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한시(漢詩) (379)
건빵이랑 놀자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이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으로 불리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大唐開鴻業 巍嵬皇䣭昌 훌륭한 당(唐)나라 큰 기업 여니 높디높은 천자님의 교화(敎化) 크게 이루어지도다.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융복(戎服) 입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문교(文敎)를 닦아 백왕(百王)을 계승하였네. 統天崇雨施 物理體含章 하늘 뜻 이어서 혜택 내리고 만물을 다스림에 감춘 덕 드러나네.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日月)에 짝하고 세상 진무는 태평을 힘쓰네. 幡旗旣赫赫 鉦鼓何煌煌 휘날리는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오랑캐로 천자의 명(命) 어기는 자는 칼 앞에 엎드려 천벌을 받으리.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순후한 풍..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대륙의 동남단(東南端)에 위치한 백제와 신라는, 삼국이 정립(鼎立)하던 시기에 있어서는 해로(海路)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중국과의 교섭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 대안(對岸)에 중국대륙이 있어 교접(交接)의 가능성이 신라보다도 유리한 처지에 있었지만,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문학 유산은 산문(散文) 가운데 중국에 올린 표(表) 몇 편이 있을 뿐이다. 남토(南土)는 서정시(抒情詩)의 본향(本鄕)이거니와, 신라에는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 외에도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ㆍ「반속요(返俗謠)」ㆍ「분원시(憤怨詩)」 등 남방의 서정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영고석(詠孤石)」은 다음과 같다. 逈石直生空 平湖四望通 먼 바위 하늘에 곧추 솟아 평호(平湖)에 사방으로 통하네. 巖根恒灑浪 樹杪鎭搖風 바위 뿌리엔 언제나 물결이 치고 나무 끝에 늘 살랑대는 바람. 偃流還漬影 侵霞更上紅 물결에 기우니 그림자 잠기고 노을 침노하니 돌머리 붉어라. 獨拔群峰外 孤秀白雲中 홀로 우뚝 뭇 봉우리 밖에 솟아 외로이 흰 구름 속에 빼어났구나. 『古詩紀』 권117 작자 자신의 깨끗한 모습을 외로운 돌에 비유한 것이다. 돌과 작자가 완전히 자리바꿈하고 있다.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은 율시(律詩)의 형식과 일치하지만, 경련(頸聯)ㆍ미련(尾聯)의 염법(簾法, 平仄法)은 율시(律詩)의 그것과 다르다. 그러나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서 이룩한 대우(對偶)의 솜씨는 근체(近體)에 모자람..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은 다음과 같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다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싸움 이겨 공이 하마 높으니 만족하고 이제는 그쳐주시길. 『三國史記』 列傳 「乙支文德」 출전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이며 『동문선(東文選)』ㆍ『고시기(古詩記)』ㆍ『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 이 작품이 전한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분류되어 있으나 염법(簾法, 平仄法)이 근체(近體)에 맞지 않으며, 제작된 시기도 근체시(近體詩)가 성립되기 이전이다. ‘리(理, 上聲 紙韻)’, ‘지(止, 上聲 止韻)’ 등 측성운(仄聲韻)을 통압(通押)하고 있어 어세(語勢)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꾸밈이 없어 절로 힘과 기상(氣象)을 느끼게 ..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대륙과 연접해 있는 고구려는 대륙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는 백제와 신라보다 한자문화의 유입(流入)이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며, 상호 교접(交接)도 번다(繁多)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에 의하여 삼국시대의 문화와 역사가 정리ㆍ기록된 사실에서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비하여 소원(疏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고구려의 시편(詩篇)도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과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모두 북방(北方)의 기상(氣象)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인삼찬(人蔘讚)」은 다음과 같다. 三椏五葉 背陽向陰 세 줄기 다섯 잎사귀, 해 등지고 그늘 향하네. 欲來求我 假樹相尋 나를 얻으려면 가수나무 아래서 찾을 일. 『續博物誌』 ‘삼아오엽(三椏五葉)’ 즉 10년생 이상의 인삼은 줄기가 셋, 잎사귀가 다섯이 난다. 이를 진인삼(眞人蔘)이라 한다. 이 작품은 이 진인삼(眞人蔘)의 생태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삼 스스로 인삼을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시 작품의 경계에 들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인삼의 생태를 단순하게 진술한 설명문과 구별된다. 이 작품을 전하고 있는 문헌은 『속박물지(續博物志)』를 비롯하여 『본초강목(本草綱目)』ㆍ『명의별록(名醫別錄)』ㆍ『패관잡기(稗官雜記)』ㆍ『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이지만 「인삼찬(人蔘讚)」을 처음 기록하고 있..
「황조가(黃鳥歌)」는 다음과 같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퍼득퍼득 꾀꼬리 암수 서로 즐겁네. 念我之獨 誰其與歸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一 琉璃明王. 황조가(黃鳥歌)는 출전 문헌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ㆍ『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전한다. 사언사구(四言四句)로 되어 있어 시경체(詩經體)에 가깝다. 고구려에서의 한문(漢文) 보급이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태학(太學)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을 감안하여 후대의 위작(僞作), 또는 한역(漢譯)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유리왕(琉璃王) 삼년(三年) 시월(十月)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계실(繼室)로 맞았는데 둘이서 ..
「공후인(箜篌引)」은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그대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 기어이 물을 건너네. 墮河而死 當奈公何 마침내 빠져 죽어 버리니 그대를 어찌 하리오? 이 작품은 후한(後漢) 채옹(蔡邕, 133~192)의 『금조(琴操)』, 서진(西晉) 혜제(惠帝, 290~306) 때 최표(崔豹)가 편찬한 『고금주(古今注)』, 『예문유취(藝文類聚)』 등에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妻) 여옥(麗玉) 또는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이 작품은 부대설화(附帶說話)가 함께 전하고 있어 작자와 제작동기 등 작품과 관계되는 주변사정까지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부대설화를 배제하고 독립된 작품만 보면, 물을 건너지 말라는 애원을 뿌리치고 기어이 물을 건너다 빠져 죽은 ..
1. 대륙(大陸)의 노래 우리나라 국토의 경계(境界)가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로 고착(固着)되기 이전의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그 시기가 어느 때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중국 대륙의 동북변(東北邊) 지역이 선주지(先住地)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국가 또는 국토의 개념도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때 중국과의 국가간의 경계 역시 지금처럼 확연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시가사(詩歌史)에서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 「공후인(箜篌引)」이나 「황조가(黃鳥歌)」, 심지어 고구려인(高句麗人)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삼찬(人蔘讚)」까지도 그 국적과 제작 시기를 명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방면의 연구도 그 부대설화(附帶說話)의 산문(散..
2. 한시의 초기 모습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유입(流入)된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는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어 왔지만, 이는 연(燕) 위만(衛滿)의 동침(東侵)이나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역시 추정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한시(漢詩)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를 따지는 문제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다. 설사 문자(文字)의 유입은 있었다 하더라도 그 그릇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한시(漢詩)와 같은 고급 예술 문화를 양성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거쳐야 할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할 때에는 서책에 의존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을 광범위하게..
2) 조선의 시화집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
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경우, 비평은 한문학의 전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설이 판을 치는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문학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것이 아니라 문어(文語)로 된 문장(文章)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시(詩)나 문(文)의 역사이며 실질적으로는 시(詩)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 비평의 현실은, 문학일반에 관한 이론이나 본격적인 시론(詩論)과 같은 것은 흔하지 아니하며, 대부분이 소박한 실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던 방식 그대로 개연적(蓋然的)인 평어(評語) 수준에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
5)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漢詩)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서는 총결산에 해당한다. 표제(標題)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古朝鮮)에서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역대 2,000 여가(餘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12권(卷)으로 출판한 것이다. 구한말의 학자요 언론인이기도 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집하여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연보와 장홍식(張鴻植)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편(原編)은 1917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권수(卷首)의 범례(凡例)에서는, 서둘러 이를 편집, 간포(刊布)하기 때문에 유루(遺漏)된 것에 대해서는 보유(補遺)의 간행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이..
4)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여기서 풍요(風謠)라고 한 것은 『소대풍요(昭代風謠)』와 『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 등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시집(詩集)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작(詩作)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의 그것에 비길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중인(中人)ㆍ천예(賤隸)들의 피맺힌 소망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특수계층의 시집(詩集)이다. 때문에 그 편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사대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위항시인(委巷詩人)이란 대체로 의역중인(醫譯中人)ㆍ서리(胥吏) 등과 같이 중간 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詩人)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대부의 기에..
3) 『기아(箕雅)』와 절충론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시선집(詩選集)이라면,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찬집(撰集)한 『기아(箕雅)』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이후 조선후기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시선집(詩選集)이다. 임병양란(任丙兩亂)의 실의(失意) 이후 깊은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 들어간 소단(騷壇)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숙종(肅宗) 연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시대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숙종(肅宗)ㆍ영조(英祖) 연간에 가열된 당론(黨論)으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詩業)이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후기 사단(詞壇)의 현실에서 볼 때 『기아(箕雅)』의 출현은 조선후기 소단(騷壇)의 중간 보고 이상으로 시사적(詩..
