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터디와 한문의 맛
2018년에 막무가내로 전주로 돌아와 한문공부를 다시 시작하자고 했을 때 막막했었다. 한문공부를 하지 않은 지 어언 7년째라 한문에 대한 감각을 잊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3월에 운 좋게도 임용고시반에 들어올 순 있었지만 공부방식을 모르기에 예전에 하던 방식 그대로 막무가내로 경서 위주로 문장을 보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 밤 7시에 진행되는 스터디. 밤의 어스름함을 뚫고 모이는 발길들.
큰 뜻을 품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
서울 노량진에서 임용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음에도 전주로 굳이 내려온 이유는 그래도 스터디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2007년~2010년까지 임용시험을 준비할 당시에는 전주대 내에 4~5개의 스터디팀이 운영되고 있었다. 학과 차원에서 만들어준 스터디가 아니라 학생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스터디 팀이다. 우리 스터디 팀은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고 몇 년 간 아이들과 한문임용 범위표에 문장들을 함께 보기도 했었다. 그런 전력을 알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고서 전주에 내려왔는데 아쉽게도 그때 당시엔 스터디팀이 두 팀 밖에 운용되고 있지 않았고 이미 판이 다 짜여 있는 바람에 내가 들어갈 순 없었다.
재밌는 것은 4월 초에 스터디룸에 게시된 시간표를 통해 한 스터디팀이 이곳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아이들과 얼굴을 익힌 다음에 그곳에 나도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스터디팀은 날마다 모여 스터디를 하고 있었고 스터디 양이 그만큼 많았던 만큼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큰 뜻을 품고 전주로 오긴 했지만 생각만큼 쉽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열리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학교 내에서 교수님이 진행하는 스터디가 두 개나 운영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점은 큰 수확이었다.
▲ 그 덕에 2018년 4월 16일에 스터디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왜 어색하지 않겠냐만은 그래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4월에 스터디를 만나다
그래서 알아보니 교수님이 진행하는 스터디는 아이들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누구나 참여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수험생들이 함께 하는 스터디는 현격하게 줄어든 대신에 교수님이 하는 스터디가 그 빈틈을 메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월 중순부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스터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입장에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참여하면 그뿐이었지만, 그럴 수 있었던 데엔 스터디 대상자가 열려 있기 때문에 맘을 먹기 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형술 교수는 홍만종(洪萬鍾)이 쓴 『소화시평(小華詩評)』를 기본 텍스트로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었고 나도 그 스터디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화집(詩話集)을 읽은 적은 예전에 공부할 때 허균(許筠)이 쓴 『성수시화(惺叟詩話)』 뿐이었는데, 그 또한 제대로 읽었다기보다는 눈으로 훑어보는 정도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식으로 교수님과 함께 읽고 의미를 탐구하며 스터디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일뿐더러, 위에서부터 얘기했다시피 한문에 대한 감마저 잃어버린 지금은 모든 생소하기만 했었다. 그러니 나의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교수님이 알려주는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정리하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하지만 첫 스터디를 마치고 나서 느낀 감상은 ‘한시가 재밌다’는 것이었고, 그냥 스터디에서 있었던 말을 머리로만 이해하기보다 정리를 꾸준히 해나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19년 6월까지 진행된 『소화시평(小華詩評)』 스터디는 앎의 파토스(Pathos)가 일렁이는 순간이자, 한문공부에 대한 맥(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나의 무지(無知)를 여지 없이 폭로해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만큼 알아가는 희열(喜悅)과 배워가는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 2019년 1월엔 방학임에도 아이들은 매주 마다 두 번씩 나와 스터디를 했다. 대단한 열정이다.
소화시평을 거쳐 이의현의 문장까지
이쯤 되니 임용시험을 준비하러 다시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임용시험에서 한 문제를 더 맞는 공부로의 회귀이기보다 한문공부를 맛을 알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예전에 한문공부를 주구장창 해왔음에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과 즐거움을 알고 나니 버겁게만 느껴졌고 모르기에 나 자신을 무한히 타박해야만 했던 한문공부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이 스터디와 함께 한 지도 어언 2년 6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 사이에 2018년엔 『소화시평(小華詩評)』 선집(選集)의 상권을 모두 마쳤으며 2019년 상반기엔 하권을 마쳤다. 방대한 시들이 담겨 있지만 그걸 한 사람의 관점에서 함께 이해하고 풀어보며 홍만종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시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고 있는지 제대로 음미해볼 수 있었다. 그 후엔 이의현(李宜顯)이 쓴 『도협총설(陶峽叢說)』과 『운양만록(雲陽漫錄)』을 주 텍스트로 공부하며 중간중간에 하나의 스토리가 담긴 서사시(敍事詩)를 보았다. 『소화시평(小華詩評)』는 하나의 텍스트를 온전히 보는 과정이었다면 이때부턴 다양한 글을 정하여 그때그때 보면서 한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리고 조선 중기의 학자가 생각하는 문학의 기치(旗幟)란 무엇인지 느낄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올핸 「이조시대 서사시」를 기본 텍스트로 5월에서야 스터디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원래 같았으면 1월부터 매주 2번씩 스터디를 진행했을 테지만,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 탓에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교수님은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5월에야 시작하기로 맘먹은 것이었다.
