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 3. 개가 짖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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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개가 짖는 이유

 

 

해 그림자와 달 그림자

 

老身倦馬河堤永 늙은 몸 지친 말 방죽은 길어
踏盡黃楡綠槐影 느릅나무 지나가자 회나무 그림자라.

 

늙은 몸으로 지친 말을 끌고 가던 나그네는 끝없이 방죽으로 이어진 길이 고단하기만 했다. 한동안 길옆으로 느릅나무 행렬이 줄을 잇더니, 느릅나무 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짙푸른 회나무 그림자가 나그네 위로 드리운다. 가도 가도 방죽 길은 끝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송나라 때 유송(劉憽)소동파(蘇東坡)에게 물었다.

이것이 그대의 시가 아닌가?”

그렇네만은.”

그렇다면 이것은 해의 그림자인가, 달의 그림자인가?”

한퇴지(韓退之)성남연구(城南聯句)의 첫 구에 쓴 대 그림자에 금가루 부서지고[竹影金朠碎]’에서도 언제 해의 그림자니 달의 그림자니 말하였던가?”

 

둘은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지친 말의 터덜대는 걸음 위로 비쳐들던 그림자는 저물녘 석양의 그림자라야 옳은가, 아니면 해진 뒤 잎새 사이로 스며든 달그림자라야 좋을까. 소동파(蘇東坡)는 무어라고 말해주는 대신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말았다. 설사 둘 다라면 어떠랴. 도산청화(道山淸話)에 나오는 이야기다.

 

 

 

빗소리와 낙엽소리

 

또 당() 나라 때 무가상인(無可上人)의 시 추기종형가도(秋寄從兄賈島)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聽雨寒更盡 開門落葉深 빗소리 듣노라 찬 밤 새우고 문 열자 낙엽만 수북 쌓였네.

 

그렇다면 그가 밤새 들은 소리는 빗소리였을까, 아니면 낙엽 지는 소리였을까? 빗소리였다면 그 비를 맞고 나무는 제 잎을 죄다 떨군 것이겠으나, 앞서도 소개한 바 있던 송강(松江)산사야음(山寺夜吟)을 떠올린다면 아무래도 낙엽 지는 소리를 착각한 것으로 봄이 더 낫겠다. 가을 날 아침 밤새 내린 비로 땅이 온통 추적추적할 것으로 생각하고 문을 열었을 때 낙엽만 잔뜩 쌓여 있음을 확인하는 무연함이라니.

 

 

 

달과 개

 

조선조의 문인 이경전(李慶全)9살 때 일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산해(李山海)가 손주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눈앞의 풍경을 읊게 하였다.

 

一犬吠二犬吠 첫째 개가 짖어대자 둘째 개가 짖어대네.
三犬亦隨吠 셋째 개도 따라 짖으니
人乎虎乎風聲乎 사람일까, 범일까, 바람 소릴까?
童言山月正如燭 산달은 촛불처럼 환히 밝고요
半庭唯有鳴寒梧 뜨락에는 오동잎새 소리뿐예요.

 

가을밤 산골 마을의 고즈넉한 광경이다. 한 마리가 짖어대자 동네 개가 모두 짖는다. 무슨 일일까? 뉘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는가, 아니면 범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바람 소리에 놀라 저리 짖는가? 바깥 좀 내다보라는 어른 말씀에 꼬맹이의 대답이 맹랑하다. 산달이 촛불처럼 환히 밝다는 말씀이다. 뜨락의 오동 잎새가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뿐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온 것도 범이 온 것도, 그렇다고 세찬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니, 그저 동네 개들은 달빛을 보며 저리 짖어 대고 있었던 것이다. 개들은 환한 달밤이면 제 몸을 비비꼬며 달빛을 보며 컹컹 짖어댄다. 한편 시인은 오동잎이 바람에 바스락대는 소리가 자꾸만 멀리서 신발을 끌며 걸어오는 예리성(曳履聲)’으로만 들려, 누가 오는가 싶어 온 동네 개가 저리 짖어대는가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결코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여운을 즐기려는 까닭이다. 소화시평(小華詩評)에 실려 있다.

 

천금(千錦)의 시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뎃 개 짖어 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뎌 개야 공산(空山) 잠든 달을 즈져 므삼하리오.

 

 

의경(意境)이 한 솜씨에서 나온 것만 같다.

 

萬事悠悠一笑揮 온갖 일 유유하게 한 웃음에 부쳐두고
草堂春雨掩松扉 초당 봄 비 속에 사립을 닫아 거네.
生憎簾外新歸燕 얄밉구나 주렴 밖 강남 갔던 제비야
似向閑人說是非 한가한 사람더러 시비(是非)를 말하다니.

 

이식(李植)영신연(咏新燕)이란 작품이다. 세상일을 한 웃음에 부쳐두고 봄 비 속에 사립마저 닫아걸었다. 야인(野人)의 안온한 삶 속에도 계절의 섭리는 어김없이 찾아들어, 강남 갔던 제비들은 봄비에 몸을 푼 진흙을 물어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느라 부산스럽다. 4구가 약간 의아할 것이다. 제비가 무슨 시비(是非)를 말했더란 말인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그 소리를, 사립을 닫아건 것만으로도 시원치 않아 발을 치고 들어앉은 시인은 시시비비(是是非非) 시시비비(是是非非) 쯤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염결(廉潔)을 향한 자의식도 이쯤되면 지나치다 하겠지만, 새소리의 음사(音似)로 부세(浮世)의 작태(作態)에 오불관언(吾不關焉) 하겠단 주제를 담아내는 재치는 대가(大家)의 기림이 아깝지 않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함, 이것이 아는 것이니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 한 구절이 있다. 원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꼭 제비가 지지배배 우는 소리와 비슷한 지라, 예전에는 제비가 논어(論語)를 안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이렇듯 모호성은 문화적 교양이나 문학 관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즉각적으로 손뼉을 터져 나왔을 대목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장승업(張承業),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19세기, 123.4X31cm, 선문대박물관.

저 개야, 짖지 마라. 달빛 환한 밤마다 동네 개들이 다 짖는다. 넓은 오동잎에 가린 달빛에 온 동네가 시끄럽다. 옛 그림의 친숙한 소재 가운데 하나다.

 

 

인용

목차

1.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2. 오랑캐 땅의 화초

3. 개가 짖는 이유

4. 무지개가 뜬 까닭

5. 백발삼천장

6. 뱃 속 아이의 정체

7. 문에 기댄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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