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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Ⅸ. 타자의 타자성 - 1. 타자의 타자성, 관념 속 자연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Ⅸ. 타자의 타자성 - 1. 타자의 타자성, 관념 속 자연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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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자의 타자성

 

 

1. 관념 속 자연

 

 

산에서 살다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가 없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어 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또 자연은, 태양과 물과 바람과 나무는,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방금 읽었던 아름다운 글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자연을 노래했던 소로우(Thoreau)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님께서 쓰신 글 중 일부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 스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자연과 그렇지 못한 인간적 욕심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다. 그런데 우리는 스님이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자연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자연은 과연 이렇게도 신적으로 혹은 낭만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길을 잃고 산을 헤맬 때 들리는 배고픈 승냥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독사들, 독벌레들과 같이 우리와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의 괴로움이 이 시에서는 철저하게 빠져 있지 않는가?

 

단지 이 스님은,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이 자연에게 의미부여 한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스님은 자신이 자연에서 찾고자 한 것만을 다시 찾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에게 자연은 관조되는 풍경, 혹은 외면에 불과한 것 아닌가? 마치 전통적인 동양의 산수화가 보여주는 풍경처럼 그것은 사변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외면으로서의 자연은 관조하는 주체의 내면에 의해 매개된 자연, 원근법적으로 드러나는 풍경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렇게 자연이 자신의 단독성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조하는 주체의 내면에 의해 이해될 때,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이 점에서 스님이 산속에 있는 자신의 조그만 암자에서 꽃을 피우고 가꾸면서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스님이 키우며 노래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말해 그 자신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만일 스님이 자연을 사랑한다면 혹은 자연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오히려 조용히 암자를 허물고 그곳을 떠날 필요가 있다. 일년도 되지 않아 꽃들은 폐허가 된 암자의 이곳저곳에서 자신들이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날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보지 못한 진드기들도 생기게 될 것이고,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곤충들의 먹이사슬도 새롭게 조성될 것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멀리서 바라본 내면 속의 풍경처럼 아름답지도, 조화롭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을 소재로 삼고 있는 동양화는 거의 모두 관념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매화ㆍ난초ㆍ국화ㆍ대나무를 아무리 아름답게 그려도 그것은 살아있는 매화ㆍ난초ㆍ국화ㆍ대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조용히 홀로 앉아 차를 마신 후, 흰 종이를 꺼내 아무리 기개 있게 난초의 한 획을 긋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의해 매개된 외면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구름에 반쯤 가린 산을 배경으로 계곡의 흐르는 물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선비, 그리고 멀리 농기구를 매고 가는 촌부가 지나가는 흔히 보는 동양화를 기억해 보라. 이 그림 속에 있는 풍경은 사실적인 풍경인가? 혹은 이 풍경을 그린 사람은 진짜 이곳에 가 본 사람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곳은 일종의 무릉도원, 관념상의 장소일 뿐이다. 산이 있어도 그 산은 진짜 산이 아니고, 사람은 있어도 그 사람들은 모두 관념 속의 사람들일 뿐이다. 스님이 노래했던 자연이나 그리고 전통적인 동양화가 표현했던 자연에도 자연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단지 풍경, 혹은 내면의 투사물만이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그런 자연에는 대상으로서의 풍경만이 있지 타자성을 갖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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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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