2)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格調論) 『국조시산(國朝詩刪)』의 기본 성격은 허균(許筠)이 초선(鈔選)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자신이 선발(選拔)한 작품에 스스로 비(批)와 평(評)을 함께 붙이고 있어 이는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그 유례가 없는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시대사적으로는, 『동문선(東文選)』과 『청구풍아(靑丘風雅)』 이후 목릉성세(穆陵盛世)에 이르는 150년간은 조선 시대의 소단(騷壇)이 전에 없이 다양한 전개를 보이면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이것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 시대에 그 비평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무비(無比)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허균(許筠)이 당시(..
1)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기본적인 성격은 조선초기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편찬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형식적인 의미에서 보면, 조선초기에 이르러 전시대(前時代)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대관찬사업(大官撰事業)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라는 것이며, 둘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소단(騷壇)이 이때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이르러 그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
2. 자료의 선택 문제 한문학사는 문장(文章)의 역사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역사가 아니라 문언(文言)으로 된 시문(詩文)의 역사이며, 사실상 그 주종(主宗)이 되어 온 것은 시(詩)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史實)이 사실(事實)로 통용되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이른바 문학(文學)에 대한 연구는 시대의 풍상(風尙)으로 각광을 받아왔고 사실상 조윤제(趙潤濟)의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가 이러한 편향(偏向)을 조성하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정작 한시(漢詩)에 대한 관심은 작품의 소재 파악이나 기초 자료의 조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시(漢詩) 전통이 이미 전시대(前..
1. 서설(序說) 1. 한시(漢詩) 연구(硏究)의 과제(課題) 한시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삶을 있게 해주는 원천으로 소중한 것이 되고 있으며, 한시에서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해법(解法)조차도 이 자연을 통하여 구하려 한다. 그러나 한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과 자연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 물아(物我)가 한데 어우러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조화미(調和美)의 극치(極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漢詩)를 모르면서도 한시(漢詩)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학계의 현실은 지금까지도 연구..
한시미학산책(漢詩美學散策) 목차 정민 지은이의 말 1) 허공 속으로 난 길 1.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빛 박지원 - 答蒼厓之三 박지원 - 菱洋詩集序 박지원 - 答京之之二 2. 영양(羚羊)이 뿔을 걸듯 엄우 - 시란 말이나 이치에 천착치 않는다 3. 허공 속으로 난 길 이옥 - 俚諺引 一難 고조기 - 山莊雨夜 이달 - 撲棗謠 백광훈 - 弘慶寺 4.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홍양호 - 疾雷 이규보 - 論詩 5. 이명(耳鳴)과 코골기 박지원 - 孔雀館文稿 自序 2) 그림과 시 1. 그리지 않고 그리기 노자 - 45번 2. 말하지 않고 말하기 정곡 - 落葉 두보 - 春望 두보 - 江南逢李龜年 서거정 - 獨坐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박지원 - 菱洋詩集序 어우야담 - 그대의 좋아하는 마..
5. 도로 눈을 감아라 오늘날 한시에 대한 관심은 한갓 회고 취미나 골동품을 완상하는 호사는 아닌가? 더 이상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배출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시에 관한 담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문학과의 교과과정을 보면 현대시론이나 현대소설론, 현대비평론 등의 강좌는 있어도, 한국시론이나 한국소설론, 한국비평론 등의 강좌는 찾아볼 수 없다. 시론과 비평론은 꼭 ‘현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전달한다. 독일문학비평사와 프랑스문학비평사, 중국문학비평사는 서점에 버젓이 꽂혀 있는데, 정작 볼만한 한국문학비평사는 한 권이 없다. 고작해야 그간 비평주제로 쓴 논문을 모아 엮은 것이 전부다. 문학사 강의는 언제나 고전문학사와 현대문학사가 따로 논다. 갑오경장이 없었다면 문학사는 어떻..
4.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 어떤 지금도 옛 것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옛 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 것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그 껍질을 배우지 말고 그 정신을 배울 일이다. 당대(唐代) 고문(古文) 운동을 제창한 한유(韓愈)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글을 지을 때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마땅히 옛 성현을 본받아야지.” 그가 갸우뚱하며 다시 묻는다. “옛 성현이 지은 글이 다 남아 있지만 그 말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것을 본받아야 할지요?”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말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의 정신이다. 「답유정부서(答劉正夫書)」에 보인다. 또 그는 옛 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사..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可久].”라 했다. 천지만물은 변화유동한다. 한 시대가 가면 또 한 시대가 온다. 이 도도한 변화 앞에 옛 것만 좋다고 우겨서야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 것이 옛 것과는 별개의 무엇인가? 그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확인함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오래 갈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이른바 ‘통변(通變)’의 정신이 여기서 나온다.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 「통변(通變)」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詩)ㆍ부(賦)ㆍ서(書)ㆍ기(記)는 이름과 실지가 서로 상응하니 여기에는 항상된 형식이 있다. 문사(文辭)와 기력(氣力)은..
2. 거미가 줄을 치듯 22일,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 담헌(湛軒)에게 갔다. 풍무風舞도 밤에 왔다. 담헌(湛軒)이 슬(瑟)을 타자, 풍무(風舞)는 금(琴)으로 화답하고, 국옹(麯翁)은 갓을 벗고 노래한다. 밤 깊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운 기운이 잠시 가시고, 현(絃)의 소리가 더욱 맑아진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 마치 내단(內丹) 수련 하는 이가 내관장신(內觀臟神)하는 것 같고, 입정에 든 스님이 돈오전생(頓悟前生)하는 듯하다. 대저 스스로 돌아보아 곧으매 삼군(三軍)이 막아선다 해도 반드시 나아갈 기세다. 국옹(麯翁)이 노래할 때를 보면 해의방박(解衣磅礴), 옷을 죄 벗어붙이고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방약무인하다. 매탕(梅宕)이 한 번은 처마 사이서 늙은 거미가 거미줄 치..
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通變論) 한시(漢詩) 전통의 미학의의 1.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자료를 찾으러 대학 도서관에 들렀다. 고서 영인본 서가를 둘러보는데 「송산하(頌山河)」란 시집이 한 권 꽂혀 있다. 옛 책 매듯 제본하였기에 잘못 고서로 분류한 것이다. 산기슭/ 물굽이/ 도는 나그네/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春 2) 소나무/ 가지 끝에/ 달랑/ 앉아/ 봄맞이 노래로/ 해 지는 멧새 (春 25) 갈매기/ 흰 나래/ 타는 저녁놀/ 기다림에/ 지쳐서/ 조는 나룻배 (夏 37) 청개구리/ 버들 타고/ 울면/ 파초 잎에/ 후두둑/ 소나기 (夏 64) 못 잊어/ 찾는 이 길/ 하도 덧없어/ 허랑해/ 잊잔 길이/ 이리 삼삼해 (秋 97) 긁어 모은/ 낙엽에/ 불을 붙이면/ 외줄기로/..
6. 남는 이야기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문장으로 한때에 명성이 나란하였다. 한 번은 정지상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었다. 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 절에서 독경소리 끝나자마자 하늘 빛 유리처럼 깨끗해지네. 독경소리가 맑게 하늘로 울려 퍼지니, 그 소리에 씻긴 듯 하늘빛이 유리와 같이 맑아졌다고 했다. 청각을 시각으로 옮긴 절묘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본시 독경소리와 맑아진 하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독경소리에 쇄락해진 마음을 맑아진 하늘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적 심상의 교묘한 결합과 행간에 의미를 감추는 심층화의 수법은 한시가 아니고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심오처이다. 이를 본 김부식(金富軾)이 이 구절을 좋아 해서 정지상에게 그것을 자기에게 ..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종래 시화에 보이는 한시 감상 태도는 세밀한 분석보다 총체적인 감상을 중시하여, 두 세 마디로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 논리적 분석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는 그들의 문학 인식이 낮거나 구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트 매클리쉬(Archibald MacLeish, 1892~1982)는 「시의 작법(Ars Poetica)」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고 하고,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 A Poem shuold be eq..
4. 말이 씨가 되어 흔히 “글은 바로 그 사람[文如其人].”이라는 말을 한다. 대개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들게 되니, 그 시의 한 구절로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이를 달리 기상론(氣象論)이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언어의 힘을 믿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화를 읽다 보면 의외로 이런 예화와 자주 접하게 된다. 비유가 조금 유감스럽긴 하지만, 예전 어느 가수가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는 노래를 부르더니, 실제 그렇게 되고 만 것 같은 예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詩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개 이는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허구헌 날 이렇듯 시만 생각하다 보니, 그 생활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시화를 빈번하게 장식하는 화제 가운데 “시가 사람을 능히 궁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이 있다. 시가 무슨 조화가 있어 사람을 궁하게 할까마는, 폐백사하고 시만 생각하고 앉았으니, 궁함이 뒤따라오는 것은 또 당연할 법하다. 어느 여류 시인이 자신은 시를 쓸 때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고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하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니와,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중국의 『사명시화(四溟詩話)』에는, “요즘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는 자를 보면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상스런 근심을 ..
