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문명과 이집트문명
그러니까 소크라테스ㆍ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 이런 이름들은 인류문명의 원류가 아니라 원류의 말류에 속하는 것이다. 희랍문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희랍인들에게 알파벳 문자수단을 전달해준 레방트(Levant)의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을 이야기해야 하고, 페니키아문명을 이야기하자면 그 남쪽으로 성각문자(聖刻文字, hieroglyphs)를 만든 이집트문명과, 그 비옥한 초생달 동쪽 끝자락에서 이미 BC 3300년경부터 쐐기문자(楔形文字, cuneiform writing)로 쓴 문헌을 남기고 있는 수메르문명(Sumerian civilization)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류문명의 최고(最古)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문명은 매우 성격이 대조적이다. 수메르를 양(陽)이라 하면 이집트를 음(陰)이라 해야할까? 수메르의 조각들을 보면 성나있고 공격적이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집트의 조각들은 정적이며 평화롭고 내성적이며 추상적이고 양식화되어 있다. 전쟁의 묘사는 있지만 이방인에 대해서도 대적적인 자세가 전면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외부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포용적이다. 벽면에 새겨진 부조들을 보아도 이집트의 부조는 대체적으로 평면에 새겨진 부조들이다. 벽면밖으로 돌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계열의 부조는 대부분 돌출되어 있다. 평화로운 이집트인과 공격적인 수메르인의 대비적 성격은 아마도 이집트 나일유역의 압도적 풍요로움과 고립적 안정성,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유역의 비교적인 각박함과 아시아대륙의 고지대로부터 항상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정학적 특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문명의 극적인 대비는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연속되어 있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이집트인들에게 부활이란 죽음의 세계로의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초기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을 정당화하기 위한 폭력이나 협박이 없다. 죽음이 오히려 삶의 모든 영화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장엄하게 치장된다. 삶의 풍요로움이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해소시키고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전은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단절적으로 이해되었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존재의 숙명에 대한 비통이 문명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인간은 지옥의 문앞에 발가벗은 채 홀로 서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수메르인의 세계관은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 매우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다.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우르크(Uruk)의 다섯 번째 왕, 길가메시가 인간이기 때문에 죽어야한다는 비극을 자각했을 때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기나긴 여로에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죽습니다. 내 가슴은 무겁습니다.
가장 큰 인간도 하늘에 닿을 수 없습니다.
가장 넓은 인간도 땅을 다 덮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무덤 속으로 가게 됩니까?
나도 그런 운명입니까?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을 주었고
자신들은 생명을 가졌다.
BC 3000년경부터 이미 형상화되기 시작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이미 우리는 향후 모든 문학의 아키타입을 발견한다.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이야기도, 뱀의 꼬임에 선악과를 따먹는 에덴의 이야기도, 일리아드ㆍ오딧세이의 여정도, 도사 서불(徐巿; 서복徐福)의 이야기를 듣고 낭야대로부터 동해로 수천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태운 배를 띄우는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도 그 조형적 가닥들이 씨줄 날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대비가 양대문명의 분묘형태에서 극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수메르계통의 문명에서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 없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그냥 지하일 뿐이다. 따라서 분묘는 그냥 지하에 정중하게, 소박하게 안치될 뿐이며 지상에 슈퍼스트럭쳐(super structure, 상부구조)를 만들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무덤이라는 것에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화엄의 세계이며, 삶 속에, 태양의 빛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묘가 영원성을 상징하는 지상의 슈퍼스트럭쳐로서 웅장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문명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수메르와 이집트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로부터 시작하여, 아카드(Akkad), 엘라미트(Elamites), 히타이트(Hittite), 바빌로니아(Babylonia), 앗시리아(Assyria), 가나안(Canaanites), 페르시아(Persia), 페니키아(Phoenicia) 등등에 이르는 고대문명의 방대한 문헌과 유물의 수천년간의 축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레코ㆍ로만을 이야기 하거나, 서구 문명의 시원을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으로 단순화시키는 발상은 ‘기독교 신학의 확대해석적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최근 이 고대문명지역을 몸소 세밀하게 답사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나의 무지를 개탄했고, 인간존재의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비젼을 획득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언어에 관한 사피르(Edward Sapir, 1884~1932)의 통찰을 재확인 했다.
미대륙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깊게 연구하고 6개 주요 인디안 어군을 분류까지 제시한 민족언어학(ethnolinguistics)의 창시자이며, 언어학적 인류학(linguistic anthropology)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척한 사피르는 1921년에 출판한 언어(Language)라는 저작 속에서 인간의 언어와 사유의 문제를 통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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