▲ 5월에 스터디가 재개되었지만 학교에선 집합금지로 인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페에서 진행되는 스터디였다. 남다른 분위기.
2. 앎의 희열이 넘쳐 흐르다
어찌 모르는 걸 알아가는 게, 그리고 그걸 공부해나가는 과정이 즐겁기만 할까? 그럼에도 감히 재밌다고 표현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즐겁다는 것에도 여러 층위가 있으니 말이다.
▲ 이 글귀가 다르게 보이기까진 오로지 즐기는 사람만이 나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앎이 희열이 되는 이유
『논어(論語)』 「옹야(雍也)」 18장엔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대충 읽으면 ‘아는 사람 〈 좋아하는 사람 〈 즐기는 사람’과 같은 세 부류의 사람이 제시되며 당연히 앞에 위치한 사람보다 뒤에 위치한 사람이 더 우월한 존재라는 인상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이해 때문에 예전에 「옛 이야기 전문가 김환희를 만나다」라는 글에서 한참 썰을 풀어내기도 했었고 단재학교에서 야유회를 갔을 때 5분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주어지자 위의 등호를 그대로 쓰며 “무엇이든 즐기는 사람, 즐기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장광설을 펼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위 구절에 대한 김용옥 선생님이 쓴 『논어한글역주』를 읽고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의 짧은 이해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학(好學)은 앎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앎이란 정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치열하게 아는 자만이 그 대상을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자만이 그 대상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가치관의 서열이 아니라, 오직 치열한 앎이 지향해야 할 상향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일체(一切)인 것이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통나무, 2008년, 470~472쪽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건 결코 층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치열하게 알려고 노력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모르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 그래서 앎의 하나의 단서(Schema)가 주어지면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실제로 막상 한문공부를 다시 시작할 땐 모든 게 흐리멍덩하고 손에 잡히는 게 하나도 없어 발분(發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매순간이 잔뜩 긴장한 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었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리를 할 때면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기억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나기고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한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시화집(詩話集)이 어떤 방식으로 기술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스키마가 생기며 앎의 길목이 조금이나마 열리자 그 다음부턴 아주 재밌고 신나게 공부할 수 있더라. 물론 그렇다고 한문실력이 월등히 좋아졌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는 때에 비하면 하나라도 알게 된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과정이 왜 즐겁지 않겠는가?
▲ 성독실은 리모델링을 해서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곳에 넘실대는 희열들.
서사시와 한껏 친해졌던 올해
올핸 「이조시대 서사시」와 서사시와 한껏 어울릴 수 있었다. 서사시(敍事詩)는 매우 생소한 장르다. 예전에 임용을 준비를 할 땐 결코 보지 않았던 장르였고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2014년부터 임용체제가 3차 시험에서 2차 시험으로 바뀌며 그때부터 서사시도 한문임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다 해석하진 않더라도 해석본 정도는 공부하게 되었다.
스터디를 하면 좋은 점은 대충 해석이나 보며 넘어갈 것도 스스로 준비를 하고 시에 담긴 스토리를 생각하며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5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서사시를 함께 보며 한시라는 정형화(定型化)된 틀로 일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의 생소함을 그대로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산문보다 더욱 해석하기 어려웠으며 그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 힘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개떡 같이 해석을 해도 그걸 세련된 언어로 바꿔주고 내용을 두 깊이 있게 들려줄 교수님이 계셨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할 스터디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맘껏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도무지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얼렁뚱땅 해석한 부분에 대해선 다른 의견이 들어왔고 수정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아니 아직도 모르는 게 많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교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하나의 해석에 빠질 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모두 수용하고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을 만들어가는 것도 공부의 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 밤이 깊었지만 진리관은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들로 따스하기만 하다.
3. 안다는 것과 천재성에 대해
올핸 2016학번 아이들이 대거 스터디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8년엔 하반기로 갈수록, 그에 따라 임용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의 참여가 현저히 낮아지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작년부턴 그런 풍조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들은 임용시험 공부와 스터디 공부를 별개로 여기지 않는 듯했고 스터디 공부를 충실히 하는 만큼 임용시험에 대한 자신감이 붙는 듯 보였다. 당연하다. 어떤 임용공부보다도 더 깊이 있고 내실 있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는 만큼 ‘그나마 조금 할 만해졌다’는 인상이 들기 때문이겠지.