2. 시마(詩魔)의 죄상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초목이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自汝之來, 萬狀崎嶇, 悗然如忘, 戇然如愚, 如瘖如聵, 形熱跡拘. 不知飽渴之逼體, 不覺寒暑之侵膚, 婢怠莫詰,..
29. 시화(詩話), ‘행복한 시읽기’ 1. 한시 비평과 시화(詩話) 어느 시대고 많은 작품이 생산되면 으례 이의 옥석을 구분하려는 비평의 욕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범람하는 작가와 작품의 홍수 속에서 악화와 양화를 구별해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문학이 펼쳐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비평 활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악화니 양화니 하는 개념이나 문학의 바람직한 전개 방향이란 것이 고정불변일 수 없다는 데서 시대마다, 또 평자마다 개성이 드러나고 견해가 갈리게 된다. 오늘날 시단에 비평이 존재하듯, 과거에도 한시를 중심으로 한 비평활동은 꾸준히 펼쳐져 왔다. 과거의 비평활동은 크게 선집류(選集類)의 간행을 통한 방법과, 시화(詩話)의 저술을 통한 방법이 있었다. 전자가 규모가 크고 간접적이라면, 후자는 개별적..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다. 일이 없어 긴 밤의 시간이 짓누르면 모과차를 마신다. 잠 안 오는 밤 보글보글 화로에 주전자를 얹어 놓고, 모과차를 끓인다. 훈내 속에 코를 박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하다. 한 김 식혀 한 모금 머금어 내릴 때, 내 귀에는 문득 가을 빗소리가 들려온다. 앞산과 뒷산에서 갈잎을 툭툭 치는 가을 빗소리. 처음 가본 낯선 마을, 외딴 여관방에서 혼자 누워 밤새 듣던 그 가을 빗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오늘도 그 빗소리 듣자고 모과차를 끓인다.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思君意不盡 千里..
4. 밤비와 아내 생각 가족과 가정의 안온함은 늘 아내의 손길과 함께 떠오른다. 이번에는 밤비 소리를 매개로 아내 생각을 떠올린 현대시와 한시를 엮어 읽어본다. 새로 바른 창(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철창(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조운의 시조 「아내에게」다.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지은 작품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 준비를 한다. 국화 꽃잎과 단풍잎을 넣고 새로 방문을 바르고 창을 바른다. 풀이 마르면서 헤살 먹은 창이 짱짱하게 펴진다. 방 안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숫단을 턴다. 그럴 때마다 좌르르 쏟아져 방바닥을 구르던 수수 알갱이 소리는 마치 오밤중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같았다. 시인은 이제 철창에 갇혀 밤비 소리를 듣는다. 처정처정 지..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이다. ‘완화삼’은 글자 그대로 풀면 ‘꽃을 구경하는 적삼’이다. 꽃구경하는 나그네란 뜻이다. 시 속에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따왔다. 「완화삼」의 첫 연,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는 두목(杜牧)의 「산행(山行)」 1구, ‘비탈진 바위 길에 찬 산 멀리 오르는데[遠上寒山石徑斜]’를 단번에 떠올린다. 다만 시의 감정이 다소 과잉되어 한시의 말하기 방식과 멀어졌다. ‘차운..
2. 한시와 모더니즘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 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련가?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가?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노니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이번에는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 1」을 읽어본다. 아름드리 큰 솔을 도끼로 찍어내면 쩡쩡 소리를 내며 쓰러질 것만 같다. 메아리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릴 듯한 공간이다. 산은 깊어서 고요하다. 종..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조지훈은 「또 하나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낮은 소리 가만히 그리웠냐 물어보니,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까닥까닥[低聲暗問相思否, 手整金𨥁少點頭].’ 여기에 동양의 수법이 있다. 서양의 시인은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한 시도 잊을 수 없어요 하고 빨간 입술을 내밀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표현 방법에서도 동양의 수법은 신비롭다. 이 동양의 수법이란 곧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입상진의(立象盡意), 이미지를 세워 할 말을 대신한다. 현대시도 한 가지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 모로 참 닮았다. 한시와 현대시의 관련을 찾는 가장 쉽고 분명한 방법은..
7. 시에 숨겨진 시간의 단절을 찾아 烟楊窣地拂金絲 내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幾被情人贈別離 이별의 정표로 꺾이어짐 얼마던고. 林外一蟬諳別恨 숲 밖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 듯 曳聲來上夕陽枝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김극기(金克己)의 「통달역(通達驛)」이란 작품이다. 버들가지에 아지랑이 하늘대고, 연두빛 물이 오른 금실이 바람결에 일렁이는 봄날이다. 헤어지는 사람들이 서로 잊지 말자고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전별하는 것은 당나라 이래의 오랜 관습이다. ‘유(柳)’와 ‘류(留)’가 음이 같은데다 버들은 꺾꽂이가 가능하므로, 우리는 비록 헤어졌지만 다시 만날 것이라는 다짐을 여기에다 얹은 것이다. 통달역은 평안도 고원군(高原郡)에 있던 역이다. 이름 그대로 사통팔달의 길목이고 보니, 안..
6. 불합리 속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 결국 여러 시비가 모두 헛짚은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시인의 시적 진술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쓸모없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제 세 편 시를 함께 읽으며 글을 맺겠다. 먼저 김시습(金時習)의 「도점(陶店)」이란 작품이다. 兒打蜻蜓翁掇籬 아이는 잠자리 잡고 늙은인 울타리 엮는데 小溪春水浴鸕鷓 작은 시내 봄물에선 가마우지 멱을 감네. 靑山斷處歸程遠 청산도 끊어진 곳 갈 길도 아득해라 橫擔烏藤一箇枝 등나무 한 가지를 비스듬히 매고 간다. 도점은 지명이다. 아이가 잠자리를 잡는다고 했으니 계절은 한 여름이나 가을이라야 겠는데, 2구에서는 ‘춘수(春水)’ 즉 봄물이라고 했다. 노자(鸕鷓), 즉 가마우지는 겨울 철새다. 해안 절벽의 바위 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논다. 소..
5. 시의 과장된 표현에 딴지 걸기 다음은 『동인시화(東人詩話)』의 언급이다. 진화(陳澕)가 “비온 뒤 뜨락엔 이끼가 깔렸는데, 기척 없는 사립은 낮에도 열리잖네. 푸른 섬돌 꽃이 져서 깊이가 한 치인데, 봄바람에 불려 갔다 불려서 오는구나[雨餘庭院簇莓苔, 人靜柴扉晝不開. 碧砌落花深一寸, 東風吹去又吹來].”라 노래한 것을 두고, 깎아 말하는 자가, “진 꽃을 ‘심일촌(深一寸)’이라 한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조퇴암(趙退菴)의 시에 ‘부들 빛 푸릇푸릇 버들 빛 짙은데, 금년 한식에도 지난해의 마음일세. 술 취해 관하(關河)의 꿈 기억나지 않는데, 길 위 날리는 꽃 한 무릎에 차는 도다[蒲色靑靑柳色深, 今年寒食去年心. 醉來不記關河夢, 路上飛花一膝深].’라 했으니, ‘일슬(一..
4. 시의 언어를 사실 언어로 받아들이다 우리나라 시화에서도 이 같은 문제는 여전히 흥미로운 관심사의 하나였다. 이수광(李晬光)도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이런 종류의 언급을 몇 남겼다. 이백의 시에, “오월이라 서시가 연밥을 따니, 사람들 보느라 야계가 미어지네[五月西施採, 人看隘若耶].”라 하였으니, 대개 5월은 연밥을 따는 때이다. 백광훈의 시에, “강남이라 연밥 따는 아가씨, 강물은 산기슭 치며 흐르네. 연이 짧아 물위로 나오질 않아, 뱃노래에 봄날은 근심겨워요[江南採蓮女, 江水拍山流. 蓮短不出水, 櫂歌春正愁].”라 하였다. 대개 연꽃이 물 위로 나오지 않았으니 연밥 따는 때가 아니다. 잘못이라 할 수 있다. 李白詩曰: ‘五月西施採, 人看隘若耶’, 盖五月是採蓮之時也. 白光勳詞云: ‘江南採蓮女, ..
3. 한밤 중의 종소리에 담긴 진실 『육일시화(六一詩話)』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이 좋은 구절을 구할 욕심에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또한 시어의 병통이다. 예컨대 “소매 속 간초(諫草) 넣고 조회하러 갔다가, 머리 위 궁화(宮花) 꽂고 잔치에서 돌아오네[袖中諫草朝天去, 頭上宮花侍宴歸].”는 진실로 아름다운 구절이지만, 다만 간언을 올릴 때는 반드시 장소(章疏)로 하는 것이지 곧바로 원고의 초고를 사용하는 경우란 없다. 당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고소대 밑 한산사, 한밤중에 종소리 객선(客船)에 드네[姑蘇臺下寒山寺, 半夜鐘聲到客船].”라 했다. 말하는 자가 또 “구절은 좋은데, 삼경은 종을 칠 때가 아니다”라고 한다. 詩人貪求好句, 而理有不通, 亦語病也. 如‘袖中諫草朝天去, 頭..
