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정 이야기’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1. 필연과 우연
다양한 철학의 경향들을 나누는 데 많은 기준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고려해 보려는 것은 우발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철학의 경향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은 우발성을 긍정하는 철학과 우발성을 부정하고 필연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나뉠 수가 있다.
우발성은 ‘Contingency’의 번역어다. 이 ‘Contingency’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접촉(Contact)을 의미하는 ‘contingere’라는 말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발성을 긍정하는 철학은 기본적으로 접촉 또는 조우(encounter)를 긍정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소나기를 만날 때, 우리는 ‘소나기와 접촉했다’ 혹은 ‘소나기와 조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조우와 접촉은 우리가 사전에 미리 예측하지 못한 타자나 사건과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접촉이나 조우로부터 유래하는 사건의 특징을 철학에서는 우발성이라고 말한다.
어느 남자와 어느 여자가 사전에 미리 예측하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 남자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이 여자는 쇼핑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쨌든 두 남녀는 길거리에서 조우한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이 두 남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다시 말해 자신들의 만남은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적 만남이 지닌 우발성을 회피하고 자신들의 만남을 영원하게끔 만들려는 이들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만나게 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진리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우의 우발성은 헤어짐의 우발성을 함축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우발적인 사태를 오히려 영원이니 혹은 필연이니 하면서 미봉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어갈 때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혹은 “다른 생에서도 우리 다시 만나요”라고 흐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와 조우할 때도, 혹은 과속하는 차와 조우할 때도, 혹은 강도와 조우할 때도, 과연 우리는 ‘소나기와의 만남, 차와의 충돌, 강도의 습격도 우연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포정 이야기에 나오는 조우한다[遇]라는 글자의 철학적 함축을 이해할 수 있다. 조우라는 사건은 주체의 바깥에 타자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결코 주체가 타자를 분출해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계열들을 지닌 주체가 동등하게 그 자신만의 계열들을 지닌 타자와 만나는 것이 조우이기 때문이다. 포정과 소의 조우, 포정의 칼과 소의 몸과의 조우. 따라서 우리는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서 소를 베었다”는 포정의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자연스런 결[天理]은 소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구조나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포정의 칼이 소의 몸과 조우하면서 생기는 칼의 길 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의 자연스런 결이란 포정과 소의 만남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정이 아닌 다른 도살자가 잘랐으면 다른 자연스런 길이 생길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소를 잘랐다면 소의 자연스런 결은 다르게 드러났을 것이다.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길은 걸어간 뒤에 생기는 것이다[道行之而成]’라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걸어간다는 비약이 없다면 길이고 뭐고 간에 생길 여지가 전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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