▲ 어느덧 찾아온 가을. 전주대에도 가득 내렸다. 가을 하늘 공활하다.
몰라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작년부터 보아온 아이들은 1년 사이에 실력이 어마무시하게 늘었고 올해 처음 본 아이들도 처음 볼 당시와는 확연히 차이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이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실력이란 무언지에 대해 절로 생각하게 된다. 예전엔 실력이란 하나를 더 알고, 덜 알고의 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확실히 ‘지식(학습)=획득’의 개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 아이들이 보여준 실력이란 ‘알지 못하는데 아는 것처럼 꾸미지 않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그대로를 노출하며 묻고 답할 수 있는 정신’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명확히 아는 상태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논어(論語)』 「위정(爲政)」 17장엔 “유야, 너에게 ‘안다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겠노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앎에 대해 이처럼 간명하고도 통쾌하게 말할 수 있다니. 이에 대해 김용옥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을 덧붙였다.
인간의 앎에 있어서 가장 큰 병폐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즉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명료하게 아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 무지의 영역은 무지한 상태로 소중하게 간직되며, 언젠가는 앎의 영역으로 전이되리라는 소망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느냐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때만이 앎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의 영역은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를 통해서만 반사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바로, 모르는 것을 확실히 모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에게만 비로소 진정한 앎에 대한 발돋움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통나무, 2008년, 1권, 548쪽
이 해설처럼 아이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문식(文飾)하려 하거나, 있어 보이려 갖가지 것들로 꾸며대거나 하지 않고 모르기에 모르는 상태로 묻고 모르기에 그대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1년 사이에, 또는 5개월 사이에 실력은 비약적으로 늘며 눈을 비비고 봐야 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 10월 22일엔 스터디팀 회식이 있었다. 교수님과 나와 운호와 16학번 아이들.
16학번의 천재성과 강건우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가 있다. 여기선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지휘자인 강마에(강건우 마에스트로)와 그를 따라 배우길 원하는 제자인 ‘강건우’가 나온다. 하지만 강건우는 음대를 한 번도 다닌 적도 없고 음악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음에도 청음(聽音)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자다. 그런 그가 강마에에게 배우고 싶어하지만 강마에는 쉽게 맘을 열어주지 않고 자신보다는 학생 친화적으로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지휘자 친구인 정명환에게 강건우를 대신 맡아달라고 한다. 자신의 모난 성격 때문에 강건우의 천재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이때 강마에가 하는 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건우, 쟤 천재다! 인정하고 싶진 않은 데 그런 거 같아, 쟤 미친 놈이야!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천재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천재는 있어. 재능은 있는데 겁도 없어, 모차르트가 라이벌이야. 틀도 없고 형식도 없어. 그냥 막 튀는데 에너지가 번쩍번쩍해. 그러면서도 애가 따뜻해. 사람을 안 놓쳐. 그런데 제일 무서운 건 그게 이제 막 시작이라는 거야. 빙산 끝자락만 보인 건데도 그래. 그 밑에 어떤 것이 숨어 있을지 난 상상도 안 가.
강마에는 강건우의 천재성을 보았다. 그 천재성이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틀도 없이 에너지틱(energetic)하게 맘껏 좌충우돌하며 하나하나 성실하게 쌓아가는 실력인 거시다. 16학번 아이들에게서 바로 이와 같은 천재성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이들에게 내가 배운 건 바로 이 두 가지다. 모름을 감추지 않고 맘껏 노출하며 배우려는 마음과 번쩍번쩍 튀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배우려는 열의로 똘똘 뭉쳐 있는 열정 말이다.
▲ 1년 사이에, 5개월 사이에도 다들 너무도 달라졌다. 그게 저력이다.
4주란 시간
이제 시험까지는 딱 4주만의 시간만이 남았다. 시험이 한 달 남고보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설렘보단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게 마련이다.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한 것만 같고, 그렇게 시험을 기다려왔음에도 미루고만 싶어진다. 이젠 정말 공부의 과정을 결과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드는 감상이리라.
좋다, 4주 후에 어떻게 시험지와 대면할 것이며 시험지 위에 어떻게 나의 실력을 풀어낼 것인지 상상하며 4주 동안 후회 없는 시간을 살아가면 되리라. 걱정보단 기대로, 아쉬움보단 설렘으로, 그렇게 시험을 맞이하고 맘껏 풀어재껴 보자.
▲ 어둠이 짙게 내린 학교 복도는 마치 앎의 출입구 같은 느낌이다. 기꺼이 가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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