2. 이성적으로 시를 보려던 구양수 구양수가 가우(嘉祐) 연간에 왕안석의 시, “황혼에 비바람이 동산 숲에 어둡더니, 남은 국화 흩날려 온 땅이 금빛일세[黃昏風雨暝園林, 殘菊飄零滿地金].”라 한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온갖 꽃이 다 져도 국화만은 가지 위에서 마를 뿐이다.” 인하여 장난으로 말하기를, “가을꽃을 봄꽃 짐에 견주어선 안 되나니, 시인에게 자세히 보라 알려 주노라[秋英不比春花落, 爲報詩人子細看].”고 하였다. 왕안석이 이 말을 듣더니, “그가 어찌 『초사(楚詞)』에 나오는 ‘저녁엔 가을 국화의 진 꽃잎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를 모른단 말인가? 구양수가 공부하지 않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毆公嘉祐中, 見王荊公詩‘黃昏風雨暝園林, 殘菊飄零滿地金’, 笑曰: “百花盡落, 獨菊枝上枯耳.”..
27. 시적 진술의 논리적 진실 1. 시에 담긴 과장과 함축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은 단지 망상으로 억탁한 것일 뿐이니, 마치 다른 사람의 꿈을 말하는 격이다. 설령 형용이 아주 비슷하다 해도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마음을 끌겠는가? 그런 줄 아는 것은 ‘퇴(推)’와 ‘고(敲)’ 두 글자를 침음한 것이 바로 그가 지어낸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약 경(景)과 마주해 마음으로 느꼈다면, ‘퇴(推)’든 ‘고(敲)’든 반드시 어느 하나였을 터이다. 경(景)과 정(情)에 따르면 절로 영묘(靈妙)해지니, 어찌 수고로이 따져 의논하랴? ‘장하락일원(長河落日圓)’은 애초에 정해진 경이 없었고, ‘격수문초부(隔水問樵夫)’는 처음부터 생각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으니,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현량(現量)’이라는 것이다. 僧敲..
2. 용사(用事)의 미감 몇 글자만 바꿔 다른 미감을 만들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인(前人)의 시구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도연명의 시 중 「사시(四時)」라는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봄물은 사방 못에 넘실거리고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 모양을 짓네. 이 가운데 실사(實辭)는 ‘수(水)’와 ‘택(澤)’, ‘운(雲)’과 ‘봉(峰)’이고, 그 나머지 글자는 모두 허사(虛辭)이다. 만일 시인이 이 시구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려 할 때, 허사를 그대로 두고 실사만을 바꾼다면 이런 시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春陰滿四野 夏樹多奇花 봄 그늘 사방 들에 가득 차 있고 여름 나무엔 기이한 꽃 많이 피었네. 또 다음과 같이 실사는 그대로 두고 허사만을 ..
26. 한시의 용사(用事) 1. 이곤의 부벽루시와 용사 한시의 표현 방식 가운데 용사법(用事法)이 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해 살펴 표현방식의 한 양상을 검토하기로 한다. 한시에서 운자를 사용하여 여러 시인이 반복적으로 시를 짓다 보면 나중에는 표현 방식이 유형화 되게 마련이었다. 한시에서 앞선 시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표현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표절인 표현이 한시에 있어서는 별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의 표현을 얼마나 적절하게 자기화 하느냐에 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다음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이혼(李混)의 「부벽루(浮碧樓)」란 작품이다. 永明寺中僧不見 영명사 가운데 스님은 뵈지 않고 永明寺前江自流 영명사..
5. 좌절된 꿈을 아로새기다 봄여름 한철을 울고 내처 휴식하는 꾀꼬리 종달새의 교앙(驕昻)함보다, 사철 지저귀는 까마귀 참새의 시끄러움만 가득 찬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시단의 표정이다. 앉을 자리조차 가리지 못하는 범용(凡庸)한 시 따위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지용의 말마따나 꽃이 봉오리를 머금고 꾀꼬리 목청이 제 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온전히 제자리가 돌아 빠진 시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고금이 한 이치이다. 시의 위의(威儀)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떻게 쓰는 시가 좋은 시인가? 어찌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허균(許筠)의 그때나 지금의 여기나 우리를 늘 곤혹스럽게 하는 물음들이다. 이 짧은 글에서는 허균의 시 창작과 관련된 논의만을 추려 간단히 살펴보았..
4.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점철성금(點鐵成金)하는 표현의 묘를 통해 전달된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목소리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점철성금하는 표현의 묘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이 글의 세 번째 화두는 ‘묘오론(妙悟論)’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이론을 많이 알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의 깨달음은 그런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권필이 이름과 지위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지 못한데다가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봄을 가지고 그를 천하게 여기지만, 옛날에 태어나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그를 우러름이 어찌 다만 김종직 정도일 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권필이 학력이 적고 원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땅히 ..
3. 표현론: 입의(立意) → 명어(命語) → 점철성금(點鐵成金)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 편의 시 속에 나만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이글에서 다루려는 두 번째 화두는 ‘표현론’이다. 허균은 「시변(詩辨)」에서 그 과정과 단계를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먼저 뜻을 세움에 나아가고 그 다음으로 말을 엮는 것을 바르게 하여, 구절이 살아 있고 글자가 원숙하며, 소리가 맑고 박자가 긴밀해야 한다. 그리고 소재를 취해 와서 엮되 놓여야 할 자리에 놓아두고 빛깔로 꾸미지 아니하며, 두드리면 쇳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고 가까이 보면 화려한 듯하여, 이를 눌러 깊이 잠기게 하고 높이 올려 솟구쳐 내달리게 한다. 시상(詩想)을 닫는 것은 우아하면서도 굳세게 하고, 여는 것은 호방하고 시원스레 하여, 이를 펼..
2. 개성론: 정신은 배우되 표현방식은 배우지 않는다 이제 허균의 문학 주장을 몇 가지로 대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첫 번째 화두는 ‘개성론’이다.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하여 그 지향을 성당(盛唐)의 시에 두고 있기는 해도,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 사람으로 시 짓는 자들은 문득 말하기를 “나는 성당(盛唐)이다, 나는 이두(李杜)다, 나는 육조(六朝)다, 나는 한위(漢魏)다”라고 하여, 스스로 서로들 내세우며 모두 문단의 맹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그 말을 표절하고 어떤 이는 그 뜻을 답습하여 모두들 남의 집 아래에다..
25. 허균 시론, 깨달음의 시학 1. 조선의 문제아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 그의 이름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는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면서, 『성수시화(惺叟詩話)』ㆍ『학산초담(鶴山樵談)』 등의 시화를 엮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다. 그를 ‘천지간(天地間)의 일괴물(一怪物)’이라고 폄하하던 사람조차도 시를 보는 그의 안목만은 높이 인정하였다. 역대로 가장 훌륭한 엔솔로지(anthology)라는 평가를 들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을 엮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다채로운 지적 편력을 거쳐, 당대에 성행했던 도교와 내단 수련 방면에도 정심한 이론과 실천을 보였다. 남궁두와 송천옹, 그리고 유형진 등 당대에 이름난 도류(道流)들과 교유하였고, 단학(丹學) 이론에도 밝았다. 스스로 100상자가 넘는..
6.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더라면 정시(情詩) 가운데서도 가장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남정네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평생 고생만 하다 떠난 아내이기에 가슴에 저미는 아픔이 유난스럽다. 이런 시를 망자를 애도하는 시라 하여 도망시(悼亡詩)라고도 하는데 몇 작품을 함께 보기로 하자. 嫁日衣裳半是新 시집 올 제 해온 옷이 반 너머 그대로니 開箱點檢益傷神 궤를 열고 살펴보다 더욱 맘을 상하네. 平生玩好俱資送 평생 좋아하던 것을 함께 담아 보내서 一任空山化作塵 빈 산에 다 맡기니 티끌되어 스러지라. 이계(李烓)의 「부인만(婦人挽)」이다. 아내가 훌쩍 세상을 떠버리고, 땅에 묻으려고 아내의 옷가지를 뒤적이다 목이 메이고 만 노래다. 아내의 옷상자를 꺼내어보았다. 시집 올 때 지어온 옷이 ..
