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매진하다
발제 원문을 보면 장자는 대대 관계가 해소되어 드러나는 진정한 마음[虛心]으로 세상의 타자와 조우하는 도주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갑자기 밝음을 쓰는 것[以明]이 좋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도대체 밝음을 쓴다고 한 장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밝음을 쓴다는 개념은 「제물론(齊物論)」편에 세 번 등장한다. 앞에서 다룬 원문이 그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일 당신이 그들(儒家와 墨家)이 부정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들이 긍정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밝음을 쓰는 것이다[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아쉽게도 이 두 번째 구절로도 우리는 도대체 밝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직접적으로 밝음을 쓴다는 말의 의미를 장자가 개념규정한 구절이 「제물론」편에 나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볼 다음 구절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함이 있기 때문에 소씨(昭氏)가 악기를 탄다. 만일 완전함과 불안전함이 없다면 그는 악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소문(昭文), 자신의 막대기에 의지해 있는 사광(師曠), 오동나무에 기대에 있는 혜시(惠施), 이 세 사람의 인식은 아마도 가장 완성된 인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단지 그들이 선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밝히려고 했다.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昭文之鼓琴也, 師曠之枝策也, 惠子之據梧也, 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 故載之末年. 唯其好之也以異於彼, 其好之也欲以明之.
다른 사람들은 밝힐 수 없는 데도 그들을 밝히려 했기에 그들은 궤변의 어두움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쳤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도 또한 소씨의 현악기 줄로 삶을 마쳤지만,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완전함이 없었다.
彼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 而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이와 같은 데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완전하다. 아니면 그들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타자도 나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혼란시키는 (논리나 사변의) 현란함은 성인이 경멸하는 것이다. 옳다는 판단[爲是]은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에서 깃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밝음을 쓴다[以明]라고 말한다.
若是而可謂成乎, 雖我亦成也; 若是而不可謂成乎, 物與我無成也.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 “以明”.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완전함[成]과 불완전함[虧]이라는 대대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소씨(昭氏)라는 아주 탁월한 음악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고, 이 대대의 논리가 없어진다면 그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원문에 따르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완전해지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완전함은 좋은 것이고 불완전함은 나쁜 것이라는 사전에 미리 정해진 가치 판단이 없었다면, 그는 완전한 연주를 향해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탁월한 연주가로 후세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자는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 소씨 이외에 음률에 정통했던 사광(師曠)과 변론의 대가인 혜시(惠施)를 들고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완전함에는 이미 완전불완전이라는 가치평가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진정한 주체라기보다 차라리 완전불완전이라는 대대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장자가 보았을 때, 이들의 완전함은 모두 제한된 영역 내의 완전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완전함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인 것, 따라서 유한한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이들이 자신만의 완전함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이들의 완전함은 고착된 자의식의 기준이나 근거로 기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장자가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만이 선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과는 선호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완전함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자신만이 잘 하고 그래서 좋아하는 것[所好]이 있기 때문이다. 소씨ㆍ사광ㆍ혜시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술을 잘 마신다든가, 소를 잘 잡는다든가, 농사를 잘 짓는다든가 하는 자신들만의 좋아하는 바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앞서의 세 인물은 자신들만이 선호하는 것을 자랑하려는 우매함으로 평생을 보냈다. 이런 우매함은 단지 이들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후예들도 자신들의 스승들의 흔적을 따랐지만 이들에게는 스승들이 지녔다고 인정되는 완전함마저도 없었다. 왜냐하면 스승의 완전함이 이들에게는 이제 도달할 수 없는 이상(ideal)으로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망각하고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매진함으로써 불완전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장자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소씨를 포함한 이 세 사람에게 완전함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완전하지 못한 우리들도 완전하다고 할 수 있고, 만약 그들에게 완전함이란 규정을 내릴 수 없다면 타자나 우리들에게도 완전하다는 규정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각각의 삶의 주체는, 자신의 삶의 문맥에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삶 자체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다른 삶의 문맥에서 보면 또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