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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 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 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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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발터 벤야민, 겨울날 아침중에서

 

 

이제는 그만 둔감해질 때도 되었는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사소한 자극이 다시금 옛 기억을 건드리기만 해도, 간신히 봉합해놓은 영혼의 상처는 불현듯 속절없이 파열되고 만다.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어떤 배신과 굴욕에도 영혼의 관통상을 입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그 이후의 어떤 화려한 추억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맨 처음의 아름다움. 온몸 구석구석의 촉각이 유독 한 사람의 눈길과 한 사람의 손짓에만 반응하던 순간들.

 

어지러운 인파 속에 그 사람이 섞여 있을지라도 가위로 오려낸 듯 오직 그 사람의 실루엣만이 도드라져 보이던 순간들. 입김조차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 사람이 서 있어도, 그 사람이 바로 옆에서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없이 먼 곳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안타까움. 아마 이런 지독한 사랑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들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턱없이 늙어버린 누들스의 잠든 의식을 강타하는 두 번째 매개체는 낡은 벽 위에 붙은 포스터들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공연 선전 포스터. 이제는 남의 여자, 아니 한때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데보라의 공연 포스터. 어수선한 잡동사니로 가득한 곡물창고에서 스스로 조명과 음악과 연기와 연출을 모두 담당한 멋진 발레 공연의 주인공으로 당차게 빛나던 소녀.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는 어느새 뉴욕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스타가 되어 있다.

 

그러나 누들스에게만은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숨은 얼굴이, 그녀의 화려한 메이크업 속에 숨겨진 그녀의 그늘진 삶의 흔적이 보인다. 오직 둘만이 알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은밀한 첫사랑의 추억들. 그녀의 살구 빛 입술이 내 입술에 처음 닿던 그날. 내 남루한 옷차림과 꾀죄죄한 몸뚱아리조차 천상의 아름다운 시구절로 예찬하던 그녀의 입술 모양을 낱낱이 기억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다.

 

 

삶이라는 책 속에서 추억은 마치 자외선처럼 본문의 난외에 예언으로서 적혀 있던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각자에게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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