5. 까치가 우는 아침 有約來何晩 庭梅欲謝時 약속을 하시고선 왜 안 오시나 뜨락의 매화 꽃도 시드는 이때.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나무 위서 까치가 울기만 해도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요. 이옥봉(李玉峯)의 「규정(閨情)」이란 작품이다. 절망의 겨울을 다 보내고 봄이 다 가도록 금세 오마던 님은 돌아올 줄 모른다. 저 매화꽃이 지기 전에는 오셔야 할 텐데. 봄이 되면 온다던 님이 꽃마저 지면 영영 안 오실 것만 같아 여심은 공연한 조바심을 지우지 못한다. 꽃망울이 부프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꽃이 피면 님이 오마고 했으므로. 그런데 정작 꽃이 피자 이제는 님이 오시기도 전에 시들까봐 조마한 가슴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매화꽃이 질 때는 이제 막 봄이 시작될 무렵인데도 그녀의 마음은 벌써 봄이 다 가..
4. 진 꽃잎 볼 적마다 長興洞裏初分手 장흥동 어귀에서 헤어지고는 乘鶴橋邊暗斷魂 승학교 다리 께서 애를 끊누나. 芳草夕陽離別後 헤어진 뒤 저물 녘 방초 길에서 落花何處不思君 진 꽃잎 볼 적마다 우리 님 생각. 권붕(權鵬)의 여종 금가(琴哥)의 시이다. 제목은 「이별(離別)」이다. 장흥동은 서울 남쪽의 지명이다. 불과 조금 전에 장흥동 어귀에서 님과 헤어졌던 그녀는 근처 승학교를 건너며 벌써 그리움에 애가 끊어진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랑에 겨운 봄날의 한 때를 보내고 난 꽃잎들이 분분히 지고 있다. 진 꽃잎으로 떠나가는 봄날을 보내며 방초길을 거니는 그녀의 마음은 노을빛이다. 노을빛에는 님을 향한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영상이 가득하다. 그녀는 떨어진 꽃을 보..
3. 보름달 같은 님 牧丹含露眞珠顆 모란 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 미인이 그 꽃 꺾어 창 가로 와서, 含笑問檀郞 花强妾貌强 방긋이 웃으면서 님께 하는 말 “꽃이 어여쁜가요, 제가 어여쁜가요?” 檀郞故相戱 强道花枝好 신랑은 일부러 장난치느라 “꽃이 훨씬 당신보다 어여쁘구료.” 美人妬花勝 踏破花枝道 그 말에 미인은 뾰로통해서 꽃가지 내던져 짓뭉개더니, 花若勝於妾 今宵花與宿 “꽃이 진정 저보다 좋으시거든 오늘밤은 꽃과 함께 주무시구료.” 신혼부부에게만 있을 수 있는 사랑싸움을 재미있게 엮어낸 시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이 뜨락 가득 활짝 피었다. 꽃잎엔 진주알처럼 맑은 이슬이 송글송글 맺히었다. 이슬을 머금었다 하였으니 그녀는 햇살이 고운 이른 아침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님을 남겨..
2. 야릇한 마음 耶溪五月天氣新 5월이라 야계엔 날씨가 화창하고 耶溪女子足如霜 야계의 아가씨는 다리도 희고 곱네. 相將採蓮耶溪上 어울려 야계 위에서 연밥을 따니 翠微㔩葉輝艶陽 파아란 머리 장식 햇볕 받아 반짝이네. 採採蓮花不盈掬 연밥은 따고 따도 한 줌 안 되고 却妬沙上雙鴛鴦 백사장 쌍쌍 원앙 샘이 나누나. 鴛鴦雙飛不得語 원앙은 짝져 날고, 내 님은 못 만나 蕩槳歸來空斷腸 노 저어 돌아오며 속상해하네. 성간(成侃)의 「채련곡(採蓮曲)」이다. 5월 화창한 여름 날, 야계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희고 고운 다리를 드러내고 연밥을 캐고 있다. 그녀의 파란 머리 장식이 햇볕에 반짝이며 푸른 물 위에 비쳐지니, 그 선연한 아름다움은 비길 데가 없다. 캐고 캐도 한 줌이 되지 않는 연밥은 그녀의 마음이 영 딴 데 가 ..
24. 사랑이 어떻더냐 1. 담장가의 발자국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한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다가 막상 가슴 저미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정시(情詩)를 대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염정시(艶情詩) 또는 향렴체(香匳體)라고도 불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정시(情詩)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凌波羅襪去翩翩 비단 버선 사뿐 사뿐 가더니만은 一入重門便杳然 중문을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 惟有多情殘雪在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 屐痕留印短墻邊 그녀의 발자욱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 강세황(姜世晃)의 「노상소견(路上所見)」이란 작품이다. 길을 가다 앞서 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모습에 넋을 놓고 만 연모의 노래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아가..
5.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祖舜宗堯自太平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절로 태평하련만 秦皇何事苦蒼生 진시황(秦始皇)은 어찌하여 창생(蒼生)을 괴롭혔나. 不知禍起蕭墻內 재앙이 궁궐 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 헛되이 만리성(萬里城) 쌓아 오랑캐를 방비했네. 호증(胡曾)의 「장성(長城)」이란 작품이다. 아폴로 호가 달에 처음 착륙했을 때 감격한 우주비행사의 일성은 “만리장성이 보입니다.”였다. 장성을 쌓은 벽돌을 모두 해체하여 적도를 따라 벽을 쌓으면 허리 높이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하니, 과연 그 규모에 기가 질릴 뿐이다. 역사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진시황(秦始皇) 32년 병술(B.C 215)이라. 시황(始皇)이 북쪽 변방을 순행하는데,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4.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寂寂花時閉院門 쓸쓸히 꽃이 필 제 원문(院門)을 닫아 걸고 美人相拄立瓊軒 미인(美人)들 나란히 경헌(瓊軒)에 기대 섰네. 含情欲說宮中事 정 머금어 궁중 일을 말하고 싶지만은 鸚鵡前頭不敢言 앵무새 앞인지라 감히 말을 못하네. 주경여(朱慶餘)의 「궁사(宮詞)」이다. 꽃이 피는데도 ‘적적(寂寂)’타 하여 이미 그녀가 군왕(君王)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되었음을 보였다. 난간에 서 있는 것이 여럿이니 총애를 잃은 궁녀는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녀들은 여태 총애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일렁이는 마음은 꽃과 마주 하여 원망의 넋두리를 한 없이 풀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앵무새 앞인지라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묘하다. 글자마다 ..
3. 변새(邊塞)의 풍광(風光) 막막한 모래벌판은 끝간 데 없고 아득히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황하의 물은 감돌아 흐르고 뭇 산들은 어지러이 솟아 있다. 어둑어둑 참담한데 바람은 석양에 구슬피 불어온다. 쑥대는 꺾어지고 풀은 말라 오싹하기 마치 서리 아침 같구나. 새도 날뿐 내려오지 아니하고 짐승도 내달리느라 무리를 잃는다. 정장(亭長)은 내게 말한다. “이곳은 옛 싸움터입지요. 일찍이 삼군(三軍)이 전멸 당했답니다. 이따금씩 귀곡성(鬼哭聲)이 날이 흐리면 들려옵니다.” 슬프도다! 진(秦)나라 때였던가? 한(漢)나라 때였던가? 아니면 근대(近代)였더란 말인가? 浩浩乎平沙無垠, 敻不見人. 河水縈帶, 群山糾紛. 黯兮慘悴, 風悲日曛, 蓬斷草枯, 凜若霜晨. 鳥飛不下, 獸挺亡群. 亭長告余曰: “此古戰場也, 嘗覆三..
2. 시로 쓴 역사, 시사(詩史)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원망(願望)과 애환(哀歡)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도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한다. 맹계(孟棨)가 『본사시(本事詩)』에서 두보(杜甫)의 시를 논하면서, “두보가 안록산의 난리를 만나 농촉(隴蜀) 지방을 떠돌며 시에다 이때 일을 모두 진술하였다. 본 바를 미루어 숨겨진 것까지 이르러 거의 남김없이 서술하였으니 당시에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하였다”고 언급한 것이 시사(詩史)란 말의 첫 용례이다. 간난(艱難)의 피난 시절 두보는 기주(夔州) 지방까지 떠돌며 많은 시를 남겼는데, 뒷사람들은 그곳에 시사당(詩史堂)을 세워 두보의 화상을 걸어..
23. 시(詩)와 역사(歷史):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1. 할아버지와 손자 白犬前行黃犬隨 흰둥이 앞서 가고 누렁이 따라가는 野田草際塚纍纍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老翁祭罷田間道 제사 마친 늙은이는 두둑 길에서 日暮醉歸扶小兒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이달(李達)의 「제총요(祭塚謠)」란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다. 흰둥이가 컹컹 짖으며 저만치 앞서 가자 누렁이도 뒤질세라 뒤쫓아 간다. 잠시 두 놈의 장난질에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 뒤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덤으로 초점을 당긴다. 다시 무덤들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이 나타난다. 해질 무렵의 양광(陽光)이 빗기는 가운데 술에 까부룩 취한 할아버지와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는 손주..
