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헤엄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식의 거짓 위안을, 누군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에게 구명조끼를 던져줄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대상의 결핍을 냉정하게 인정할 때, 좌절된 삶은, 포기된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슬픔을 승화시킨 표현 행위를 통해 슬픔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루디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였다.
루디의 병세가 악화되어 밤새도록 사경을 헤맨 날. 그날 새벽 마침내, 그토록 수줍음을 타던 후지산은 그 장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루디는 이제 ‘그날’이 왔음을 직감한다. 그는 세상과의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죽은 아내와의 가슴 설레는 재회를 위해, 정성껏 분장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부토 공연을 해온 무용수처럼 스스로의 얼굴을 새하얗게 분장한 루디는 아내가 가장 아끼던 일본 의상 유카타를 걸친 채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이는 물가로 숨 가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만 더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 쇠약해진 나머지 걷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루디는 안간힘 끝에 후지산이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물가에 선다. 마침내 생애 최초이자 최후로, 한 남자의 장엄한 독무(獨舞)가 시작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곳에서, 마침내 그녀와 함께 부토의 춤사위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먼저 간 그녀가 못다 한 춤을 대신 추듯이, 그는 슬픔조차 잊고 부토에 열중한다. 그는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라는 배역을 연기하며 위대한 자연의 풍광을 거대한 애도의 무대 장치로 연출한다. 도대체 언제 저토록 아름다운 춤 동작을 연마했나, 관객이 놀라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쌍무(雙舞)를 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로소 만난 두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미처 함께 하지 못한 춤사위를 이제 마음껏 함께 나눈다. 부토 소녀의 개인교습과 아내의 어깨너머로 배운 춤사위는 지금 지상과 천상을 잇는 부토의 무지개를 만들고 있다. 비장한 애도의 제의가 접신(接神)의 축제적 희열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그의 슬픔은 마침내 불가능한 춤으로 승화되었다. 생을 다 태워도 모자랄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운 춤으로 남김없이 연소되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좌절된 사랑은 억압과 고착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승화라는 탈출구를 찾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창조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좌절된 리비도의 ‘승화(sublimation)’라는 측면을 지닌다. 창조적 예술 활동을 통한 승화는 결국 ‘불가능’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대상의 결핍과 공백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술에서 ‘구원’을 볼 때 우리는 누군가의 억압된 욕망이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행복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루디의 뻣뻣한 팔과 다리에 꼭꼭 숨어 있던 아름다운 춤사위의 해방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비상한다.
한편, 남겨진 가족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관에서 열여덟 살 여자애와, 여자 옷을 입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괴상한 죽음’을, 자식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은 없고, “반년 사이에 우린 천애 고아가 됐네”라는 이기적인 한탄만이 남는다. 먼 훗날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그때쯤엔 비로소 죽음의 춤을 통해 하나가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의 유카타를 입은 채 숨진 루디를 직접 발견한 ‘유’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이 아름다운 춤을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죽은 어머니와 매일 스스럼없이 통화하듯 루디 또한 그렇게 죽은 아내와 행복하게 쌍무를 춘 것이다. 루디는 오갈 데 없이 떠도는 유를 위해, 아니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과 함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해준 유를 위해, 자신에게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부토의 길을 가르쳐준 유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현금을 선물로 남긴다. 어린 소녀는 의연하게 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의 품에 무사히 할아버지를 인도한다. 이제 슬픔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는 물론, 루디 할아버지와도 매일 통화하기 위해 변함없이 발랄하고 상큼한 그녀만의 부토를 공연한다. 그녀의 부토는 흩날리는 벚꽃을 닮았다. 그녀의 부토는 꽃잎처럼 하늘하늘 흩어져서, 이토록 무거운 죽음의 고통조차 가뿐하게 날려버릴 듯하다.
마지막 순간,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춤추고 있던 아내를 만나는 순간, 아마도 루디는 평생을 합친 희열을 넘어서는 극도의 쾌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만큼이나 슬픈 것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부토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다. 당신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첫사랑을 시작하듯 다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랑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애도’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멋진 피날레가 아닐까. 이제 그는 전화기 없이도 그녀와 통화할 수 없다. ‘춤’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속의 베네치아를 찾았으므로. 날개 없이 나는 법을,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으므로. 피그말리온에게 갈라테이아가 ‘걸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상’이었던 것처럼, 루디에게 트루디는 ‘죽어서도 춤출 수 있는 단 하나의 무용수’였던 것이다. 슬픔조차 구원이었던 당신을, 이제는 놓아드린다.
정신분석의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은 충동과 충동의 변형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탐구에 자리를 양보한다. (……)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구체적인 제작능력은 ‘승화(sublimation)’ 과정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로서는 예술 창작의 본질 또한 정신분석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1999, 260쪽.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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