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적론적 사고
의심할 여지없이 포정 이야기의 핵심은 포정이라는 주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정은 처음부터 포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포정은 소를 능숙하게 잡기 때문에 포정일 수 있는 것이다. 포정은 애초에 백정의 본성이 있어서 이 본성이 실현되어 포정이 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백정의 본성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일단은 포정은 소를 잘 잡아야만 된다. 만약 포정이 소를 잘 잡지 못하고 매번 칼날을 망가뜨렸다면, 아마도 ‘포정은 백정의 본성을 타고 났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X가 현실적으로 Y를 한다’는 말이 ‘X에게는 원래 Y를 할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후에 생긴 결과를 사태에 미리 귀속시키는 이런 생각의 오류를 목적론적 오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조우를 통해서 발생한 관계를 조우의 양 항 중 하나의 본질로 정립하는 오류를 말한다. 예를 들어 ‘젓가락은 음식을 집을 때 쓴다’면 ‘젖가락에는 음식을 집을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고 말하거나, 혹은 ‘종이컵이 물을 담는 데 쓰인다’면 ‘종이컵에는 물을 담는 본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그 반대가 아닌가? 다시 말해 컵은 ‘물을 담기 때문에 컵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젓가락은 ‘음식 등을 집기 때문에 젓가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물이 없다면 컵은 존재할 수 있을까? 또 육류를 먹는 서양문화 속에서 젓가락은 존재할 수 있을까? 목적론적 오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어떤 X가 Y와 조우해서 특정한 관계를 맺을 때, 예를 들어 어떤 우묵한 모양의 용기가 물과 같은 액체를 만나서 그 액체를 담을 때, 그 X는 컵이라는 규정을 얻게 된다. 그런데 목적론적 오류, 즉 ‘컵에는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는 주장의 오류는 액체라는 타자를 아예 배제해 버리고 만다는 데 있다. 액체가 없다면 애초에 컵은 존재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예를 들어 어느 여성이 매춘행위를 한다면, 목적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 여성에게는 매춘행위를 할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고 말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이런 주장은 어떤 여성이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신의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 그 타자적 상황을 망각하고, 이 여성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그녀 자신의 본성의 실현으로 간주하게 된다.
반복하자면 장자가 ‘포정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주체의 변형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전혀 소를 잡지 못하던 어떤 사람이 19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드디어 소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면서, 칼도 전혀 망가뜨리지 않고 소에게 고통을 가하지도 않은 채 소를 잡을 줄 아는 포정이라는 장인이 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포정이라는 규정 혹은 포정이라는 이름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이런 생성과 변화의 흔적으로서만 포정이라는 인물은 탄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19년이라는 기간은 인간이 타자와 조우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지극히도 힘든 일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년이 지난 뒤의 포정은 완전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절대적인 포정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비록 이렇게 유동적인 마음의 소통 역량을 회복해서 타자와 조우한다고 해도, 어쨌든 조우는 조우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번 예기치 못한 타자성과 다시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그것을 포정의 말로 명확하게 표현한다. “비록 그렇게 제가 능숙하게 소를 잡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저는 매번 살과 뼈가 엉켜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자르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이처럼 장자가 지닌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감수성은 극도로 예민하다. 그는 혹시라도 포정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마음의 수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지나 않을까 극히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수양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매번 타자성과 조우한다[每至於族].”고 말할 때의, 이 매번이라는 글자를 통해 장자는 자신의 타자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 글자는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이 우리의 수양된 마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