4. 이카로스의 날개 유선시에는 선계에서 노니는 도중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하계조감(下界鳥瞰)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김시습(金時習)의 「능허사(凌虛詞)」 중 한 수다. 朝餐沆瀣暮流霞 아침엔 항해(沆瀣) 먹고 저녁엔 유하(流霞)로세 須信凌處有作家 허공 걷는 사람 있음 모름지기 믿을레라. 下視塊蘇嗟渺渺 굽어보니 땅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大鵬飛少蠛蠛多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 우글댄다. 人間無地不風波 인간 세상 어디에도 풍파 없는 곳이 없어 八翼凌風是大家 날개 달고 바람 타니 큰 집이 여기 있네. 下界蜉蝣寰宇窄 하계엔 하루살이 온 세상에 가득한데 塵埃萬丈贐君何 만 길이나 쌓인 먼지 그댈 속임 어찌하리. 이렇듯 유선사에서 하계는 하루살이만 득실대고, 풍파 잘 날이 없으며, 만 길이나 없으며, 만 길이나 쌓..
3. 구운몽, 적선의 노래 「구운몽(九雲夢)」에서 ‘구운(九雲)’은 무엇을 상징할까? 혹자는 양소유(楊少遊)와 팔선녀(八仙女)의 사랑 이야기이니, 결국 ‘아홉 사람의 구름 같은 꿈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박사가 1922년에 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The cloud dream of nine’이라 한 것은 이러한 이해의 좋은 증거다. 초기 도쿄 경전의 하나인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천상 선계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이 가운데 “태하(太霞) 가운데 성대한 집이 있는데 백기(白氣)를 맺어 서까래를 얹었고, 구운(九雲)을 한데 모아 기둥을 세웠다.”는 구절이 있다. 이때 ‘구운’은 아홉 가지 영롱한 빛깔의 구름을 뜻한다. 신선이 거처하는 장소의 의미로도..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어떤 갈등도 없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충만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그렇듯이 슬프고, 인간은 그렇듯이 나약한 존재인가?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시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이다. 유선시(遊仙詩)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아득한 은하수 저편 아홉 층의 하늘을 지나 있는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황금 궁전이거나 동해 너머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여섯 마리 거북이가 등에 업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상상의 섬 삼신산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서쪽 ..
22. 실낙원의 비가(悲歌) 1.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한나라 때 악부시 「해로(薤露)」는 풀잎 끝에 맺힌 이슬만도 못한 인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薤上露 풀잎 위에 이슬 何易晞 너무 쉽게 마르네 露晞明朝更復落 내일아침 이슬은 다시 내리겠지만 人死一去何時歸 한 번 떠난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르누나 고대 중국인들이 상여 메고 나갈 때 덧없는 인생을 슬퍼하며 불렀다는 노래다. 중국 위진 시대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과 마주하게 된다. 人生奇一..
5. 가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유종원(柳宗元)의 유명한 「영주팔기(永州八記)」는 그가 좌천되어 영주(永州) 땅에 쫓겨 와 있던 시절, 울적한 심회도 달랠 겸, 공무의 여가에 틈만 나면 주변의 산수간을 소요하며 노닐던 일을 기록한 글이다. 다음은 그 가운데 「시득서산연유기(始得西山宴遊記)」의 일절이다. 금년 9월 28일에 법화사(法華寺) 서정(西亭)에 앉았다가 서산(西山)을 바라보고 비로소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하인을 시켜 상강(湘江)을 건너 염계(染溪)를 따라 잡초 덤불을 찍고 무성한 풀을 살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야 그만 두게 하고, 더위잡고 올라가 걸터앉아서 노닐었다. 무릇 여러 고을의 땅이 모두 깔고 앉은 자리 아래로 펼쳐져 있어 그 높고 낮은 형세의 솟아오르고 움푹한 것이 개미둑 같고 ..
4. 들 늙은이의 말 봄날이 무르익어 숲으로 들어가면 꼬불꼬불 숲속으로 산길이 통해 있고, 소나무 대나무 서로를 비추이고 들꽃은 향기 가득 산새들은 지저귄다. 이러할 때 거문고 안고 바위 위에 올라앉아 두세 곡 연주하면 이 몸은 아득히 동중선(洞中仙) 화중인(畵中人)일세. 春序將闌, 步入林巒, 曲逕通幽, 松竹交映, 野花生香, 山禽哢舌. 時抱焦桐, 坐石上, 撫二三雅調, 幻身卽是洞中仙畫中人也.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다. 시내는 흘러가고 돌은 서 있다. 꽃은 나를 맞이하고 새는 노래 부른다. 골짜기는 메아리로 대답하고 나무꾼은 노래한다. 사방이 온통 적막해지니 내 마음 절로 한가해지네. 雲白山靑, 川行石立. 花迎鳥歌, 谷答樵謳. 萬境俱寂, 人心自閑. 꽃이 너무 화려한 것은 향기가 좋지 않고, 꽃에 향기 짙은 ..
3.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변(辨) 공자(孔子)가 『논어(論語)』 「옹야(雍也)」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고 말한 이래로, 산수간(山水間)의 노님은 자못 철학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주자(朱子)는 공자(孔子)의 말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하고 막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은 점이 있는 까닭에 산을 좋아한다는 것[知者達於事理而周流無滯, 有似於水, 故樂水; 仁者安於義理而厚重不遷, 有似於山, 故..
2. 청산에 살으리랏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론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간다.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서로 보아 둘 다 싫증나지 않는 것은 경정산(敬亭山) 너 뿐이로구나. 이백(李白)의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이란 작품이다. 속세의 시름을 지닌 채 경정산을 찾은 나그네는 산정(山頂)에서 물끄러미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그때 저 골짜기 아래로부터 새떼들은 산 위로 비상한다. 새떼의 돌연한 비상을 쫓다가 마침내 아득히 사라진 그 자리에서, 시인은 문득 ‘홀로’ 유유히 떠가는 구름을 발견한다. 새들은 그다지도 바쁘게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왁자지껄 무리를 지어 들끓다가 사라진 새떼는 사실 시인이 물 아래에서 지고 올라온 욕망과 번뇌의 찌꺼기는 아니었을까. 산 위에 올라선..
21. 산수(山水)의 미학(美學), 산수시(山水詩) 1. 가어옹(假漁翁)과 뻐꾸기 은사 天翁尙不貰漁翁 천옹(天翁)은 어옹(漁翁)을 받지 않으려는지 故遣江湖少順風 일부러 강호에 순풍 적게 보내네. 人世險巇君莫笑 인간 세상 험하다 그대여 웃지 마오 自家還在急流中 그대 외려 급류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고려 김극기(金克己)의 「어옹(漁翁)」이다. 어옹(漁翁)은 순풍을 기대하고 강호에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 강호에서조차 순풍은 좀체 불 생각을 않는다. 순풍을 잔뜩 기대하고 강호를 찾은 어옹(漁翁)은 강호행(江湖行) 이전 순풍은커녕 역풍에 온갖 고초와 신산(辛酸)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현실의 거센 풍파를 피해 강호의 순풍 속에 안기려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강호에서 조차 순풍은 잘 불어주질..
4. 달마가 오지 않았는데도 도연명은 선을 아네 이 글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살폈고, 선시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다. 이 두 가지는 조금 층위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굳이 다를 것도 없다. 시의 생각과 선의 사고는 무던히도 닮았다. 시인과 선객은 자주 가깝게 왕래한다. 서로 말귀가 통하고 배짱이 맞기 때문이다. 선방에 가짜 선객이 많듯이 시단에 가짜 시인이 많은 것도 같다.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앞에서는 둘 다 꼼짝도 못한다. 숨도 쉴 수 없다. 시와 선이 하나로 만나 선시가 된다. 절묘한 결합인 셈이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의 언어다.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한다. 풍경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려 ..
3. 동문서답의 선시들 이제 선시에 대해 살펴보겠다.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瞑想)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黙想)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명상이란 뜻을 지닌 범어의 댜나(Dhyāna)를 선(禪)으로 옮겼다.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로도 옮긴다. 다시 말해 선은 생각을 걷어내는 마음공부다.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 바로 선[喜憂心忘便是禪]’이다. 달마는 제자와의 문답에서 선을 이렇게 설명한다. 선(禪)은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생각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바로 하여,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며 감도..
2. 학시와 학선의 원리 시가 선과 만나 선시(禪詩)가 된다. 시가 선의 경지에 이르면 시선(詩禪)이다. 시와 선은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자주 한 자리에서 거론되는가? 송나라 때 엄우(嚴羽)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에 달려 있다”고 하여, 시와 선을 나란히 보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시와 선의 공통점을 ‘묘오(妙悟)’로 들었다. 묘오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다. 시를 잘 쓰는데 필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떨리듯 다가오는 묘오라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을 얼마만큼 읽었는지는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로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니다..
20.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언어란 본래 부질없는 도구다.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남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툭하면 오해를 낳고, 곁길로 샌다. 옛 시인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노래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언불진의(言不盡意), 말은 뜻을 다 전달할 수 없다. 이 생각은 옛 사람들을 늘 절망케 했다. 말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뜻, 말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는 늘 언어를 저만치 벗어나 있다. 수레 깎던 윤편(輪扁)은 제 자식에게조차 그 기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역(周易)』의 대답은 ‘입상진의(立象盡意)’다. 말로 하려들지 말고, 이미지를 들러리..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 속에 천년 묵은 나무는 옹이가 많이 져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는 까닭에 나무꾼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고, 여관집의 거위는 잘 울지 않아 쓸모없다 하여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매 일반인데 하나는 그로 인해 수명을 연장하였고, 하나는 그 때문에 명을 재촉하였다. 자! 그대는 어디에 처하겠는가? 장자는 망설임 없이 그 중간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익숙한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패러디 하여 이런 이야기로 들려준다. 황희 정승이 퇴근하여 집에 오니, 딸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아버지! 이가 어디서 생겨요? 옷에서 생기죠?” “그렇지.” 그러자 ..
3.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두보(杜甫)는 “시 짓고 용사(用事)함은 마땅히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속에 소금이 녹아 있어도 물을 마셔 보아야 소금의 짠 맛을 알 수가 있듯이.”라고 말했다. 물속에 소금을 넣으면 소금은 물에 녹아 보이질 않는다. 입을 대고 마셔 보면 그제서야 짠 맛이 드러난다. 시의 언어는 물속에 녹아든 소금의 맛과 같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맛,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뜻, 선가(禪家)의 언어가 또한 그렇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보인다. 당나라 때 시승(詩僧) 제기(齊己)는 그의 「유시(喩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日用是何專 吟疲卽坐禪 날마다 힘쓰는 일 무엇이던가 읊조리다 지치면 좌선(坐禪)을 하지. 하루 종일 시에 ..
2.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일본의 타쿠안(澤庵) 화상은 유명한 검술가였다. 그는 제자인 야규우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그 충고의 핵심은 항상 마음을 ‘흐르는’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술적 기교를 넘어서는 것이다. 높은 경지의 검술가는 적과 마주하여 서 있을 때, 적도 자신도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기교를 잊고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기고 서 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술가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스즈키 교수의 『선(禪)과 정신분석(精神分析)』이란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항상 ‘흐르는’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
19.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1. 산은 산, 물은 물 노승(老僧)이 30년 전 참선(參禪)하러 왔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뒤에 와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고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게 되자,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몸뚱이 쉴 곳을 얻으매 예전처럼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일뿐이로다. 성철(性澈) 스님의 법어(法語)로 해서 유명해진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공안(公案)이다. 선사(禪師)는 30년간의 수행 끝에 처음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 그러고 보면 30년의 공력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고초일뿐이었다. 한때 눈앞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의 빛 속에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때도 있었다. 그러나 ..
5. 속인(俗人)과 달사(達士)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된 사람은 의심스런 바가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을수록 괴이함도 많다는 것이다. 대저 어찌 달사(達士)라 하여 물건마다 쫓아가서 눈으로 본 것이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앞에 열 가지가 펼쳐지고, 열을 보면 마음에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을 도로 사물에 부칠 뿐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는 까닭에 마음은 한가로와 남음이 있고, 응수(應酬)함은 다함이 없다.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제 스스로 괴이함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성을 내며,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만물을 온통 의심한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
4.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관물(觀物)의 정신이 미학(美學)의 경계로 넘어오면 앞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가 된다. 청말(淸末)의 왕국유(王國維)는 소옹(邵雍)의 관물론에서 개념을 빌려와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설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이 있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있다. “눈물 어린 눈으로 물어봐도 꽃은 말이 없고, 붉은 꽃잎 어지러이 그네 위로 떨어지네[淚眼問花花不語, 亂紅飛過鞦韆去].”와 “외론 여관 문을 걸고 봄 추위를 견디니, 두견새 소리 속에 기운 해가 저무네[可堪孤館閉春寒, 杜鵑聲裏斜陽暮].”는 유아지경(有我之境)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와 “차가운 ..
3. 생동하는 봄풀의 뜻 소옹(邵雍)의 이물관물(以物觀物)의 설이 있은 이래 그 정신을 이어받아 관물(觀物)을 주제로 한 시를 남긴 시인들이 적지 않다. 여러 문집에 실려 전하는 관물시(觀物詩) 몇 편을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이색(李穡)의 「관물(觀物)」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大哉觀物處 因勢自相形 크도다 사물을 바라보는 곳 형세를 인하여 꼴지워 지네. 白水深成黑 黃山遠還靑 흰물도 깊으면 검게 변하고 황산도 멀리 보면 푸르게 뵈지. 位高威自重 室陋德彌馨 지위가 높고 보니 위엄 무겁고 집이사 누추해도 덕은 더욱 향기롭네. 老牧忘言久 笞痕滿小庭 늙은 몸 말 잊은 지 이미 오래니 이끼 자욱 작은 뜰에 가득하도다. 만물(萬物)의 태(態)는 일정함이 없어 형세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한 마음의 ..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12월 8일 아침. 매화 분에 물을 주라 하셨다. 날씨는 맑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다. 조금 뒤 선생께서 누울 자리를 정돈하라 하시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으신 채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구름이 흩어지고 눈은 걷혔다. 문인(門人) 이덕홍(李德弘)이 쓴 「퇴계선생고종기(退溪先生考終記)」이다. 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 본 제자의 기록으로는 투명하리만치 담담하다. 슬픔이 묻어날 빈틈이 없다. 스승의 용태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창밖의 날씨로 쏠려 있었다. 그는 과연 무슨 마음으로 스승이 서거하던 날의 기후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임종하던 날 아침, 스승은 방안 매화에 물..
18. 관물론(觀物論), 바라봄의 시학(詩學) 1.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지렁이를 두고 사람들은 수미(首尾)도 없고 배도 등도 없다고들 말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실지로는 수미(首尾)와 복배(腹背)가 있어 해를 피하고 리(利)에 나아가며, 정욕(情欲)을 모두 갖추고 있다. 옹(翁)은 말한다. 물건의 어리석고 굼뜬 것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사람과 같이 칠규(七竅)와 오장(五臟)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것에게 있어서이겠는가? 말을 듣고 빛깔을 보아 지각함이 어둡지 않은데도, 사람 가운데는 간혹 방향을 잃어 길을 잃는 자가 있으니 슬프다.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앞에 소금을 뿌려두면 지렁이는 고개를 돌려 반대..
5.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 해체시는 전통미학과 기존문화를 해체하고 기존의 인간관도 해체시키려는 일종의 무규범성으로서의 소외 양상이었다. 해체시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세계에 대한 불신을 효과적으로 표명했다. 욕설, 야유, 아이러니의 비틀린 언어도 소외의 주목할 만한 시적 양상이다. -115쪽 可憐門閥皆佳族 슬프다 문벌은 모두 훌륭한 집안으로 虛老風塵獨可悲 세월에 헛되이 늙으니 홀로 구슬프도다. 五老峯下論理坐 오로봉 아래에서 이치 논하며 앉았자니 世人皆稱道也知 세상사람 모두 도를 안다 일컫네. 위 시는 『한중기문(閒中記聞)』에 실려 있다. 한 사람이 시덥잖은 제 집안과 학문을 지나치게 뽐내므로 임제(林悌)가 조롱하여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노봉(五老峯) 아래에서 리(理)를 논하며 앉아 있는 늙은..
4.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 김준오는 자신의 저서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이런 말도 남겼다. “해체주의는 자명한 이치와 질서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자아도 더 이상 일관되게 세계와 교섭하고 대결하는 심리적 통일체나 종합적 기능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계를,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p.152)” 1980년대의 해체시를 두고 한..
3. 김삿갓은 없다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가탁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 희작시들은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고, 시의 소재 또한 당시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非詩的) 대상을 시(詩)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표면 진술의 당의(糖衣)를 입혀,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희학질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은 못 되는 것이다. 시시덕거리고 키득키득대는 정서에 더 가깝다. 희작시는 보통 전승의 과정에서 복수성을 띠면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2. 눈물이 석 줄 한시의 어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처럼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모순되고 복잡한 양태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규정하는 제반 사회조건에 길들여져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희극적 양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결과 시는 진지성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희작화(戱作化)의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전의 시화(詩話)에도 희작의 양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부터 김삿갓의 시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 파격의 희작시들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집단적 양상을 띄고 등장하는 것은 주목되는 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희작시의 작가들이 창작을 통..
17. 해체의 시학(詩學): 파격시의 세계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 김준오 『도시시와 해체시』 중에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는 숙종(肅宗)조의 한 시골 선비가 서울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남 아산 어름의 요로원에 잠자리를 찾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든 말에 초췌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는 가는 곳마다 홀대와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가 여관방에서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의 끌끌한 선비와 함께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
5.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편에 보면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란 항목이 있다. 그녀가 재위 16년 동안 미리 알아 맞춘 세 가지 일을 적은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빛과 자주빛, 그리고 흰빛 등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서 되를 보내왔는데, 여왕은 그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꽃이 피었는데 그 말과 같았다. 여러 신하가 어떻게 그럴 줄 알았느냐고 묻자, 여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혼자 지내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신하들을 탄복시켰다. 그런데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4. 뻐꾹새 울음 속에 담긴 사회학 凌晨走馬入孤城 새벽녘 말을 달려 외론 성에 들어서니 籬落無人杏子成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 布穀不知王事急 나라 일이 급한 줄을 뻐꾹새는 모르고 傍林終日勸春耕 숲 곁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를 권하네. 고려 때 시인 정윤의(鄭允宜)의 「서강성현사(書江城縣舍)」란 작품이다. 새벽녘에 말을 달려 성에 들어서고 있으니, 그는 지금 밤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는 외로운 성뿐이다.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싶어 울타리를 기웃거려 보아도 보이는 것은 주인 없는 마당에 잘 익어 매달린 살구 열매뿐이다. 그런데 뻐꾹새는 급한 나라 일도 알지 못한 채 철도 없이 숲가에서 봄 밭갈이를 어서 하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다. ..
3. 견우(牽牛)와 소도둑 기관염(氣管炎)과 처관엄(妻管嚴) 앞서 본 여러 예화들은 모두 희필(戱筆)에 불과한 것이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가 뛰어나고 기지가 반짝인다. 대개 시와 문자유희는 엄격하게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은 유희적 기분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동음사(同音詞)나 다의사(多義詞)를 활용한 쌍관(雙關), 즉 말장난 펀(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접하게 되는 기교인데, 예전 한시에도 이러한 펀(Pun)의 예는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애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 사람들이 쓰는 은어 가운데 기관지염에 걸렸다는 말은 공처가(恐妻家)라는 의미로 쓰인다. 왜냐하면 ‘기관염(氣管炎)’과 ‘처관엄(妻管嚴)’의 중국 발음이 서로 같기 때문..
2. 장님의 단청 구경 고려 때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성명(聲名)이 천하에 크게 떨쳤다. 그가 한 절에 이르니 스님이 마중 나와 말하기를, “그대가 동방의 문장사(文章士)로서 중국의 과거에 장원하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이제 직접 만나 보니 큰 기쁨입니다[飽聞子東方文章士, 爲中國第一科, 今何倖見之].”라고 하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니, 스님이 한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僧笑少來僧笑少 승소(僧笑)가 적게 오니 스님 웃음도 적네. 대개 ‘승소(僧笑)’는 떡의 별칭인데, 쟁반에 떡[僧笑]이 조금 밖에 없으니 스님의 웃음[僧笑] 또한 적다고 말한 것이다. 이색(李穡)이 갑작스레 대구를 지으려 하였으나 도저히 짝을 맞출 수가 없는지라 사과..
16. 시(詩)와 문자유희(文字遊戱): 한시(漢詩)의 쌍관의(雙關義) 1.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일손(金馹孫)이 젊어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띄운 편지 한 통이 장인에게 배달되었는데, 편지의 사연이 야릇하였다. 文王沒 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문왕(文王)이 돌아가시자, 무왕(武王)이 나오셨네. 주공(周公)이여 주공(周公)이여! 소공(召公)이여 소공(召公)이여! 태공(太公)이여 태공(太公)이여!” 예전 은(殷) 나라가 임금 주(紂)의 포학한 통치로 혼란에 빠지자, 제후였던 문왕(文王)은 어짊으로 백성을 다스려 모든 제후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주(紂)의 포학한 정치는 끝날..
4. 이합체(離合體)와 문자 퍼즐 硏石猶在 峴山已頹 연석(硏石)은 그대로인데 현산(峴山)은 이미 무너져 버렸네. 姜女己去 孟子不來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는 오질 않네. 소동파(蘇東坡)가 자신의 벼루 뚜껑에 새겨 놓았다는 내용이다. 현산(峴山)의 돌을 캐어 벼루를 만들었다. 하도 많이 캐고 보니 현산(峴山)은 모두 닳아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캐낸 벼루 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강녀(姜女)가 떠나가자 맹자(孟子)가 더 이상 오질 않는다는 말은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下)에서 ‘원급강녀(爰及姜女)’라 한 구절을 가지고 응용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보아도 ‘강(姜)’에서 ‘녀(女)’가 떠나니 ‘양(羊)’만 남고, ‘맹(孟)’에서 ‘자(子)’가 오지 않으니 ‘명(皿)’만..
3. 파자(破字)놀음과 석자시(析字詩) 한시 중에는 앞서 장두체(藏頭體)와 같이 파자(破字)하여 장난을 친 문자 유희가 심심찮게 있다. 다음은 흔히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작품이다. 仙是山人佛弗人 신선은 산 사람이나 부처는 사람 아니요 鴻惟江鳥鷄奚鳥 기러기는 강 새지만 닭이 어찌 새리요. 氷消一點還爲水 얼음이 한점 녹으면 도로 물이 되고 兩木相對便成林 두 나무 마주 서니 문득 숲을 이루네. 말인즉 구구절절이 옳다. ‘선(仙)’은 ‘인(人)’과 ‘산(山)’이 결합된 것이니 이를 파자(破字)하면 ‘산인(山人)’이 되고, ‘불(佛)’은 ‘불인(弗人)’이 된다. 또 ‘홍(鴻)’은 ‘강조(江鳥)’ 두 글자를 합한 것이고, ‘계(鷄)’는 ‘해(奚)’와 ‘조(鳥)’를 묶은 것이다. 일단 이 네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 한충(韓忠, 1486~1521)은 기개가 호방하고 비파 연주 솜씨도 뛰어났던 문사였다. 그가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용한 점장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평생의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 점쟁이는 그의 사주를 따져본 뒤,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年壯氣拔天摩 把龍泉幾歲磨 上梧桐將發響 中律呂有時和 傳三代詩書敎 起千秋道德波 幣已成賢士價 生何獨怨長沙 위 6자 8구의 시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예언한 것일까? 시를 받아든 한충(韓忠)은 뜻을 알 수가 없어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쟁이가 써준 것은 장두체(藏頭體)라고 불리는 일종의 잡체시이다. 문자 퍼즐의 한 종류로, 그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1.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 부단한 언어의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織造)가 보여주는 현란한 아름다움, 잡체시는 단순히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오늘의 시단에 던진다. 또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형태시들이 기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상은 이렇듯 돌고 도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一生苦沈綿 二月患喉撲 일생동안 병고에 괴로웠는데 이월에도 감기 들어 목이 쉬었네. 三夜耿不眠 四大眞是假 삼일 밤을 끙끙대며 잠 못 이루니 사대 등신 멀쩡한 몸 헛것이로다. 五旬尙如..
3.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골계총서(滑稽叢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 한 원님의 첩이 총명하여 능히 문자를 이해했다. 그 고을에 문객 한 사람이 해학을 잘 하므로 원님이 아껴 우스개 얘기를 하며 서로 격의 없이 지냈다. 하루는 재상이 첩과 더불어 동산 정자에서 상춘 하고 있는데, 문객이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네 글자를 써서 재상에게 보내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님은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첩이 곁에서 그 글을 읽더니 웃으며 말했다. “무에 어려울 게 있답니까? ‘일(日)’ 자가 매우 기니 이는 ‘장일(長日)’입니다. ‘심(心)’ 자에 점 하나가 없으니, 바로 ‘무점심(無點心)’입지요. ‘인(人)’자를 조그맣게 썼으니 ‘소인(小人)’이구요, ‘복(腹)..
2. 바로 읽고 돌려 읽고 청나라 때 북경에 ‘천연거(天然居)’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건륭황제가 이것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客上天然居 居然天上客 나그네 천연거에 올라가더니 느긋히 천상의 객이 되었네. 두 구절의 글자 배열을 보면 둘째 구는 첫 구를 뒤집어 읽은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읽고 거꾸로 읽어 두 구를 만들었다. 그러자 기효람(紀曉嵐)이 이렇게 받았다. 人過大佛寺 寺佛大過人 사람이 큰 절간을 지나가는데 절의 부처 사람보다 훨씬 크더라. 역시 첫 구를 거꾸로 하여 둘째 구로 얹은 것이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雁飛平頂山 山頂平飛雁 기러기 평정산을 날아가는데 산꼭대기 기러기 떼 가지런하네. 花香滿園亭 亭園滿香花 꽃이 만원정에 향기로우니 정원이 꽃 향기로 가득하구나. ..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啥 豆巴 滿面花 雨打浮沙 蜜蜂錯認家 荔枝核桃苦瓜 滿天星斗打落花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이것은 중국 사천 사람들이 곰보를 놀리는 노래이다. 한 글자에서 차례로 한 글자 씩 일곱 자까지 늘여 나갔다. 각 구절의 끝은 같은 운자를 쓰는 면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국음으로 읽어보면 그 자체로 매우 유쾌한 절주를 형성한다. 처음 무얼까? 하는 의문을 던져 놓고, 바로 콩이지 뭐야 하고 받는다. 다시 그 콩은 얼굴에 핀 꽃을 말하는데, 모래밭에 빗방울이 떨어진 형상과 같다. 벌집 같은 그 모습에 꿀벌도 제 집인양 착각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